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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 채명신 묘가 80평 YS·DJ 묘보다 吉地?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편집위원 | hoon@donga.com

1평 채명신 묘가 80평 YS·DJ 묘보다 吉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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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봉황 된 사연

참새가 봉황이 되는 영예를 만든 ‘동작’은 어떻게 지어진 이름인가. ‘서울지명사전’은 동작동 유래에 대해 “구리처럼 검붉은 색깔을 띤 돌이 많아 ‘동재기’로 불렸다. 그곳의 나루를 ‘동재기 나루’라 했는데, 이를 한자로 ‘동작진(銅雀津)’으로 적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참새 ‘작(雀)’은 ‘재기’를 표현한 음차(音借)이지, 새가 날개를 펴 감싼 지형을 표현한 게 아니다.
조선 후기 화가인 정선(1676~1759)은 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쪽에서 한강 건너 동재기 나루를 그리고 ‘동작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림엔 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마을이 있다. 동작진은 한양 권세가들이 ‘별서(別墅, 별장)’를 두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는 아름답게 보존돼야 하는 지역이었다는 뜻인데, 그렇게 된 이유로는 중종 후궁의 묘가 거론된다.
죽은 뒤 창빈(昌嬪)으로 추존된 안씨(1499~1549)의 묘가 그것이다. 왜 권세가들은 그 묘소 부근을 별서 지대로 쓰며 손대지 못했을까. 보통 후궁의 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서울 금천구에 살던 안탄대의 딸로 태어난 안씨는 8세 때 궁에 들어갔다. 궁녀는 ‘임금의 여자’이기에 승은(承恩)을 입지 못하면 후사(後嗣)가 없다. 궁녀 세계에도 계급이 있다. 음식을 하거나 옷을 짓는 등 일도 해야 한다. 승은을 입으면 계급이 급상승하고 일에서 벗어난다. 그러지 못하면 천천히 진급하며 일만 하다 쓸쓸히 타계한다. 그래서 궁녀는 승은을 입으려 경쟁한다. 목숨을 걸고 정비인 왕비와 다투기도 한다.
안씨는 슬기롭게 행동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정숙하게 처신하며 성종의 제3계비인 대비를 모셨다. 대비전엔 왕이 드나든다. 안씨는 스무 살 때 대비의 아들 중종의 승은을 입어 2남1녀를 낳고 숙용(淑容)까지 올라갔다.
중종에겐 3명의 정비가 있었다. 첫 번째 왕후는 정치적 문제로 아들 없이 헤어졌다. 두 번째 정비(제1계비 장경왕후)는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바로 사망했다. 그리고 사극에 자주 나오는 문정왕후가 들어왔는데, 그는 장경왕후와 파평 윤씨 같은 파였다. 촌수는 9촌이고 항렬은 장경왕후가 하나 높았다. 사람들은 제1계비였고 항렬이 높은 장경왕후 쪽 윤씨를 ‘대윤(大尹)’, 문정왕후의 친정을 ‘소윤(小尹)’으로 불렀다.
중종은 안씨를 취할 무렵에 문정왕후를 맞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출산했는데, 문정왕후는 내리 딸만 셋(1521, 1522, 1530)을 낳았으나, 안씨는 3남1녀를 낳아 아들 하나를 잃었다(1521, 차남은 출생 후 바로 숨짐, 1526엔 딸, 1530). 그러나 문정왕후의 시기를 받진 않았다. 안씨의 차분한 성격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1534년 문정왕후가 ‘드디어’ 아들(훗날 명종)을 낳은 것도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일어난 것이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 간 암투다. 1509년 아들 복성군을 낳은 경빈 박씨는 1515년 장경왕후가 타계했을 때 강력한 계비 후보로 올랐으나 문정왕후에게 패했다. 문정왕후는 1527년 일어난 정치 공작인 ‘작서(灼鼠)의 변(變)’을 계기로 경빈 박씨 모자를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진 못했다. 그러던 중 1544년 중종이 승하했다.
임금이 죽으면 승은을 입은 후궁들은 중이 되는 게 관례인데, 안씨는 문정왕후의 배려로 궁궐에 머물렀다. 중종의 뒤는 장경왕후의 아들(인종, 당시 29세)이 이었는데, 그는 8개월여 만에 후사 없이 숨졌다. 인종이 숨진 것은 계모 문정왕후가 독이 든 떡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확인되진 않았다. 이어 문정왕후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 새 임금(명종)이 됐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휘어잡았다. 친정과 손잡은 문정왕후는 인종을 후원했던 대윤을 쳐냈다. 왕의 외척인 파평 윤씨끼리 벌인 피비린내 나는 이 싸움을 역사는 을사사화(1545)로 기록한다.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총애하고 병조판서로 제수해, 성리학을 숭상하는 대신들의 강한 불만을 샀다. 을사사화를 당한 세력엔 사림파가 많았는데, 재야를 장악한 그들은 문정왕후를 악녀로 낙인찍고 강하게 비판했다. 소윤 사이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2년 뒤 문정왕후는 그를 비판한 사림파와 등을 돌린 세력을 다시 척결하는 정미사화(1547)를 일으켰다. 안씨는 그러한 환란기에도 살아남았다. 문정왕후는 오히려 그를 배려했다. 1549년 안씨가 죽자 문정왕후가 그의 2남1녀를 보살폈다.



