- “근처 오피스텔 살아요”하면 호감?
- 1인 가구 급증…소형 아파트도 넓다
- 프라이버시, 식생활, 쾌적성…원룸도 계층화
- “20~30대, 인생설계 바꾼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청년층 인구가 급증하면서 많은 이가 원룸으로 몰린다. 원룸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 20~30대에게 원룸은 주거 공간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원룸 거주에서 비롯된 문화는 청년층의 인생설계까지 바꾸고 있다.
원룸의 유형은 천차만별이지만 ‘대학가나 주택가에 위치한 5층 안팎 원룸 건물’과 ‘간선도로변 등에 있는 고층 오피스텔 건물’로 크게 양분된다. 필자가 만난 20대의 상당수는 대학 재학 시절엔 하숙집·기숙사보다 대학가 원룸을 더 선호하고, 졸업 후에도 원룸에서 지내려 하며, 미래엔 소형 아파트보단 번듯한 신축 오피스텔에 사는 것을 로망으로 여겼다.
“여자친구도 생활이 있으니…”
원룸은 청년층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연애의 패턴도 바꾸고 있다. 남녀가 각각 원룸에 살면서 상대의 집을 오가는 반(半)동거가 자취하는 대학생 사이에도, 젊은 직장인 사이에도 유행이다. 이렇게 연애하는 이들은 “혼자 사는 것의 장점과 동거의 장점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치켜세운다.지난해 하반기 취업에 성공한 이모(30) 씨는 최근 경기도 신도시 부모 집에서 나와 서울 노원구 회사 근처에 원룸을 얻었다. 그는 “신입사원이라 오전 8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그러려면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해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이유뿐이었다면 이씨는 독립을 단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겐 5세 연하의 대학생 여자친구가 있다. 그녀는 성북구 소재 학교에서 가까운 원룸에서 자취한다. 이씨의 원룸과 그녀의 원룸은 오가기에 멀지 않다.
그는 “회사와 집이 멀어 회식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여자친구 원룸에서 자고 출근했다. 여자친구도 자기 생활이 있으니 그동안 미안했다”고 털어놨다. 요즘 이들의 연애 기상도는 ‘맑음’이다. 이씨는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수 있어 좋고, 모텔 비용이 안 들어가는 것도 좋다”고 설명했다.
서울 모 대학에 재학하는 최모(22·서울시 상도동) 씨는 “원룸에서 자취하는 연인 사이의 남녀 대학생이 상대의 방을 오가며 사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서울 신촌 주변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자신의 원룸과 이성친구의 원룸을 함께 구하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 전했다. 서울 시내 모 대기업 5년차 직원인 홍모(33·서울 공덕동) 씨도 자신의 원룸과 여자친구의 원룸을 오가는 현재의 생활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그는 “결혼할 의향도, 함께 살 의향도 없다. 내 집 마련에도 뜻이 없다. 지금처럼 ‘따로 또 같이’ 방식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가에 눌러앉기
지난해 12월 25일 저녁 8시 서울 남가좌동의 10평 남짓한 박모(30) 씨 원룸에 5명이 모였다. 저마다 맥주, 양주며 손수 만든 음식을 들고 왔다. 박씨는 “출퇴근 때 마주치는 원룸 이웃들에게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제안했는데 다들 흔쾌히 와줬다”고 했다. 이들은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고 31일 밤 다시 모이기로 했다. 부근 대학을 나온 박씨는 졸업 후에도 학교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도심보다 월세가 저렴하고 내게 익숙한 곳”이어서다.
파티에 참석한 회사원 김모(28) 씨는 박씨와 같은 건물 2층에 산다. 김씨도 부근 대학을 졸업한 뒤 계속 눌러앉았다. 강남의 직장까지 통근하는 데 1시간 반이 걸리지만 앞으로도 뜰 생각이 없다. 그는 “술집, 당구장, PC방, 김밥가게에 이르기까지 단골집이 많다. 가끔 대학 동창을 만나 정담을 나누기에도 학교 앞이 그만”이라고 했다.
