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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외교는 ‘자주적 예술’이다 上

칼춤이 노린 것은 ‘천하를 빼앗을 자’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외교는 ‘자주적 예술’이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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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項莊舞劍, 意在沛公.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와 관련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외신 인터뷰에서 언급한 고사성어다.
  •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을 죽이려 한 항장(項莊)을 한국에 비유한 듯한 이 고사의 함의를 들춰보면 우리 외교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다.
북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따른 사드 배치 문제가 불거지면서 북한의 혈맹 중국이 단단히 뿔이 났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항장무검(項莊舞劍), 의재패공(意在沛公)’이란 고사성어를 거론하며 미국의 의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말엔 한국에 대한 의구심과 조롱이 함축돼 있다. 유방을 죽이려 한 항장을 한국에 비유한 것이다.
미국에 이끌려 사드 배치에 열을 올린 우리는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 우리 언론은 왕이가 언급한 이 고사를 두고 한반도를 중국의 앞마당 정도로 여기는 패권주의적 속내를 보여준 비외교적 언사라는 둥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과 중국은 외교적 합의에 도달한 듯하고, 우리는 최대 시장 중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혀 앞으로 무슨 보복을 어떻게 당할지 모를 처지가 된 듯하다.
우리는 중국 외교 수장이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 고사의 함의를 읽어내고 제대로 이해할 수준을 갖췄는가. 어쩌면 그 수준이 고스란히 이번 사태의 결과에 압축돼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2000여 년 전으로 되돌려 항우(項羽)와 유방의 운명을 뒤바꾼 역사적 사건인 ‘홍문(鴻門)의 술자리’, 즉 ‘홍문지연(鴻門之宴)’을 2회에 걸쳐 살펴봄으로써 앞으로도 중국 당국자들이 인용하게 될 갖가지 고사성어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항우의 破釜沈舟

홍문지연의 내막을 제대로 들춰보려면 그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죽음 이후 숨 가쁘게 전개된 초한쟁패(楚漢爭覇)의 중요한 단락으로 등장한다. 그 배경을 ‘사기’의 ‘항우본기’를 중심으로 훑어보자.
항우본기의 주요 사건은 강동에서 봉기한 항우의 숙부 항량(項梁)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항량은 기원전 209년 회계군 군수 은통을 죽이고 봉기한다. 항량이 정예 8000명을 기반으로 오현의 인재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자 진영, 경포, 포장군 등이 속속 합류해 순식간에 7만~8만의 대군으로 세(勢)가 커졌다.
기원전 208년, 최초의 농민 봉기군 수령으로 장초 정권을 수립한 진왕(진승)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항량은 봉기군 지도자들을 설성으로 소집하고, 민간에 있던 초 왕실의 후손 심을 찾아 회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무신군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유방도 이 무렵 봉기해 설성 회의에 참가했다.
설성 회의 이후 항량은 진의 군대를 잇달아 격파해 기세를 올린다. 항량은 유방과 항우에게 성양을 공격해 도륙게 하고, 진나라 승상이던 이사(李斯)의 아들 이유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해 교만해진 항량은 진의 장수 장한의 벽을 넘지 못하고 9월에 정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항량을 무너뜨린 장한은 북으로 조를 공격해 대파한다. 이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 항우를 차장, 범증(范增)을 말장으로 삼아 조를 구원하게 한다. 기회만 엿보던 송의에게 항우는 출전을 권했지만 송의는 항우를 비웃었다. 이에 항우는 송의의 목을 베고 자신이 군권을 쥔다. 그러고는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혀 돌아갈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죽을 각오를 다지게 하는 벼랑 끝 전술)의 각오로 진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이것이 거록(鉅鹿) 전투다. 제후들은 무릎으로 기어 항우에게 복종했고, 항우는 제후들의 상장군이 됐다.