손자를 왕으로 만든 자리

안씨는 장흥에 묻혔다. 몇 해 뒤 그의 둘째아들 덕흥군이 풍수가의 말을 듣고 어머니의 묘를 동재기로 옮기고 1559년 서른 나이에 죽었다. 1565년엔 문정왕후가 타계하고, 1567년엔 명종이 서른넷의 나이로 병사했다.
명종은 생전에 아들을 잃었기에 병석에 누웠을 때 후계 문제를 걱정하다, 타계한 이복형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당시 15세)을 지목했다. 대신들은 문정왕후를 앞세운 외척(윤형원 일파)의 발호에 진절머리를 냈기에, 명종이 이렇다 할 외척이 없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자 반대하지 않았다. 하성군이 바로 선조다. 하성군이 왕이 되자 사람들은 그의 할머니 무덤에 주목했다.
임금이 된 하성군은 죽은 아버지를 조선 최초의 대원군(덕흥대원군)으로 추증했다. 조선에선 4명의 대원군이 나왔는데, 덕흥대원군 등 3인은 아들이 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에 추증을 받았다. 흥선군만 살아서 대원군이 됐다. 흥선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명당이라는 곳으로 이장하고 7년 뒤 차남을 낳았다. 그 차남이 후사 없이 승하한 철종에 이어 왕(고종)이 되면서(1863)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조선은 그렇게 풍수에 젖어 있었다.
선조는 할머니(안씨)를 정1품인 빈(嬪)으로 올려 ‘창빈’이라 칭하고 제사를 모셨다. 정1품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만 받는 최고의 품계, 빈은 후궁 중 가장 높다. 세자의 부인도 빈의 품계를 받는다.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 등에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세자와 빈의 무덤은 ‘원(園)’, 그 이하는 ‘묘(墓)’로 부르도록 했다. 이 원칙은 매우 엄격해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광해군과 연산군이 묻힌 곳은 묘로 불린다.
선조는 ‘정통’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뿌리를 높이려 안달했다.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묘를 ‘덕릉’으로 부르라고 요구했으나 중신들은 따르지 않았다. 창빈 안씨의 무덤도 원으로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은 손자를 왕으로 만든 자리로 알려져 ‘동작릉’으로도 불리게 됐다.
조선의 풍수는 ‘종산(宗山, 백두산을 비롯해 큰 지역의 중심이 되는 산)’에서 흘러온 ‘용(龍, 산맥)’을 작은 지역의 중심이 되는 ‘주산(主山)’으로 하고, 주산 안을 감싸며 좌우로 흘러간 산등성이가 있으면 ‘좌청룡’과 ‘우백호’인 ‘사(砂)’로 본다. 그런 가운데 주산에서 중앙으로 내려온 낮은 용에 맺힌 곳이 있으면 ‘혈(穴)’, 좌청룡과 우백호 사이 터진 공간에 책상처럼 야트막한 산이 있으면 ‘안산(案山)’으로 본다. 혈처를 만드는 용과 좌청룡·우백호가 이룬 계곡에선 좋은 물(水)이 적당히 흘러나와 안산 옆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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