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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열정과 도전정신이 살아 있음의 징표”

‘멈추지 않는 바람개비’ 이길여 가천대 총장

  • 송홍근 | carrot@donga.com

“열정과 도전정신이 살아 있음의 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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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는, 이길여 가천대 총장에게 삶의 표상이다. 어릴 적 수수깡에 종이를 붙여 만든 바람개비를 돌리며 놀 때마다 대장 노릇을 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려면 산으로, 들로 쉼 없이 달려야 한다.

그는 역경과 고난이 닥치면 좌절하지 않고 맞섰다. 언제나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렸다. 우물쭈물한 적 없다.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러서거나 회의하지 않았다. “내 사전에 ‘실패’와 ‘안 된다’는 말은 없다”며 “새우잠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꾸자”고 다짐했다.



“쓰러질 때까지 도전할 것”

이길여 가천대 총장은 의사면서 교육자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크게 자수성가한 여성 CEO’로 꼽힌다.

195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인천에 세운 24평 산부인과가 가천대와 가천대길병원 등의 모태다. 손으로 받은 신생아만 수십만 명. 또한 100만 명 넘는 이가 그의 병원에서 병을 이겨냈다.



청진기를 따뜻이 데워 환자 가슴에 대던 ‘의사 이길여’는 4개 대학을 하나로 묶은 가천대를 10대 사학(私學)으로 키워내겠다면서 오늘도 바람을 일으킨다. 교육·의료·문화재단을 이끌면서 멈추지 않고 달린다.

그는 봉사하는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간호사와 미용사를 통통배에 태우고 서해 낙도를 돌며 의료·미용 봉사를 시작한 게 1959년. 봉사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던 때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강연에서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중국 ‘삼자경(三字經)’에 보면 효심이 지극한 어린 황향(黃香)이 아버지 이부자리를 자기 몸으로 데운다는 고사가 나옵니다.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으로 있을 때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그럼 한국에는? 추운 날 환자 몸에 청진기가 닿을 때 선뜩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도록 가슴에 청진기를 품고 지낸 의사가 있습니다.”

평생 병원 한 번 못 가본 가난한 이들에게 인술(仁術)을 펼치자는 다짐이 그가 지금껏 참의술, 참사랑의 바람개비를 돌려온 힘일 것이다. 그는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과 도전정신이 살아 있음의 징표”라면서 “만일 그 온도가 식어간다면 생의 파란 불이 꺼지는 것”이라고 했다.

“여자는 초등학교만 보내줘도 감지덕지해야 할 때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당시는 6년제로 중·고교 과정이 합쳐져 있었다) 진학 때 어머니가 사생결단으로 어른들을 설득해 이리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집에서 이리(현재의 익산)까지 가는 기차가 하루에 딱 두 차례 있었는데, 연착이 다반사였습니다. 오후 5시 반에 학교를 파하고 밤 12시에 집에 돌아온 적도 있으니까요. 기차가 연착할 때마다 소나무 위에서 공부했어요. 꿈이 있었으니까요. 꿈꾸는 것이 중요해요. 쓰러질 때까지 계속 도전할 겁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목표한 일을 하나하나 이뤄나갈 거예요.”  



20년간 무료 심장병 수술

고등학교 다닐 적 친구들이 “어느 대학에 들어가 어떤 공부를 할 거냐”고 물으면 “서울대 의대 가서 의사가 될 거야”라고 답했다 한다. 비웃는 사람들에게는 속으로 ‘두고봐라, 가나 못 가나’라면서 각오를 다졌다.

그는 전북 옥구(1995년 군산에 통합) 출신이다. 1958년 개원한 병원 이름은 ‘이길여산부인과’. 병원다운 병원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이름 석자를 내걸었다. ‘박내과’ ‘김산부인과’ 같은 병원명이 일반적일 때다. 1964~1968년 미국에서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1975~1977년에는 일본 니혼대에서 공부했다.

