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박상희의 미술과 마음 이야기

‘나무와 두 여인’ ‘우물가’

박수근

  •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입력2016-01-27 17:55:3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설날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설렙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설날에는 많은 사람이 고향으로 떠나기 때문인 듯합니다. 고향은 우리가 태어난 장소인 동시에 사랑하는 이들과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이지요. 그곳엔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들과 나눈 추억이 존재합니다. 고향이 서울인 저는 지방이 고향인 이들이 설날에 귀성하는 것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들뜹니다.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는 고향이란 그리움과 포근함, 그리고 짠하면서도 풍성함을 주는 안식처일 것입니다.
    심리학적 시각에서도 고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향은 우리 인간에게 원초적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품 안에서 태어나 보고, 듣고, 만지고, 위로받고, 깨우치고, 배운 원초적 경험들은 우리 심리 조직 속에 내면화해 우리 삶에 지속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평생에 걸쳐 타인과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의 준거를 제공하지요.



    어머니 목소리 들리던 그곳

    고향이 꼭 시골이어야만 그리운 것은 아닙니다. 고향은 그 위치가 어디든 누구에게나 애틋하고 그리운 곳입니다. 제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제 고향은 서울 수유리(강북구 수유동)입니다. 머리를 들면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가 훤히 보이는 북한산 아래 마을, 주택들이 무질서하게 머리를 맞댄 좁은 골목길,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어울려 한참 놀다보면 골목 저편에서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던 바로 그곳이 그리운 고향입니다. 지금도 저는 수유리와 비슷한 동네에만 가도 표현하기 어려운 애틋함과 그리움을 느낍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의 풍경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풍경은 사실 배경일 따름이고, 그 배경 속에 놓인 사람들이 그리움의 주인공이지 않을까요. 마음속 고향에서 나를 반겨주는 이들은 부모님이기도 하고, 형제자매들이기도 하며, 현실에서는 연락이 끊겼더라도 추억 속에서는 여전히 제 옆에 있는 그리운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고향에 대한 생각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더 각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 까닭은 동북아 지역이 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촌공동체를 오랫동안 유지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대화와 함께 농민들은 도시로 이주했지만, 도시의 삶 속에서도 농촌에서의 공동체 생활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제가 살던 수유리의 경우를 봐도 골목 안 사람들은 대가족 같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어울려 지낸 것 같습니다.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박수근(1914~65)의 작품들입니다. 지금까지 이 지면에서 다룬 한국 화가는 겸재 정선이 유일합니다. 한국적인 것을 화폭에 담은 전통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가 정선이라면, 현대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는 박수근입니다. 박수근은 지난 20세기 후반 우리의 ‘국민화가’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인물입니다.



    ‘한국적인 그림’ 고심한 화가

    박수근은 이례적인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어린 시절 그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전문적인 수업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서양 모더니티의 세례를 받지 않고 독학과 습작으로 자기 회화의 세계를 구축해간 박수근의 그림에는 참으로 독창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미술과 심리에 대해 관심이 많던 제가 품고 있던 질문 중 하나는 ‘한국적인 그림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특히 현대에서 한국적인 회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습니다. 화폭에 담는 풍경이 서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습이면 그것이 현대적 한국화일까요. 아니면, 먹이나 한지 같은 전통적인 도구들을 사용하면 한국적인 것일까요. 저의 이런 질문에 가장 근접한 정답을 알려준 화가가 박수근입니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나의 어머니, 나의 아이, 나의 형제자매, 친구들이 지금이라도 그림 밖으로 나와 나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만질 것만 같습니다. 그의 그림 속 어머니의 등에서 세상 걱정 하나 없이 잠든 아기의 모습은 바로 내 어머니 등에서 행복한 낮잠을 자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장소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그림들이 가장 한국적인 회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있습니다. 박수근은 화폭에 담는 대상인 내용 못지않게 그 대상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한국적인 독창적 방법을 보여줬습니다. 그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화강암 특유의 질감, 곧 마티에르는 한국적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적합한 방식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화강암에 선으로 새긴 전통 시대의 불상과 같은, 대상을 간결하면서도 다소 불투명하게 묘사하는 박수근의 독창적인 기법은 제 눈에는 ‘전통의 새로운 창조’로 보입니다.
    지난 20세기에 서양 미술이 도입된 이후 인상주의에서 추상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이 범람했지만, 박수근은 서구 양식과는 거리를 둔 채 이렇듯 독자적인 방법으로 우리 삶과 자연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화폭을 채우는 나목(裸木), 여인, 어린이, 소박한 동네 풍경은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감동을 안겨줬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무와 두 여인’(1962)은 박수근의 미술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관심