죽고, 죽이고

거록에서 대패한 장한은 사마흔을 함양으로 보내 상황을 보고하려 했으나 사흘을 기다리고도 실권자 조고(趙高)를 만나지 못했다. 불안해진 사마흔은 서둘러 돌아왔다. 조고는 사마흔을 죽이려고 뒤를 쫓았으나 잡지 못했다. 계속된 패배와 진여의 설득으로 장한은 원수 남쪽 은허에서 항우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항복한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에 봉하고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삼았다.
이러는 사이 기원전 206년 유방이 먼저 함양성에 입성했고, 조고를 죽인 자영은 유방에게 투항했다.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은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 한다고 알렸다. 이에 항우는 40만 명을 몰아 홍문에 주둔했고, 10만 명의 유방 군대는 패상에 주둔했다. 범증은 함양성에서 유방이 보여준 위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항우에게 유방을 죽이라고 권했다.
과거 유방의 책사 장량(張良)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항백(項伯)이 이 사실을 유방에게 알렸고, 유방은 항우를 찾아가 사죄하기에 이른다. 항우는 마음이 누그러져 조무상의 이름을 발설했고, 보다 못한 범증은 항장에게 검무를 핑계로 유방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항백이 이를 막고 번쾌까지 연회장으로 뛰어들어 항우에게 항의한다. 이 틈에 유방은 자신의 군영으로 빠져나와 목숨을 건진다. 그러고는 조무상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홍문지연(줄여서 ‘홍문연’이라고 한다)이다.
홍문연에서 유방을 압박해 물러나게 한 항우는 유방에 이어 함양에 입성해 자영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보물과 재화, 여자도 탈취했다. 이로 인해 항우는 관중의 민심을 크게 잃었다.





유방의 대역전극

대권을 장악한 항우는 회왕을 의제로 높여 부르는 한편, 제후들을 분봉하는 논공행상을 시행했다. 그는 18명의 제후왕을 봉했으나 이것이 되레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됐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요직에 봉하는 등 무원칙할 뿐 아니라 정치적 배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항우는 의제를 장사 침현으로 보내면서 살해했다. 이로써 항우는 또 한 번 명분과 인심을 잃게 됐다. 유방은 한왕에 봉해졌지만 한중이라는 벽지를 봉지로 받음으로써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유방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중으로 통하는 길인 잔도를 불태우는 등 다시는 관중으로 나올 뜻이 없다는 뜻을 표시해 항우를 안심시켰다.
분봉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은 속속 항우에 등을 돌렸다. 과거 제나라 지역의 반발이 가장 거셌다. 여기에 제나라 지역 내부의 분란까지 겹쳐 영토가 3개의 제나라, 즉 ‘삼제(三齊)’로 분열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이 틈에 유방은 한중을 나와 관중을 평정하는 등 재기했으나 항우의 공격을 받아 형양까지 쫓겼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세에 몰린 유방은 형양을 지키면서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 진영을 분열시키는 반간계를 구사했다.
그러자 항우는 가장 신뢰하던 범증마저 의심해 그의 권한을 조금씩 빼앗기 시작했다. 화가 난 범증은 자리를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화병과 등창으로 죽었다. 범증은 천하대세는 이미 정해졌다고 예언했다.
기원전 204년 항우의 포위는 더욱 심해졌다. 한의 장수 기신은 유방으로 분장하고 갑옷을 입힌 여자 2000명을 앞세워 거짓으로 항복했다. 이 틈에 유방은 기병 수십 기와 형양 서쪽 문으로 탈출해 성고로 달아났다. 항우는 기신을 불에 태워 죽였다.
팽성 전투 이후 유방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 태공과 아내 여후는 항우에게 포로로 잡혔다. 기원전 203년, 한신의 군대를 빼앗은 유방은 강을 건너 다시 성고를 차지하고 광무에 주둔하면서 오창의 양식을 확보했다. 양군은 이렇게 대치 국면에 들어갔고, 먼저 지친 항우는 항복하지 않으면 유방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유방은 “다 삶으면 내게도 국 한 그릇 나눠달라”고 응수했다. 항백의 권유도 있고 해서 항우는 결국 태공을 죽이지 못했다.
이어 항우는 유방에게 두 사람 때문에 천하 백성이 고통당하니 둘이서만 자웅을 겨루자고 제안했으나, 유방은 지혜를 겨룰지언정 힘으로는 겨루지 않는다며 항우를 조롱했다. 화가 난 항우는 유방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혔으나 유방은 가벼운 부상을 가장하고 성고로 되돌아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항우는 유방이 보낸 후생의 유세를 받아들여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휴전에 들어가기로 약속한 뒤 태공과 여후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유방은 약속을 깨고 항우를 추격했다. 한신과 팽월에게 큰 보상을 약속해 그들의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들은 항우를 몰아붙여 해하에까지 이르렀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린 항우는 애첩 우희(虞姬)와 이별하는 노래를 부른 다음 애마 추와 800여 기병만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했다(그 유명한 ‘패왕별희(霸王別姬)’, 즉 ‘패왕(항우)과 우희의 이별’ 장면이다). 몇 차례 추격하는 한의 군사를 악전고투 끝에 물리쳤지만 28기만 남았다. 오강에 이른 항우는 하늘이 자신을 망하게 한다며 원망한 뒤 정장의 재기 권유도 뿌리친 채 목을 그어 자결한다. 이로써 5년에 걸친 초한쟁패는 절대 열세이던 유방의 역전승으로 끝나고 천하는 다시 통일됐다.
이제 항우와 유방의 운명을 바꾼 기원전 206년 홍문지연의 그날로 되돌아가보자.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면 1차적으로 ‘사기’의 ‘항우본기’를 읽어야 한다. 사마천은 이 사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히 묘사했다. 사건의 발단은 막강한 전력을 지닌 항우의 군대보다 유방이 먼저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하자 화가 난 항우가 유방을 공격하려고 벼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음은 ‘사기’의 관련 대목이다.

