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명사 에세이

인생을 바꾼 말 한마디

  • 이동혁 | 풀꽃나무 칼럼니스트

    입력2016-03-29 10: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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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나를 말하려면 대학 4학년 1학기 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87학번이니 1968년생이어야 맞지만, 실제로는 1969년생이고 호적에는 그보다 1년 늦은 1970년생으로 올라 있다.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1년 늦은 호적과 호적보다 2년 빠른 입학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적’ 요소였다. 그나마 고등학교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주민등록번호가 공개되고 재수생이 즐비한 대학에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1학기 만에 그만두게 됐다. 대신 1년 반 공부해서 다른 대학의 체육계 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낙방! 예체능계 입시 비리가 공공연하던 시절인지라 나는 피해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후 몇 가지 일이 더 터지자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나의 염세주의는 극에 달했다. 정신병원에서 인격장애 진단을 받아 입원 치료까지 받았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없어지는 것만이 복수라고 생각했고,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이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친구와 아버지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야 했다.

    동화책과 추리소설이나 읽던 내게 그 무렵 문학이 다가왔다. 우연히 가판대에서 산 시집에서 윤동주 시인의 자기 고백적 시에 감동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창고를 뒤지다 발견한 형의 대학교 국어책에서 이상(李箱)의 소설 ‘날개’를 읽고는 우울한 자화상을 그려가던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 후 불우했던 젊은 날의 아픔을 문학에서 위로받으며 그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서른 살 늦깎이 대학생

    그런 것이 밑바탕 돼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PC통신이 생겨났다. 그중 유니텔의 30대 방 모임에서 우연히 누나의 친구를 만났다. 글 쓰는 재주가 아까우니 지금이라도 대학에 가라는 그 누나의 권유에 못 이겨 다시 공부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새로 수능을 보기 위해 공부한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인 셈치고 예전에 다니던 대학에 알아봤다. 미등록 제적 처리가 돼 있기에 등록금만 내면 그 학번 그대로 달고 재입학할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그래서 나는 서른 살 나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고, 문학도가 되고 싶은 생각에 국어국문학을 복수 전공하게 됐다.

    그러다 4학년 1학기 때 안도현 시인을 만났다. 우리 대학에서 뒤늦게 박사과정을 밟던 안도현 시인에게서 ‘시 쓰기와 시 읽기’라는 교양강좌를 듣게 된 것이다. 안 시인은 시를 잘 쓰려면 식물의 이름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도 물푸레나무가 물가에 사는 나무인 줄 알고 물가와 관련된 내용으로 시를 썼다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창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갈대와 억새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했다. 내가 손을 들었다. 다음엔 철쭉과 진달래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것도 할 줄 아는 것 같아 손들었다. 그다음으로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했다. 그때는 들지 못했다. 안도현 시인의 ‘무식한 놈’이라는 시를 보면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할 줄 모르는 너하고는 지금부터 절교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 시에서 ‘너’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시인이면서 그때까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할 줄 모르고 시를 써온 자기 자신과 절교하겠다는 뜻의 시다. 나도 나중에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한번 구별해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서른네 살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취직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써온 수필 같은 글을 보내 출판사 몇 군데의 문을 두드려봤다. 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마도 내가 지명도가 없기 때문일 거라는 아둔한 생각을 했다. 지명도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신춘문예 같은 것에 당선돼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기 위해 많은 책과 시집을 읽었지만, 창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도현 시인의 한마디

    그러다 안도현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시를 잘 쓰려면 식물의 이름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 그래서 내가 사는 오산시에 있는 세마대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다 모르는 식물뿐이었지만 그 이름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참 특별했다.

    그렇다고 문학 공부를 게을리한 건 아니다. 대학에서 평론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됐기에  당시 한국문학계의 고질적인 병폐와 권력투쟁에 대한 비판을 실명으로 쏟아낸 서적도 탐독했다. 하지만 진흙탕 싸움이라는 판단이 들자 문학계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고, 결국 문학에 아예 흥미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식물은 달랐다. 하나의 특징만 알면 그 식물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고, 또 약간의 차이점 때문에 식물의 이름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 바람에 문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식물에 빠져들었다. 책꽂이에는 어느새 문학 책 대신 식물 관련 책이 늘어갔다.

    어디까지나 취미로 시작한 일이기에 그동안에도 다른 일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찜질방 가운 대여 사업은 100여 일 만에 찜질방의 부도로 돈만 날리게 됐다. 산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왼손에 골절상을 당해 두 달 동안 깁스한 적도 있다. 깁스를 풀자마자 보습학원에 국어강사로 취직했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내가 계속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식물 책 한 권 내고 싶다는 마음에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어쩌면 이 길을 걷게 하려고 다른 일은 하는 족족 잘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전업작가의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시로 조여오는 시간적·경제적 압박, 제때 밥 못 먹고 제때 잠자지 못하며 높은 산을 올라야 하는 육체적 고통, 그리고 대인관계를 잘하지 못해 수시로 찾아오는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다. 비전공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 전공자보다 더 열심히 했다. 다행히 약간의 행운이 따라줬고, 귀인이라 생각되는 분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다시 대학 4학년 1학기 때의 강의실로 돌아가보면 나는 서른세 살의 대학생이다. 취업을 보장받지 못한 졸업 예정자고 막연히 문학을 생각하는 주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안도현 시인이 내게 어느 길로 가라고 지시한 건 아니었다. 단지 시를 잘 쓰려면 식물의 이름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것도 나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여러 학생을 대상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내 자작시를 칭찬해주던 안도현 시인은 내가 지금 풀꽃나무 칼럼니스트가 되어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그때 알 수 없었던 미래에 지금 이렇게 와 있는 게 신기하다. 정말 알 수 없는 건 사람의 미래가 아니라 누군가의 말 한마디다.

    이 동 혁


    ● 1970년 경기 오산 출생
    ● 단국대 물리학과 졸업(국어국문학 복수전공)
    ● 조선비즈 ‘이동혁의 풀꽃나무 이야기’,
       월간 가든인 ‘정원화로 좋은 우리 야생화’ 연재 중
    ● 저서 : ‘한국의 야생화 바로 알기’ ‘한국의 나무 바로 알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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