    그림 한가운데는 키 큰 고목이 서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는 함지를 인 여인과 아이를 업은 여인이 있습니다. 함지로 상징되는 ‘노동’과 아이로 상징되는 ‘육아’는 이 땅의 여성이라면 대부분 감당해야 했던 일들입니다.
    박수근의 작품들에 주로 나오는 이들은 여성이나 어린이들입니다. 여성과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를 대표합니다. 이들을 즐겨 그렸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박수근의 관심과 애정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자각, 그리고 그것을 지켜주기 위한 실천이 1980년대 민주화 시대 이후에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박수근의 문제의식은 선진적입니다.
    이 그림의 가운데 놓인 나목은 쓸쓸해 보이지만 참으로 당당합니다. 박수근은 나목을 즐겨 그렸는데, 그가 그린 나목은 박수근의 젊은 시절을 알고 지낸 소설가 박완서의 첫 소설 ‘나목’의 제목과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림 속 나무를 보며 ‘이 나목은 작가 자신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록 지금은 헐벗었지만 봄이 오면 나뭇잎이 풍성해지고 꽃이 향기로워질 나목, 평생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지만 화가로서 묵묵히 독자적인 세계를 펼쳐 보인 박수근 자신의 삶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요.
    무엇을 그릴지는 화가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화가가 다루는 주제에는 삶과 사회에 대한 화가의 마음과 인식이 집약돼 있는 법이지요. 박수근 작품이 갖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박수근의 그림을 처음 볼 때는 마음이 다소 쓸쓸해집니다. 그 쓸쓸한 느낌은 그의 소박한 삶과 중첩되면서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이 가졌을 외로움과 고단함으로 번져갑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주는 감동은 외로움과 고단함을 느끼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그림은 신기하게도 큰 위로를 줍니다. 마치 지친 현대 생활 속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품만 생각해도 위로가 되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듯이 박수근의 그림에는 우리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 위로와 힘이 있습니다.
    박수근이 여성과 어린이들을 즐겨 그렸다고 해서 그가 약자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만을 의도적으로 부각한 것은 아닙니다.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의도적인 계몽을 넘어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박수근 작품의 미덕이 있습니다.



    현실을 견뎌내려는 자존감

    ‘우물가’(1953)는 박수근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시골의 우물 주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가집 앞에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 주변에는 두 여인과 한 아이가 있고, 빨래가 널려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닭 두 마리가 놀고 있습니다. 소박하면서도 평화로운, 그러나 가난해 보이는 시골 풍경입니다. 우물가는 여성들이 삶의 고단함을 나누는, 그 고단함을 이야기로 푸는 정겨운 장소입니다.
    ‘우물가’는 한국적 전원 풍경을 담았습니다. 시골에서 산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며, 그만큼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박수근은 고향의 모습을, 한국적 풍경을, 그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선함과 순수함을 이렇듯 간결하게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우리네 무의식 속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포근한 어머니 품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작품들을 보노라면 박수근이 왜 우리 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박수근의 작품에 담긴 고향의 풍경은 최근 들어 크게 바뀌었습니다. 산업화가 이뤄지고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농촌이든 도시든 그 모습이 적잖이 변화했습니다. 함지를 머리에 인 여인이나 한갓진 우물가를 주변에서 더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박수근의 그림이 표현하는 것은 과거의 시간이지 현재의 시간은 아닙니다. 어쩌면 제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박수근의 그림 속 풍경은 참으로 낯설기 그지없는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박수근의 작품에 담긴 시간이 지나간 과거라 하더라도, 그가 전달하려 한 인간의 선함에 대한 존중,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따뜻한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현실을 쓸쓸하지만 당당히 견뎌내려고 하는 자존감은 시간을 초월한 예술적 감동을 여전히 선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수근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입니다. 휴전선이 지나가는 양구는 태백산맥 서쪽에 놓인, 인제와 화천 사이에 놓인 고장입니다. 양구에 가면 박수근미술관이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가보는 것이 저의 작은 소망 중 하나입니다. 시골에 연고가 없는 서울토박이인 저는 어릴 적 시골 친척집에 가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어른이 됐는데도 박수근의 그림 속 고향을 꼭 가보고 싶은 것을 보니 그의 그림에는 어린 시절로 회귀시키는 마법이 있나봅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