(항우가) 이어서 진의 땅을 공략해 평정시키려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수비병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패공(沛公, 유방)이 이미 함양을 깼다는 보고를 받자 항우는 크게 성이 나서 당양군 등을 보내 함곡관을 공격하게 했다. 항우가 마침내 함곡관에 들어가 희수 서쪽에 이르렀다.
패공은 패상에 주둔하고 있어서 항우와 서로 만나지 못했다.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어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차지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항우가 몹시 노하여 “내일 병사들을 잘 먹이고 패공의 군대를 격파하리라”라고 말했다. (…) 범증은 항우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패공이 산동에 있을 때는 재물을 탐내고 여자를 좋아했는데, 지금 입관해서는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여자도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뜻이 작은 것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 기세를 살피게 했더니 용과 호랑이처럼 오색이 찬란한 것이 천자의 기운이었습니다. 서둘러 쳐서 기회를 잃지 마십시오.”

함양에서 유방 일행이 보여준 일사불란한 행동과 민심 회유책에 두려움을 느낀 항우의 책사 범증은 두 군대의 전력차가 뚜렷한 지금 유방 진영을 철저히 와해시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다. 그런데 이런 기밀이 항우의 숙부 항백에 의해 누설되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과거 장량에게 신세를 진 항백이 장량을 찾아 기밀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당황한 유방은 항백을 붙들고 그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은 물론 혼인관계까지 맺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항백은 이를 받아들이며 내일 홍문으로 와서 항우를 만나 사죄하라고 했다. 그 사이 항백은 항우 진영으로 돌아와 항우에게 유방을 극구 변호했다. 유방이 함양을 함락시킨 것은 큰 공을 세운 것이지, 항우에게 대항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논리였다. 항우는 범증의 건의는 까맣게 잊은 듯 항백의 말에 넘어갔다. 다음 날 유방은 항백의 충고대로 항우를 만나러 왔다.



