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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 (複雜系)*

가고시마

  • 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w68@daum.net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 (複雜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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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사무라이’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 (複雜系)*

난슈 묘지에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세이난전쟁 전사자들이 함께 묻혀 있다. 사진제공·전계완

가고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여 개의 동상이 도심 곳곳에 서 있고, 의류·제과·완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에 사이고가 활용된다. 시내 중심 덴몬칸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는 사이고의 대형 동상과 그의 후손이 운영하는 기념품 판매장이 있다.  
사이고는 일본 역사에서 혁명군이자 반란군이었다. 하급 무사로서 사쓰마번주의 지원으로 군벌로 성장했고,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번(長州藩)과 동맹을 맺고 막부 타도에 나서는 등 전설 속 인물처럼 살았다.  
그러나 1870년대 정한론을 주장하며 한반도 침략을 추진하다 메이지 신정부의 반대에 부딪혔고, 국가 재건 세력으로 사무라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신정부의 징병제에 막히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자 100여 명의 신정부 인사를 데리고 사쓰마로 낙향해 사립 군사학교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메이지 신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고, 끝내 반란군이 돼 정부군과 전쟁을 벌인다. 그것이 1877년 세이난(西南) 전쟁이다.
“사무라이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던 일본인의 고정관념은 세이난 전쟁을 통해 무참히 깨졌다. 아무리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사무라이라도 현대식 무기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일본인들은 알게 됐다. 사이고는 구마모토성 전투에서 몇 개월을 버티지 못하다 고향 사쓰마로 돌아와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전쟁의 정부군 책임자는 사이고의 죽마고우인 메이지유신 영웅 오쿠보 도시미치였다. 혁명 동지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대장으로 바뀌어 내전을 치르는 기묘한 운명. 세이난 전쟁 이듬해에 오쿠보가 암살된 것을 보면 혁명은 사실이면서도 꼭 소설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에서 승리한 신정부가 패배한 반란군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다. 살아 있는 자는 능지처참, 죽은 자는 부관참시해 더 이상 역적 모의를 못 하도록 하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지만, 신정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집단매장했다. 세이난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이고와 그의 부하들을 집단매장한 곳이 시내 남쪽에 있는 난슈(南州) 공원이다.
묘지 정중앙에 사이고가 있고, 이를 둘러싼 200여 기의 무덤이 화산섬 사쿠라지마를 바라본다. 구성진 까마귀 소리가 묘지의 분위기를 더욱 스산하게 만든다. 필자는 가고시마에 갈 때마다 난슈 공원과 사이고의 자결 동굴을 둘러봤다. 억울한 신분,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 목숨을 건 도박, 불굴의 정신, 미련 없는 죽음…. 혁명 영웅에서 반란군 수괴로 바뀌어 자결을 강요받고 죽음을 택한 그를 가고시마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무라이’로 칭송한다.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사이고의 호전성은 당시에는 실패한 듯 보였지만, 메이지 신정부 세력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결국 정한론을 실천에 옮겼다. 체제를 전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한 메이지유신 세력은 서양으로부터 받은 불평등을 조선과 중국에 그대로 강요했고, 자국의 부국강병을 넘어 국수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를 장착한 괴물로 변하며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평화를 위한 희생’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 (複雜系)*

특공평화회관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1000여 개의 석등과 ‘평화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문구가 적힌 푯말이 있다. 오른쪽은 회관에 재현해놓은 가미카제 대원들의 막사.

가고시마 중앙역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남쪽으로 가면 미나미규슈(南九州)시가 있다. 녹차로 유명한 작은 도시지만, 태평양전쟁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 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일본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불러내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케 했다. 이곳에서만 1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조선인도 10여 명이 희생됐다.
미나미규슈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희생을 기리는 특공평화회관, 전사자의 사진과 유서 등 유품을 모아 전시하는 도미야료칸(富屋旅館) 등이 있다. 연말인데도 박물관과 전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특히 일본 정부의 지원 아래 미나미규슈시가 지난 2년 동안 이 유품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방문객은 더 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규슈 지방에서 주로 방문객이 왔는데, 지금은 도쿄, 오사카 등의 혼슈 지방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도 늘고 있다는 게 회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일본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평화의 상징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다고 했을 때 한국과 중국은 반발을 넘어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국이 어린 학생을 동원해 자살폭탄 공격을 한 것이 어떻게 평화를 위한 희생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해 등재에 실패했지만 이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기겠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히로시마에서 손자를 데리고 역사 현장을 방문했다는 70대 재일동포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후손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일본의 의도대로 가미카제 특공대가 평화를 위한 희생으로 미화될 게 뻔하다”며 “이것이 전쟁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에 대한 사죄가 없는 일본 극우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주군의 명령에 따라 생사를 결정하던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1868년), 더 정확하게는 세이난 전쟁(1877년)으로 수명을 다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자결로 일본은 사무라이를 버리고 근대 국가로 전환했다. 권력을 움켜쥔 신정부 혁명 세력에게 사무라이는 구태였고 버려야 할 인습으로 인식됐다. 일본은 국민을 그렇게 교육시켰다.



