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를 든 괴한들, 히잡 사이로 보이는 핏기 가신 얼굴들, 그리고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어두운 방. 아프가니스탄을 생각할 때 여전히 2007년 발생한 한인 선교사 피랍 사건이 떠오른다면 ‘아프가니스탄의 황금문화’ 전시회에 가볼 것을 권한다.
우리에게 이슬람 원리주의 ‘탈레반’으로 각인된 아프간은 알고 보면 찬란한 고대 문명을 간직한 나라다. 아프간은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 위치해 유럽, 중국, 인도를 잇는 문명의 교차로이자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동방 원정에 나선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는 곳곳에 30개의 식민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우는데, 그중 4개가 아프간에 있었다. 신라 금관을 꼭 닮은 아프간의 금관은 제작 연도가 신라보다 3, 4세기 앞선다.
국립 아프가니스탄 박물관 소장품 23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기원전 2000년경 청동기 유적부터 기원후 1~3세기 도시 유적이 나왔다. 전시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는 황금 유물들. 1978년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아프간 북부 틸리야 테페(Tillya Tepe)에서 6기의 무덤이 발굴되는데, 거기서 나온 금제 부장품들이다. 기원후 1세기 즈음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박트리아 왕조의 것으로 추정한다. 금관과 귀고리, 목걸이뿐만 아니라 손톱보다 작은 꾸미개와 신발 깔창까지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다. 9개의 메달리온이 달린 금사슬로 엮은 허리띠 앞에 서면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이 유물들이 발견됐을 때 소련 언론은 “투탕카멘 왕묘의 발견에 필적하는 20세기 고고학상 최고의 대발견”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 이 황금 유물들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 탈레반 정권의 훼손, 그리고 미국의 공습으로 파괴됐거나 시장에 팔려나갔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유물들은 2004년 거짓말처럼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아직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7인의 열쇠지기가 1989년 지하 창고에 유물들을 숨긴 뒤 열쇠를 하나씩 나눠 가지고 흩어져 30년 가까이 비밀을 지키다가 2004년 다시 모여 창고 문을 연 것이다(7개 열쇠가 모두 있어야 창고 문이 열린다고 한다). 이들은 탈레반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숨은 영웅’들이다.
이 아프가니스탄 유물은 2006년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등을 돌며 11개국에서 18번의 전시를 열었다. 한국은 12번째 방문국인데, 이후에도 해외 순회 전시를 좀 더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아프간으로 돌아가기엔 아직 안전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문화가 살아 있어야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 국립 아프가니스탄 박물관 입구에 새겨진 문구라고 한다. ‘살아남은’ 아프간의 희망이 진한 여운을 남기는 전시다.
● 일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9월 4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실(9월 27일부터 11월 27일까지)
● 관람료무료
● 문의 02-2077-9000, www.museu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