2년차 회사원 이유진(26·서울 명륜동) 씨도 학생 때 살던 원룸에 계속 머물고 있다. 다행히 그는 직장이 있는 여의도까지 교통편이 그리 나쁘지 않다. 8평 남짓한 그의 방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여의도나 마포의 오피스텔은 2배 가까이 비싸 포기했다. 이씨는 “여기 살면서 저축을 많이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내 대학가엔 구매력을 갖춘 이들 ‘졸업생 원룸족’을 겨냥한 바, 퍼브(pub)가 속속 등장했다. 이런 업소에선 1990년대 곡을 주로 틀어주고 혼자서도 편하게 술을 마시도록 해준다.
이씨의 학교 동문인 직장인 최모(29) 씨는 얼마 전 모교 부근 하숙집 생활을 정리하고 인근 원룸에 들어왔다.
“취업 준비에 집중할 땐 하숙이 편했는데, 밤늦게 들어오거나 여자친구 만날 때 눈치가 보였다. 진짜 나만의 공간이 생겨 좋다. 나는 사내에서 소문난 ‘몸짱’인데 이사하자마자 방에 턱걸이봉과 평행봉을 설치했다. 실내용 사이클도 들여놨다.”
“하루 수백 번 자책”
이처럼 직장인이 대학가 원룸촌으로 몰리면서 재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은 ‘주거난’을 겪고 있다. 수요가 넘치자 집주인들이 임대료를 올리기 때문. 1년째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이모(29·서울 정릉동)씨에게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52만 원의 원룸 임차료는 적잖은 압박이다. 그는 “과외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월세 대랴, 학원비와 식비 대랴, 허리가 휠 지경”이라고 한숨을 지었다. 대학생 박정현(25·서울 신촌동) 씨는 월세 부담 때문에 학교 앞 원룸을 포기하고 고시원에 들어갔다. 박씨는 “월세가 23만 원으로 줄었지만 공간이 비좁아 답답하다”고 했다.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중은 전체의 27%(507만 가구)에 달한다. 원룸 거주자는 계속 늘어나고, 이들 사이에 공유되는 원룸 문화도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다. 사생활 보호, 간편한 식생활, 쾌적성과 보안 중시, 원룸 안에서의 계층화가 그것이다. ‘자유’를 찾아 원룸을 택한 경우가 많기에 이들은 프라이버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대기업 3년차 대리인 김모(31) 씨는 서울 외곽 원룸에서 회사 근처 원룸으로 옮겼다. 강남 논현동에 위치한 회사와 걸어서 15분 거리로 가깝고 역세권이라 교통도 편리하다. 김씨는 강남 입성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직장 동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회식이 있는 날엔 팀장까지 합세한다. “2차는 김 대리 방으로 가자. 어때?” 회식 때마다 그의 원룸은 회사 손님으로 북적인다.
“하루는 문자가 왔다. ‘김 대리, 방문 비밀번호 좀 알려줘. 잠깐 씻고 올게.’ 어이가 없었다. 요즘은 ‘내가 왜 이사 왔다는 얘기를 했을까’하며 하루에도 수백 번 자책한다. 대학 때도 술 먹고 밤늦게 자기 방에 찾아오는 친구들을 마다했는데…. 다시 이사를 고민 중이다.”
원룸엔 조리기구가 있지만 상당수 원룸 거주자는 매끼 요리를 해먹진 않는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간편 음식이나 배달 음식, 식당 음식을 즐긴다. 이 때문에 주변에 대형 슈퍼마켓이나 할인점, 정갈한 식당이 포진한 원룸이 더 인기를 끈다. 특히 먹방(먹는 방송) 열풍 이후론 ‘대충 끼니를 때울 순 없다’는 원룸 거주자가 많아졌다. 원룸 생활 10년차인 권모(34·여,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씨는 “식생활이 중요해졌다. 장보기 편하고, 걸어갈 만한 거리에 브런치 카페가 있고, 배달 음식이 맛있는 원룸이 선호된다”고 전했다.