다시 태어난 사무라이들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 (複雜系)*

탁자를 치며 열변을 토하는 ‘정한론’ 주창자 사이고 다카모리. 동아일보

그런 사무라이가 20세기에 망령처럼 다시 살아났다. 1870년대 폐도령(廢刀令)을 내려 사무라이들에게 칼을 버리라고 한 혁명 세력이 다시 칼을 차고 나타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식민지시대 조선 학교에서도 칼을 찬 일본인이 등장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살폭탄비행에 나서는 청년에게 사무라이 정신을 가르쳤다. 결국 일본은 용도 폐기된 사무라이를 제국주의의 확장 수단으로 삼았고, 바로 그 사무라이 정신 때문에 패망을 맞았다.
지금 가고시마에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 깃발이 나부낀다. 쇼코 슈세이칸을 비롯한 산업혁명 유적은 일본의 자부심을 상징하며 전국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가고시마에서 출발한 혁명의 불길이 전국을 넘어 아시아 지역 발전의 모범이 됐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산업화가 군국주의, 제국주의, 식민지 침탈로 이어져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는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성공한 역사만을 기리고 있다.
2018년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준비하는 캠페인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역사만 골라 강조한다. 상대가 인정하는 객관은 없고 자신의 주관을 상대에게 객관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중적으로 설명되는 곳이 일본이고,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담고 있는 지역이 가고시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 가고시마를 둘러보고 익숙한 이름을 만났다. 중앙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가면 고라이초(高麗町), 고라이바시(高麗橋)를 만날 수 있다. ‘고려 마을’과 ‘고려 다리’다. 고라이초라는 동네에 한반도의 흔적은 없고, 고라이바시라는 다리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 영주이던 시마즈 가문에 의해 조선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와 산 곳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답은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곳 이름이 고려 마을이었을 수도 있다.
가고시마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은 고우스키가와(甲突川)이다. ‘갑돌천’, 일본에서 흔하지 않은 지명이다. 갑돌이, 갑순이라고 부를 때 쓰는 갑돌천이다. 가고시마를 상징하는 활화산 사쿠라지마를 둘러싼 바다의 이름은 긴코만(錦江灣)이다. ‘금강만’이다. 가고시마 박물관을 둘러싼 성터는 백제시대 양식이라고 한다.
사실 확인과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필자는 한반도와 가고시마가 우연의 일치를 넘어서는 깊은 역사적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이들이 어떻게 일본으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이름의 흔적에서 한반도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도망을 왔다면 원한 섞인 그리움일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향수일 것이다.





제2의 사쓰마-조슈 동맹

아이러니하게도 갑돌천이 흐르는 고려 마을에서 메이지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태어났다. ‘유신의 옛길’이라는 전시관도 갑돌천변(邊)에 있다.
2004년에는 가고시마에 뿌리를 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노무현 대통령이 이곳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한 첫 총리인 고이즈미는 자신의 후계자로 아베 총리를 지목했다. 아베 총리는 야마구치(옛 이름은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다. 사쓰마-조슈 동맹으로 막부 체제를 무너뜨린 것처럼 ‘강한 일본’을 주창하며 가고시마-야마구치 출신 총리들이 손을 맞잡고 우경화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가고시마에 한반도의 흔적이 너무 많아 두 나라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오랜 시간 원한이 원한을 쌓아왔다면 한일 양국은 구원(舊怨)을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스쳤다.

*복잡계 _ 작은 사건처럼 보이는 수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체계




신동아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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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w6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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