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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전두환·노태우가 손영길 책임 물어야 한다길래…” (박종규 前 청와대 경호실장)

현대판 궁궐 암투, 통일정사 사건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전두환·노태우가 손영길 책임 물어야 한다길래…” (박종규 前 청와대 경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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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락 위해 청와대 기도처 건축” 모함
  • ● 진실 알았던 地官 손석우, 6개월 강제 구금
  • ● “전두환이 모른 체하라 했다”…증인들 함구
  • ● 박종규, 10년 뒤 손영길에 사과
필자는 ‘신동아’ 3월호를 통해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은 사실이 아니고, 이 사건 가해자는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과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이라고 밝혔다. 또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공명정대하게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여기에 전두환 장군과 노태우 대령이 동조한 것도 상세히 소개했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손영길 장군 등 30여 명의 우수한 장교들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및 중정 직원 30여 명이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최대 피해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윤필용 제거에는 ‘이후락 차기 대통령’ 발언이라는 모략이 작용했지만, 손영길 장군이 제거된 것은 청와대의 ‘통일정사’ 사건이 계기가 됐다.



바꿔 찬 금시계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의 음모와 암투는 ‘현대판 궁궐 암투’나 다름없었는데, 그 원인을 제공하고 제거된 인물이 윤필용 장군이다. 윤 장군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을 거친 후 방첩대장(1965년), 주월 맹호사단장(1969년), 수도경비사령관(1971년)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으로 근무했다.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탓에 ‘필동 육군본부 참모총장’이라는 시기를 받았는데, 1972년 유신 이후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군복을 벗어야 했다.

그러나 손영길은 윤필용과 달리 쿠데타 음모 오해를 받을 만한 언행을 한 적이 없다. 윤필용 사건 핵심 가해자인 박종규와도 각별하게 가까운 사이였고, 결정적인 범법행위도 없었다. 그래서 1973년 3월 8일 윤필용을 구속할 때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으로 전속돼 윤필용 사건에서 비켜난 듯했다. 그런데 1주일 후 추가로 구속된다. 누가 어떤 음모를 꾸며서 그렇게 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필자는 윤필용 사건 10년 후인 1983년 박종규가 손영길에게 한 사과의 내용과 1973년 3월 청와대 경내에 세워진 ‘통일정사’에 얽힌 사실을 토대로 그 내막을 밝히고자 한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비서실장 윤필용 대령(1927년생), 박종규 경호대장(1930년생), 전속부관 손영길 대위(1932년생), 이후락 공보실장(1924년생). 이들 4명은 서로 호형호제하며 지내오던 13년간의 인간관계를 1973년 3월 8일 하루아침에 끝냈다. 권력 2인자이던 박종규가 박 대통령에게 윤필용, 이후락, 손영길 등이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모함해 윤필용, 손영길을 구속시킨 것이다.

이들 중 박종규와 손영길은 특히 각별한 사이였다. 1963년 민정 이양 당시 손영길은 최고회의 의장 전속부관을 사임하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육사 동기인 전두환 소령으로부터 “박 대통령이 박종규가 취중에 자신에 대해 불경한 언동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해 경호실장 자격을 정지시켰고, 박종규는 3일째 출근을 못하고 자택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영길은 박종규가 취중에라도 그런 방자한 언행을 할 사람이 아닌 만큼 모함을 받은 것으로 확신하고 박종규를 구하려 청와대로 향했다.



김유신 삼국통일, 박정희 남북통일

그는 이낙선 민정수석과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모함이다. 박종규가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각하에게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낙선, 이후락이 난색을 보이자 손영길은 직접 박 대통령을 찾아가 20여 분간 대화하며 오해를 풀었다. 손영길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그렇다면 박종규에게 가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전하라”고 했다. 손영길은 박종규의 집으로 찾아가 지시를 전달했다. 이때 박종규는 “죽었다 살아났다”면서 자신이 손목에 차고 있던 금 도금 시계를 풀러 손영길이 차고 있던 시계와 바꿔 찼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상자기사 참조).

1973년 3월 8일 윤필용이 구속되던 날,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 전출 명령을 받고 출발하기 전 박종규를 만난다. 이때 박종규는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잠깐 기다리면 내가 곧 돌아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건 후 10년의 세월이 흘러 둘 다 야인이 돼 만난 1983년. 손영길이 미국에서 돌아온 해였다. 그때 박종규는 손영길에게 사과하면서 용서를 빌고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했다고 한다.

“사건이 불거진 건 10월 유신 직후였다. 처음에는 윤필용만 구속해 혼내주고 군부에 경종을 울릴 계획이었는데, 1주일 후 전두환과 노태우가 나를 찾아와 ‘윤필용이 이후락과 가까워지고, 윤필용이 각하에게 불경 언동을 하게 된 것은 두 사람을 절친하게 만든 손영길에게 책임이 있다. 따라서 윤필용보다 더 나쁜 사람이 손영길이니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너를 구속하게 됐다.”

