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에 무슨 조건이 필요하겠나”
- “호남 인사 나갔다고 호남 정신과 결별한 것 아니다”
- “선거 닥치면 야권 지지자 요구 달라진다”
먼저 당을 살리기 위해 당대표라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신을 희생하라는 요구에 그는 ‘이미 물러설 만큼 물러섰다’고 주장했다. 12월 31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문 대표 측은 “과거 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이 휘두르던 공천권을 이미 혁신 당헌당규에 따라 시스템화하기로 했다”며 “대표의 기득권은 내려놓았고, 혁신을 통해 당을 쇄신해 총선에서 국민의 평가를 받는다는 방침은 명확하다”고 밝혔다.
1월 14일엔 한발 더 나아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원한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면서 “통합의 기틀이 마련되면 당 대표직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며 “저를 내려놓는 것으로 통합의 물꼬를 조금 트고 싶다”고 말했다.
DJ계와의 결별
그럼에도 연말부터 시작된 탈당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탈당한 이들이 합류하는 안철수 국민의당 인재영입위원장의 세(勢)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1월 둘째 주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도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더민주당)은 20% 수준을 비슷하게 유지했다. 새누리당은 이보다 15%포인트 높다. 1월 12일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전 더민주당 상임고문의 탈당은 정점을 찍었다. 권 전 고문은 탈당 기자회견에서 “당 지도부의 꽉 막힌 운영 방식과 배타성, 이른바 ‘패권’이란 말로 (당이) 구겨진 지 오래됐다”며 “그럼에도 분열을 막아보려고 혼신의 힘을 쏟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고 비판했다.더민주당에 더 큰 부담을 안기는 것은 호남 민심이다. 1월 13일 더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에 합류한 주승용(전남 여수을), 장병완(광주남) 의원은 탈당 기자회견에서 “호남 민심은 자신들을 배제하는 정치, 선거 때만 호남을 이용하려는 패권정치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장병완 의원은 “더민주당은 화석화된 야당 체질에 갇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벽을 뚫어야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에 머물고 있는 이들의 고민도 크다. 호남 지역구의 A 의원은 선거를 앞두고 당의 이름이 후보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부담만 될 수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는 호남 의원들의 연이은 탈당이 꼭 공천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문 대표나 친노가 말하듯 호남이 과연 기득권인가. 민주화운동의 전초기지 아니었나. 문 대표가 호남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호남의 민심 이반 현상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문 대표는 지난해 11월 조선대 강연에서 자신을 흔들고 당을 분란 상태로 보이게 만드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공천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광범위한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1월 14일 기자가 “호남 인사가 많이 탈당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호남 정신’과도 결별한 것 아니냐”고 묻자 문 대표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라며 실제 호남 민심과 호남 기득권 정치인의 주장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막상 선거가 닥치면…”
문재인 대표는 보통 오전 7시 50분쯤 출근한다. 1월 14일 아침엔 평소보다 한 시간쯤 늦게 집을 나섰다. 전날 저녁 집 안의 불도 늦게 켜졌다. “잘 다녀와요”라는 아내의 인사를 뒤로하고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자택을 나서는 문 대표에게 당 내분을 수습할 대책과 총선 전망에 대해 물었다.수습대책의 핵심은 인재 영입이다. 탈당이 예정된 인사들을 붙잡긴 어렵겠지만 국민의 신뢰를 얻는 인재 수혈로 당의 이미지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1월 14일 박희승 전 수원지법 안양지원장, 하정열 한국안보통일연구원장까지 10여 명이 영입되면서 하락하던 더민주당의 지지율도 약간 반등하는 추세다. 김선현 차의대 교수가 논문 표절 의혹 등으로 중도하차했지만, 인재 영입은 긍정적 신호를 주고 있다. 문 대표는 “수권 정당으로 가는 데 우리 당이 많이 부족했는데, 이제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며 인재 영입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했다. 삼성(양향자), 대형 로펌 태평양(오기형), 외교부(이수혁) 기재부(김정우) 등 출신 다변화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문 대표는 영입 대상 1000여 명을 고르고, 평판조사 등을 거친 뒤 직접 만나는 방식으로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중의 한 구절인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 그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를 인용하면서 내세운 ‘사람이 온다’ 캐치프레이즈도 참신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손혜원 더민주당 홍보위원장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달 안으로 국민이 깜짝 놀랄 만한 인사들이 계속 영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총선 전망에 대해 묻자 문 대표는 ‘통합’이란 단어를 앞세웠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합종연횡은 늘 반복돼왔다. 그러나 안철수 의원이 더민주당을 빠져나간 지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고, 권노갑 전 상임고문의 탈당으로 DJ와 친노의 세력 분화를 온 언론이 기사로 도배질한 게 엊그제다.
▼ 나중에 조건이 된다면 국민의당과도 다시 통합할 수 있을까요.
“예, 저는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조건이 된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무슨 조건이 있겠습니까.”
▼ 그렇지만 현재(1월 14일)까지 국민의당에선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하고, 뛰쳐나간 것이니…(안철수 의원은 탈당하면서 ‘혁신을 거부한 세력과의 연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막 창당하는 단계라 통합이나 연대를 말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닥치면 출마하는 분들의 생각도 달라질 테고, 또 국민, 특히 야권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요구가 (지금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를 만난 날은 김종인 전 의원을 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하는 날이었다. 김 전 의원은 선대위원장을 수락하며 야권 통합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의원은 “야당이 이런(분열하는) 모습으로 가면 민주주의 발전에 굉장히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야당이)정상화하는 데 지혜를 좀 줘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종인 변수
그러나 문 대표나 김종인 전 의원의 생각대로 과연 야권 통합이 이뤄질까. 정치권 일각에선 야권이 총선 직전 드라마틱하게 재연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지만, 안철수 신당은 일단 독자 행보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문재인 대표도 이에 질세라 문단속뿐 아니라 빠져나가는 의원의 지역구에 새 인재를 투입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렇듯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경쟁하는 사이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어부지리로 여러 의석을 가져갈 가능성도 높다.한 야권 인사는 “(야권의) 그릇은 이미 깨졌다. 그것을 (안철수, 문재인 등이) 서로 이어붙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번 총선은 3당 구도로 갈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종인 전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한 순간 사실상 야권 통합은 물 건너갔다는 분석도 나왔다. 다음은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의 말이다.
“경제민주화를 줄곧 강조해온 김 전 의원 영입으로 더민주당이 당 지지율 하락을 차단하는 효과는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참여하고 철새 정치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호남이 얼마나 지지할지는 의문이다. 그가 선대위원장을 맡음으로써 일방적 흡수통합을 우려하는 중도 세력과 확대된 야권 세력도 소멸될 수 있다.”
문 대표는 지난 연말 자신의 처지를 ‘설악산 흔들바위’에 비유한 적이 있다. 안철수 의원의 탈당 이후 주변에서 자신을 너무 흔들어댄다며 심경을 그렇게 밝혔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는 계속 흔들리면서도 그 자리에 서 있는 설악산 흔들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남은 사람이 할 일은 똘똘 뭉쳐 보란 듯이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과연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