죽음의 劍舞

패공이 이튿날 아침 백여 기를 대동하고 항왕을 만나러 왔다. 홍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장군과 더불어 죽을힘을 다해 진을 공격했습니다. 장군께서는 하북에서 싸우시고,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먼저 관중에 들어와 진을 무찌르고 이곳에서 장군을 다시 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소인배의 말 때문에 장군과 신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항왕이 “이는 패공의 좌사마인 조무상의 말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항적이 왜 이렇게까지 했겠소이까”라고 말했다.
항왕은 이날 패공을 머무르게 해 함께 술을 마셨다.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해 앉고, 아보는 남쪽을 향해 앉았다. 아보는 범증이다. 패공은 북쪽을 향해 앉고, 장량은 서쪽을 향해 배석했다. 범증이 여러 차례 항왕에게 눈짓하며 차고 있던 옥결을 들어 보이길 세 차례, 항왕은 말없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범증이 일어나서 나가며 항장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군왕이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들어가면 앞으로 나가 축수를 올려라. 축수가 끝나면 검무를 청해 틈을 보다가 앉은 자리에서 패공을 쳐 죽여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장차 모두가 그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항장은 바로 들어가 축수를 올렸다. 그러고는 “군왕과 패공께서 술을 드시는데 군중에 즐길 거리가 없으니 검무라도 출까 합니다”라고 했다. 항왕이 “좋다”고 하자 항장은 검을 뽑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에 항백도 검을 뽑아 춤을 추는데, 몸으로 계속 패공을 감싸는 바람에 항장이 공격할 수 없었다.
이에 장량은 군문으로 가서 번쾌(樊噲)를 만났다. 장량은 “아주 급하오. 지금 항장이 검을 뽑아들고 춤을 추는데 아무래도 그 의도가 패공에게 있는 것 같소”라고 답했다. 번쾌가 “이거 급박하게 됐군. 신이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소”라고 했다.
번쾌가 곧장 검을 차고 방패를 들고는 군문으로 들어갔다. 위병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창으로 막자 번쾌는 방패 모서리로 쳐서 위병을 쓰러뜨렸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 장막을 걷고 서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항왕을 노려보는데, 머리카락은 하늘로 곤두서고 눈꼬리는 찢어질 것 같았다.
항왕이 검을 짚고 무릎을 세워 앉으면서 “그대는 뭣 하는 자인가”라고 물으니, 장량이 “패공의 참승 번쾌라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항왕이 “장사로다! 그에게 술을 내려라”라고 했다. 바로 큰 술잔에 술이 나왔고, 번쾌는 고맙다는 절과 함께 일어나 선 채로 다 마셨다. 항왕이 “장사, 더 마실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번쾌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도 피하지 않는 신이 술 한 잔을 어찌 사양하겠소이까! (…) 지금 패공께서 먼저 진을 깨고 함양에 들어가셔서 추호도 물건에 손을 대지 않고 궁실을 단단히 봉쇄한 다음 패상으로 철군해 대왕께서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일부러 장수를 보내 관문을 지키게 한 것은 도적들의 출입과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힘들게 높은 공을 세웠는데도 제후로 봉하는 상은 없을망정 소인배의 헛소리를 듣고 공을 세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이는 멸망한 진의 뒤를 잇는 짓이니 대왕께서 취할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하를 빼앗을 자, 패공”

항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앉으라”고 했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패공이 측간에 간다며 일어나 번쾌를 밖으로 불러냈다. 패공이 나간 뒤 항왕은 도위 진평에게 패공을 불러오게 했다. 패공이 “바로 나오느라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자 번쾌는 “큰 일에서는 자잘한 것은 따지지 않고, 큰 예의에서는 작은 나무람 정도는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저쪽은 칼과 도마이고 우리는 물고기 신세인데 무슨 작별 인사랍니까”라고 했다.
이에 그곳을 떠나면서 장량에게 남아서 사죄하게 했다. 장량이 “대왕께서 선물은 갖고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패공은 “항왕에게 주려고 백벽 한 쌍과 아보에게 주려고 옥두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그 성난 모습을 보고는 감히 올리지 못했지. 공이 나 대신 바치시오”라고 했다. 장량은 “삼가 받들지요”라고 했다.
이때 항왕의 군대는 홍문 아래에, 패공의 군대는 패상에 있어 서로 40리 떨어져 있었다. 패공은 수레와 말을 버려둔 채 몸만 빠져나와 혼자 말을 탔고, 번쾌·하후영·근강·기신 등 4명은 검과 방패를 지니고 걸어 여산을 내려와 지양의 샛길을 거쳐 왔다.
그에 앞서 패공은 장량에게 “이 길로 우리 군영까지는 20리에 지나지 않소. 내가 군중에 도착했다고 생각되면 공이 바로 들어가시오”라고 일러뒀다. 패공이 떠나고 샛길로 군중에 도착할 때가 되자 장량은 안으로 들어가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패공께서 술을 이기지 못하여 작별인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삼가 신 장량에게 백벽 한 쌍을 받들어 대왕 족하께 재배의 예를 올리며 바치게 하셨고, 옥두 한 쌍은 대장군 족하께 재배의 예를 올리며 바치게 하셨나이다.

항왕은 “패공은 어디에 계신가”라고 물었고, 장량은 “대왕께서 잘못을 나무라실 것 같다는 말을 듣고는 혼자 빠져 나가셨는데 군중에 이미 도착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항왕은 바로 백벽을 받아 자리 위에 뒀지만, 아보는 옥두를 받아 바닥에 놓고는 검을 뽑아 그것을 깨부수며 “에잇, 어린애와 함께 일을 꾀하는 것이 아닌데….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패공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패공은 군영에 당도하자마자 즉시 조무상을 베어 죽였다. 〈다음 호에 하편이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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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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