쾌적성, 보안성, 원룸의 계층화는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쾌적성은 신축 오피스텔이냐, 가전제품 빌트인이 돼 있느냐, 채광과 조망이 좋으냐 등으로 따진다. 보안성은 특히 여성 원룸 족에겐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서울시내 원룸은 다 같은 원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강남이나 홍익대 부근에 위치하면서 쾌적성과 보안성이 뛰어난 신축 고층 오피스텔은 상위 클래스로 통한다. 서울 변두리 대학가 비좁은 골목길에 있는, 지은 지 10년도 넘은 저층 원룸은 그 반대편에 선다. 원룸에 사는 청년층은 아파트로의 이주는 포기하는지 몰라도 ‘언젠가 더 좋은 원룸으로 옮기겠다’는 꿈은 간직하면서 산다.
청담동 오피스텔에선…
작곡가 C(28)씨가 사는 원룸은 많은 싱글족의 로망인 서울 강남 청담동의 오피스텔이다. 15평인 이 오피스텔은 그의 작업실이자 주거지다. 넓은 창문으로 강남 스카이라인이 들어온다. 그는 창문 앞에 작업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그 뒤로 침대와 주방을 뒀다.마루 바닥재와 벽지는 최고급이다. TV,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은 빌트인이 잘돼 있다. 그래서인지 실내가 같은 평형보다 더 넓어 보인다. 포인트는 조명. 천장의 등을 모두 없애고 스탠드 조명으로 대체해 아늑한 느낌을 준다. C씨는 “곡을 쓰다 보면 심리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한다. 은은한 분위기가 좋다”고 했다. 음악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강남에 주로 살고 오피스텔 주변에 브런치 카페나 괜찮은 식당이 많아 만족스럽다고 한다. 가끔 주말 밤엔 부근 클럽도 찾는다.
이 오피스텔 건너편엔 최고가를 자랑하는 오피스텔이 있다. 입주민 중에 유명인사가 많고 주차장엔 고급 외제차가 즐비하다. 부근 부동산중개소 관계자는 “월세가 꾸준히 나간다.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보호해주는 철통보안 속에서 고급 의료서비스까지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익대 부근 오피스텔도 청년층 사이에 각광받는 거주지다. 서울 종로 소재 대기업에 근무하는 정모(32) 씨는 얼마 전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부근 오피스텔에 월세로 들어왔다. 이곳은 쾌적성과 보안성에서 톱클래스에 든다. 홍익대와 신촌의 주거형 오피스텔은 소형 평형 월세가 75만~100만 원에 이르지만 정씨처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싱글족의 수요가 끊이지 않는다. 정씨는 “홍대 오피스텔에 산다는 것이 여성을 사귈 때 ‘프리미엄’으로 작용한다”고 귀띔한다.
“서울에서 가장 핫한 곳에 혼자 살면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주말에 친구들과 홍대 앞 클럽에 자주 가는데, 거기서 새로 만난 여자가 ‘어디 사세요?’라고 물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근처 오피스텔이요’라고 대답하면 처음엔 내게 무관심하던 여자도 이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정씨는 결혼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친구들을 방에 초대해 밥 한 끼, 술 한 잔 하는 게 소소한 낙”이라고 말했다. 그는 휴가 때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게임에 관심이 많아 비디오게임기에 수백만 원을 투자한다. 요즘엔 ‘집 꾸미기’에 휴일 대부분을 할애한다. 그는 “원룸에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다”고 했다.
좋은 원룸에 사는 사람은 대개 정씨처럼 인테리어에도 공을 들인다. 직장인 고기환(33) 씨는 얼마 전 성남시 정자동의 10평 원룸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케아 매장을 10여 차례 들러 가구와 기기를 구입했다. 와인 바를 설치하고 간접조명을 달았다. 의자 4개도 뒀다. 여기에 400만 원이 들어갔는데, 고씨는 “전혀 아깝지 않다. 친구들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페이스북의 ‘집 꾸미기’엔 자신만의 방법으로 꾸민 원룸이 매일 소개된다. 이런 걸 올리는 사람은 주로 싱글 남성이다. 루머스(1인 가구 인테리어 전문 인터넷 카페) 옥수정 대표는 “인테리어 컨설팅을 요청하는 사람 중 70%가 젊은 남성”이라고 전했다. 남자의 ‘내 집 마련’ 욕구가 이젠 ‘원룸 꾸미기’로 대리 분출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