1978년 의료법인 길의료재단을 설립한 후 ‘이길여산부인과’는 굴지의 종합병원(가천대길병원, 동인천길병원 등)으로 성장했다. 1998년 후진 양성을 위해 가천의과대학을 세우고 같은 해 경원대를 인수했다. 2012년 가천의대, 가천길대학, 경원대, 경원전문대를 가천대로 통합했다.

그는 ‘이웃과 세상을 품는 여의사’로 불린다. 1959년 시작한 자궁암 무료검진을 통해 12만 명 넘는 여성의 건강을 지켜줬다. 시민 참여 의료부조운동단체를 세워 4000명 넘는 환자에게 수술비를 지원했다. 무료 심장병 수술로 1996년부터 세계 각국 380여 명의 어린이가 새 생명을 찾았다. 그는 이 같은 공로로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2년에는 인촌상(공공봉사부문)을 받았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부부가 방한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우리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두 명을 미국에서 수술 받도록 동행시켰습니다. 의사로서 한국에서 심장병 수술을 못하는 것이 굉장히 가슴이 아팠어요. 대학생들이 미국을 미워할 때인데, 아이들을 데려가면서 좋은 이미지를 줬죠. 우리 병원에서 외국 어린이를 수술해주면 한국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과 봉사라는 낱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러하다. ‘사랑이란 타인을 위해 나를 불사르는 일이다. 부모님의 사랑, 성현(聖賢)의 사랑이 낳는 불꽃은, 더없이 뜨겁고 순결하게 무조건으로 타오르기에 영원히 빛나는 것이다’ ‘봉사란 손을 비워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봉사하는 기쁨을 모른다면 인생의 절반도 모르는 것이다.’


“내려놓아야 채워진다”

“박애, 봉사, 애국이라는 우리 재단의 정신이 공감의 폭을 넓혀가는 것 같아요. 봉사의 정신, 공존의 정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겁니다. 우리가 가진 의료 및 교육 인프라를 바탕으로 국경을 넘는 봉사를 더 적극적으로 실천해나갈 겁니다. 청년 세대에서 이 같은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이길여산부인과는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푯말을 내걸었다.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이전 병원들은 환자가 병원비를 못 낼 것을 걱정해 치료에 앞서 보증금을 받았다.

“살림이 힘들던 시절이에요. 한번은 자궁 밖 임신이 된 여성이 수술비가 없다면서 돌아가겠다더군요. ‘사람부터 살아야지, 수술비는 나중에 갚으라’고 설득했지요. 그 후 병원 현판 옆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크게 써 붙여놓았습니다. 환자들이 치료비 대신 낸 생선, 나물 같은 게 병원에 수북이 쌓였던 기억이 납니다.”    

자궁암 무료 검진은 ‘최소한 인천에서는 자궁암으로 죽는 여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자궁암은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면 생존율이 90%에 이를 만큼 치료 효과가 좋으나 암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사망하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1982년, 1988년에는 경기 양평군과 강원 철원군에 양평길병원과 철원길병원을 개원했다. 당시에는 오지나 다름없던 곳이어서 두 병원 모두 경영 수지를 맞추기 어려웠지만 주민들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1995년에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 백령도 적십자병원을 떠맡아 2001년까지 백령길병원을 운영했다.



“여자 혼자 살려면…”

그가 이렇듯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온 데는 어릴 적 어머니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쳤다. 전북 옥구의 고향집에는 거지가 찾아오기 일쑤였는데 어머니는 정성껏 밥과 국, 반찬을 내 집에 찾아온 손님들처럼 접대했다. 그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게 ‘소녀 이길여’의 몫이었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란다고 해요. 어머니가 나눔을 실천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아 자선 활동을 주도하셨거든요. 6·25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느라 봉사라는 개념이 거의 없을 때 낙도를 돌며 의료봉사에 나선 것도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그는 1978년 의료법인을 설립해 재산을 사회화했다.