당시 박종규도 손영길이 이후락과 윤필용을 가깝게 만들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손영길은 1972년 12월 이후락이 자신을 중앙정보부 2국장(국내 담당)으로 전입 요청한 일로 인해 박종규, 전두환, 노태우 등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10월 유신 공로훈장 해프닝으로 전두환과도 불편한 관계였다(신동아 3월호 243~244쪽 참조).

통일정사는 1972년 10월 유신 과정에 신범식, 박종규, 지관(地官) 손석우 등이 박 대통령을 위해 청와대 경내에 세운 작은 기도처(精舍)다. 그런데 1973년 3월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이 터지자 박 대통령에게 “손영길이 자신과 동향인 이후락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세웠고, 스님을 불러 은밀히 불공을 드리는 곳”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박 대통령은 총애하던 손영길이 자신을 배반한 것에 대해 격노해 그를 구속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통일정사도 즉시 철거됐다.

통일정사를 지은 신범식은 이후락의 후임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근무했고, 1963년부터 민주공화당에 참여한 후 청와대 공보실장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을 역임해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신범식은 1972년 6월 “지관 손석우를 데리고 남한 전체를 돌아봤는데, 최고의 명당 자리가 청와대 경내에 있다. 이곳에 통일정사를 짓고 기도를 올리면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듯 박 대통령 임기 내에 통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통일정사 건축허가를 받으려고 1972년 6월 서울시장을 찾아갔으나 서울시는 그곳에 지으려면 수도경비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1972년 10월 수경사령관에게 건축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수경사는 그곳이 청와대 경내라 경호실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

2주 뒤 손석우는 수경사령부에 “신범식 사장이 경호실장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달라”며 수차례 전화로 확인 요청을 했다. 참모장 손영길이 윤필용 사령관에게 이를 보고했다. 윤필용으로부터 “경호실장을 만나 확인해보고 알려달라”는 지시를 받은 손영길은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는 30대대장 이종구 중령과 함께 청와대 경호실을 방문해 박종규로부터 “통일정사 건축을 허가했으니 인부 출입을 허가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묘안’ 짜낸 강창성

신범식과 손석우는 1973년 1월 15일경 통일정사를 완공했다. 신범식은 “VIP(대통령)를 모시고 건축 기념행사를 한다”며 윤필용을 초청했는데, 윤필용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참모장 손영길에게 대신 행사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손영길이 행사장에 가자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고, 조그만 정사를 지어놓고 스님 몇 사람이 불공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곳은 두 달 후인 3월 15일 박 대통령이 손영길 구속 지시를 내리는 음모의 발신지로 둔갑했다. 그가 15사단 부사단장으로 1주일쯤 근무할 무렵이었다. 지시를 받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손영길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해 조사했다. 보안사령부 참모장 김귀수 장군이 손영길에게 “자진해서 전역지원서를 쓰면 처벌하지 않고 조용히 전역시켜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손영길은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며 거부했다. 이후 손영길은 윤필용과 함께 쿠데타 음모가 아닌 일반 범죄 관련 조사를 받은 후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그러나 서빙고 분실에서는 통일정사 음모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조사하면 손영길이 반발할 것이고, 손석우 지관을 조사하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 허위로 밝혀질 우려가 있었기에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박종규, 신범식, 강창성 간에 합의가 있었던 듯하다.

강창성은 진실을 알고 있는 지관 손석우, 수경사 정보참모 윤태균 대령, 30대대장 이종구에 대한 보안 유지책을 강구했다. 만약 손석우가 언론에 “통일정사는 손영길이 건축한 게 아니라 나와 신범식이 박종규의 허가를 받고 지은 건물”이라고 밝힐 경우 모함을 한 것이 탄로날 판이었다. 또한 손영길을 지지하는 수경사 헌병들이 손석우를 체포해 조사하기라도 하면 문제는 더 커질 일이었다.

이때 강창성이 묘안을 떠올렸다. 그는 3군단 보안부대장 우국일 대령에게 손석우를 부대 안에 연금시키고, 외부 인사와 일절 접촉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손석우의 집에는 월 50만 원의 생활비를 지급했다. 손석우는 1973년 3월부터 강창성 장군이 보안사령관을 그만둔 8월까지 6개월간 보안부대에 감금돼 있다가 풀려났다. 이 같은 사연은 특전사령관 차규헌 장군에 의해 윤필용, 손영길에게 알려졌다.

윤태균과 이종구에게는 통일정사 사건과 고철 판매대금 횡령사건에 관해 손영길에게 유리한 발언이나 증언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 역할은 전두환이 맡았다. 실제로 이들은 고철값 횡령사건과 관련한 검찰 증인으로 나와 손영길에게 불리하도록 거짓 증언을 했다.  



