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박상희의 미술과 마음 이야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외젠 들라크루아

  •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입력2016-03-23 16: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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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4월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20대 총선이 치러집니다. 연일 선거에 관한 수많은 뉴스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입니다. 권력이 세습에 의해 주어지는 제도가 군주정이라면,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정치제도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서양의 근대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정치의 기초를 이루는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뿌리내려왔습니다.
    미술과 마음을 다루는 이 코너에서 선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다소 의아해하는 독자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정치나 이념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국민 다수가 관심을 두고 있는 선거 열풍을 보며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미술 작품들을 살펴보고 싶어졌을 뿐입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저는 ‘민주주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마음

    마음을 꼭 개인적 차원으로 국한해 파악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란, 기본적으로는 개개인이 소유한 것이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도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제가 너무 억지스러운 것일까요.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제 마음에 떠오르는 가치는 ‘자유’와 ‘평등’입니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체제를 뜻하며 이는 결국 국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겠지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직업인 제가 보기에 ‘내 삶의 선택은 나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유의식은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기본이 되는 정신적 산소와 같은 것이고, ‘나는 다른 이와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평등의식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지니기 위한 기본 토대입니다.
    서양 회화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민주주의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가장 즐겨 인용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회화에 맞서 낭만주의 회화를 열고 이를 대표한 화가입니다. 낭만주의 회화는 객관보다 주관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고, 인간이 갖는 상상력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화풍을 말합니다. 낭만주의 회화는 인간의 고양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화려한 색, 격렬한 붓 터치, 극적인 구성, 외국에 대한 동경을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낭만주의 화풍을 가장 잘 보여준 화가가 들라크루아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7월 혁명을 담고 있습니다. 7월 혁명은 1830년 부르봉 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 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프랑스 시민혁명입니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자유의 여신입니다. 이 주인공은 자유(청색), 평등(백색), 박애(적색)를 뜻하는 삼색의 프랑스 국기를 들고 시민들을 이끄는데, 시체들을 넘어 전진하는 시민들의 표정은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1931년 살롱전에 출품돼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프랑스 시민혁명을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각자도생의 아이러니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을 앞세움으로써 7월 혁명의 의미가 자유의 회복에 있음을 부각했습니다. 7월 혁명에 앞선 프랑스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정신은 앞서 말한 자유·평등·박애였습니다. 이 가운데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를 이루는 양대 가치입니다. 타인 또는 조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프랑스 대혁명과 7월 혁명처럼 자유를 얻기 위한 사회운동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960년 4월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꼽을 수 있습니다. 4월 혁명이 이승만 정부의 부정 선거를 규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 저항이었다면, 6월 민주화운동은 전두환 군부정권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민주화 시대는 바로 이 6월 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됐습니다. 저는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걸고 투쟁한 이 운동들이, 우리 국민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는지를 드러내주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이라는 권리에는 중요한 사항이 덧붙여질 수 있습니다. 이런 권리를 누릴 때에는 이에 상응하는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권리는 당연히 누리되 이에 따른 책임을 자발적으로 감당하려는 태도가 제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의 마음’입니다.
    책임의 다른 이름은 의무입니다. 의무를 생각하면, 흔히 국민의 4대 의무를 떠올립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러한 의무를,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여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권리를 누리기 때문에 그에 상응해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성숙한 시민의식 아닐까요. 나의 권리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권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관용과 배려와 공공질서 의식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올바로 존중될 때 민주주의가 튼튼하게 뿌리내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현실을 둘러보면 권리는 누리고 싶지만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권리만 존재하고 책임이 부재한다면 그 사회는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사회가 될 것입니다. 각자도생 사회는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이가 비판한 현상이지요. 사회운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성취했다고 생각해왔는데, 국민 다수가 현재 목격하는 게 각자도생 사회라면, 이는 민주주의의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건강한 자의식, 이타적 애정

    들라크루아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Death of Sardanapalus·1827)입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쓴 시극 ‘사르다나팔루스’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낭만주의 회화에서 또 하나의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화면 앞에는 흑인 노예가 말을 죽이고, 백인 호위병은 벌거벗은 여인을 찌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죽은 사람이 화면을 채우고, 바닥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많은 보석이 널려 있습니다. 캔버스 뒤편에서 침대에 기대 이 참혹한 광경을 우울하게 지켜보는 이가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입니다.
    멀리는 카라바조와 루벤스의 그림을 상기시키고, 가까이는 이 코너에서 다룬 적이 있는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에서 들라크루아는 화사한 육체와 존귀한 보석으로 상징되는 욕망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이국적 배경 속에서 붉고 검은 격정적인 색채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감정적인 화려함에 제압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숨이 막힌 까닭은 이 작품의 배경 설명에 있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사르다나팔루스가 큰 장작불 위에 놓인 침대에 누워서 노예와 호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개와 말 등 동물들까지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하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던 모든 것을 죽음과 함께 끝내려고 한 것이지요.
    이 점에서 이 그림은, 책임감 없는 권력자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로도 보였습니다. 또한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리지만 너무 자주 보도되는, 가장에 의한 일가족 살해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책임감이란 자신에 대한 건강한 자의식과 타인에 대한 이타적 애정을 가진 성숙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망각한 채 마치 동물과 같은 본능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휘두르는 폭군 아래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꽃피울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품을 남겼음에도 정작 들라크루아는 단정하고 세련되며 애국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 볼 수 있는 민주주의와 폭력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대한 넓고 깊은 이해를 모색하려고 한 화가가 바로 들라크루아인 셈입니다.


    귀하게 여겨야 소중한 것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선출하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의 투표율이 민주화 시대가 시작된 이후 계속 낮아져 왔다는 점입니다. 19대 총선(2012년) 투표율은 54.2%, 18대 총선(2008년) 투표율은 50%도 채 안 되는 46.1%였습니다. 투표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절차임을 생각하면 너무 낮은 투표율입니다.
    곧 있을 선거를 앞두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프랑스와 우리나라 국민이 벌인 저항과 사회운동을 생각해봤습니다. 소중한 것은 그것을 귀히 여기고 지킬 때 소중한 것으로 남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투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갖는 소중한 권리이자 당연한 책임입니다.
    상담사인 제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대단한 일을 할 순 없겠지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기본이 되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투표라는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도 소중한 한 표를 꼭 행사하시면 좋겠습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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