“산부인과이다 보니 환자를 먼 곳의 다른 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잦았는데 그게 안타까웠습니다. 의료법인이 종합병원의 설립 주체가 돼야 한다는 조항이 의료법에 새로 들어가 의료법인이 아니면 종합병원을 세울 수 없게 됐습니다. 의료법인 설립은 개인 재산을 사회에 헌납한다는 의미라 ‘여자가 혼자 살려면 재산이라도 있어야 한다’며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병원은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생각에 1978년 150병상 규모의 ‘의료법인 인천 길병원’을 개원했습니다. 병원을 크게 지었다 적자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한 분도 있었는데 개원 3년 만에 시설을 두 배로 확장했지요.”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병원에서는 낳은 정, 대학에서는 키운 정을 느낀다”고 했다.  

‘환자바라기’로 하루 4시간 넘게 잔 적이 없는 ‘의사 이길여’는 ‘학생밖에 모르는 총장’이다. 학생들이 선물한 초상(학생 얼굴 사진들을 모자이크해 그의 얼굴을 표현했다) 액자를 가리키면서 “학생 하나하나가 모두 친자식 같다”면서 환하게 웃는다.

“가천대를 2020년까지 국내 10대 사학으로 우뚝 세울 겁니다. 4개 대학 통합은 성장의 열매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밑거름일 뿐이죠. 가천대를 세계와 당당히 경쟁하는 반듯한 ‘명품 대학’으로 키워낼 겁니다. 가천대의 발전이 가져오는 혜택이 재학생, 동문을 넘어 사회와 국가로 돌아가게끔 할 거예요. 그것이 제 역할이에요. 누구에게나 소명이 있고 그것을 완수할 책임이 있는데 나의 소명과 책임이 인재 육성입니다.”     

그는 병원과 대학의 수준은 연구·개발(R&D) 역량에서 결정된다고 믿는 터라 2004년 1000억 원을 투자해 가천뇌과학연구원을 여는 등 가천대 산하 3대 연구소(가천뇌과학연구원, 이길여암·당뇨연구원, 가천바이오나노연구원)를 통해 세계 수준의 임상 연구 인프라를 갖췄다.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샘

“가천뇌과학연구원, 이길여암·당뇨연구원, 가천바이오나노연구원 외에도 마우스대사질환특화센터를 설립하는 등 연구 역량을 강화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가천뇌과학연구원이 2014년 미국과학재단 영상분야 ‘세계 10대 연구소’로 선정되는 등 성과가 잇따르고 있어요. 기초 의과학 분야의 발전을 통해 인류에 공헌하고, 세계에 코리아를 빛낼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진력하려고 합니다. 정부가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으로 선정한 이길여암·당뇨연구원과 뇌과학연구원, 가천바이오나노연구원을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거예요.”

‘가천(嘉泉)’은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샘’이란 뜻이다.

“가천은 ‘가회합례 수세인천(嘉會合禮 壽世仁泉,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으로 바른 삶을 이루게 하고 마르지 않는 생명으로 온 누리를 건강하게 한다)’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교육과 의술의 가치가 복합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을 지낸 도원 류승국 선생께서 지어주신 저의 아호이기도 하고요.”

그는 골프에서 그 어렵다는 에이지 슈트(자기 나이와 같거나 나이보다 적은 스코어로 라운드를 마치는 것)를 달성했을 만큼 건강하다.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충분히 해요. 하루 1시간 넘게 산책하고요. 날씨가 좋지 않을 땐 반드시 집에서 러닝머신이나 스태퍼로 산책을 대신합니다. 별다른 비결은 없지만, 항상 꿈꾸는 인생을 살아온 게 건강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아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늘 노력하고요. 일이 잘 안 되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털고 일어납니다. 아파하고 괴로워할 여유가 없어요.”





신동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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