보안부대장의 고백

손영길은 자신이 통일정사 사건으로 박 대통령의 분노를 사 억울하게 처벌 받게 됐다는 것을 1심 재판 때인 6월에야 알게 됐다. 1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육사 동기 권익현 대령이 손영길에게 “알아보니 각하께서 통일정사 사건으로 분노해 사건 해결이 어려운데, 이 사건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쓴 편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손영길은 권익현에게 “통일정사는 박종규가 허가하고 신범식과 손석우가 지은 건물이라 나와 무관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권익현에게 편지를 보낸 지 두 달이 지나 2심 재판이 끝난 8월 중순, 특전사령관 차규헌이 육군교도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이감하는 윤필용, 손영길을 면회하면서 “강창성이 가해자들과 공모해 사건 조사를 편파적으로 한 결과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됐다”며 통일정사와 관련된 비화를 들려줬다. 강창성 밑에서 3군단 보안부대장으로 근무하던 우국일이 차규헌을 찾아와 감금 중인 지관 손석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손영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영길은 박 대통령이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건이 음모라는 것을 몰랐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사건이 모함이었음을 지금껏 밝히지 못한 점, 그리고 박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배신감을 품고 세상을 떠난 점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통일정사가 처음부터 ‘음모용’으로 건축된 것은 아니다. 공사 시점이 신범식이 모함을 한 시기와 겹치지만, 건축을 시작한 시점은 1972년 10월 유신 4개월 전이기 때문이다. 후일 손석우는 절에서 만난 지인에게 손영길에게 피해를 준 것은 미안하지만 자신은 통일정사가 그렇게 둔갑할지 몰랐다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이 함구 지시”

손영길이 30대대장 이종구와 청와대 경호실을 방문해 통일정사 건축허가를 받을 때 박종규는 손영길에게 “청와대 경내 헬기장에 고철이 쌓여 있어 지저분하니 청소를 하고 깨끗하게 정리해달라”고 지시했다. 헬기장 근처에 널린 고철을 팔아서 용돈으로 쓰라는 얘기였다. 손영길은 동행한 이종구에게 고철을 30대대 영내로 옮겨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손영길은 결국 이 때문에 공금횡령으로 처벌을 받았다.   

경호실장을 만나고 돌아온 손영길은 윤필용에게 통일정사 건축허가가 났으며 고철 처리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했고, 군수참모 노정기 대령에게 고철을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노정기는 30대대 연병장으로 옮겨놨던 고철을 팔아 받은 340만 원을 참모장에게 가져왔다. 이 가운데 40만 원을 노정기에게 주면서 수고한 장병 회식비로 쓰라고 줬고, 남은 돈은 사령관 윤필용이 부대 운영에 보태 쓰라고 준 돈과 함께 보관했다.

그런데 이 돈에서 사령관 숙소 수리비로 100만 원을 지급한 것이 문제가 됐다. 정상적인 부대 운영비 지급 과정을 지키지 않고 임의로 자금을 쓴 것은 공금횡령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손영길은 박종규가 용돈으로 쓰라며 준 고철 판매대금이라 부대 공금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박종규를 증인으로 조사해달라고 검찰에 요청했다. 하지만 박종규는 증인으로 출두하지 않았고 박종규를 대신해 정보참모 윤태균 대령과 30대대장 이종구가 법정 증인으로 나왔다.

두 증인은 통일정사 건축과 고철판매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사실 그대로 증언하면 혐의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검찰관이 “청와대 헬기장 고철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느냐”고 묻자 둘은 “아는 바 없다”고 진술을 했다. 이 때문에 손영길은 공금을 횡령한 것으로 확정돼 실형을 살게 된다. 손영길은 검찰 증언을 하고 나오는 윤태균, 이종구에게 “어떻게 고철 사건을 모른다고 진술할 수 있냐”고 따지자 ”검찰에 나오기 전 전두환을 만났는데, 그가 이 일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다고 진술하라고 지시해 진술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답했다.



최대 피해자는 朴 대통령

이 사건을 조사한 강창성은 육사 8기생 중 선두주자였다. 두뇌가 명석한 인물로 알려졌고, 1972년 10월 유신 후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 조사를 공명정대하게 하지 못해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인 윤필용을 제거하기 위해 장성들을 간첩 조사하듯 가혹하게 수사했고, 자신과 가깝지 않은 우수 장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는 의혹을 샀다.

이 과정을 지켜본 필자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군과 국가 발전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판단하고 강창성의 문제점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필자의 나이가 27세였고, 군 생활 5년째인 일개 대위였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판단이었다.

필자는 진종채 수경사령관에게 “이 사건은 모함에 의한 것이고, 수사 지시를 받은 강창성이 수사를 잘못하고 있으니 대통령에게 강창성의 문제점을 보고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필자의 요청을 받아들인 진 장군은 필자의 보고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강창성 장군을 보안사령관에서 보직 해임했음을 밝혀둔다. 이로써 윤필용 사건도 종결됐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 손영길, 강창성, 이후락 등 박 대통령의 최측근은 사라졌고, 그 여파로 경호업무가 허술해진 탓에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를 잃었다. 육 여사의 서거로 박종규도 경호실장을 사임했고, 후임 경호실장 차지철은 2인자로 힘을 행세하는 과정에서 1976년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와 사사건건 불화가 잦았다.

1979년 3월 박 대통령은 제20사단 대대장 월북 사건으로 진종채 장군이 보안사령관에서 물러나자 1사단장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다. 그 후 정국은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제명 사건에 이어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 김재규와 차지철 간 불화가 격화한 끝에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통일정사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박 대통령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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