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
소크라테스는 ‘앎’에 대한 인간의 인식 자체를 철학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곧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의미로 들린다. 자신의 무지 앞에 떳떳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평생 무지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만 골라 하면서, 불철주야 잘난 척만 하다가 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꽤 괜찮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당신은 아직 멀었다. 아니,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수많은 질문과 논증으로 그들을 피곤하게 했다.진정한 앎에 이르는 길은 결코 달콤하고 쉽고 편안할 수가 없다. 다른 안락한 길, 꽃잎 뿌려진 아름다운 길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무지의 부끄러움을 앎의 환희로 바꿀 줄 알았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달리, 수많은 아테네인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모름’을 일깨우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아첨은 달콤하고 진실은 쓰디쓰다는 것을 소크라테스가 몰랐겠는가. 그는 대중에게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철학은 엄청나게 쉽고 재미있다’고 유혹하는 대신, ‘당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지 않는 것은 질문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는 것을 일깨우려 한 게 아닐까.
그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변론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어떻게 하면 소크라테스를 살릴까’ 궁리하며 읽곤 했다. 그가 처음부터 죽음을 결심했는지, 의심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읽을수록 확신범의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그는 처벌을 완화하려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명확하게 자신이 아테네인들을 괴롭히는 ‘이유’를 설명했다.
탈출구를 찾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살길을 도모하지 않았다. 크리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탈옥을 권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철학과 삶의 일치를 꿈꿨다. 아테네에서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철저히 정치적으로 진행됐다. 오랜 전쟁과 내분으로 인한 혼란과 피폐함에 지친 그리스인들은 뭔가 실용적인 것, 밥벌이가 되는 것,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반짝이는 대안을 찾았다. 하지만 평생 수업료 한 번 받지 않고 자신이 만난 모든 아테네인에게 무료로 철학 강좌를 해준 소크라테스의 관심은 오직 ‘인간에게서 가장 빛나는 덕성’을 끌어내는 것이었다.그의 죽음은 수많은 증인을 낳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고, 그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저마다 비장한 각오를 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지키고자 한 가치는 무엇이었을지 고민하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였다. 특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철학자로서 더 커다란 소명의식을 느낀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서로의 운명을 바꾼 사제 관계다. 플라톤은 스무 살 때 소크라테스를 만났다. 아테네 청년들이 선망하는 직업은 정치가였고, 플라톤 역시 정치에 입문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그는 소크라테스를 알고 나서부터 정치보다는 철학에 빠져들었고, 정치를 향한 야망을 접고 철학을 향한 꿈을 불태웠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문턱에 이를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킨 것도 플라톤이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스승이 정치적 압박으로 재판에 회부되고, 대중의 그릇된 판단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은 것으로 보인다.
질문을 멈추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스물여덟 살 때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연하게 죽었다. 플라톤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그는 그 상처를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극복한 것이 아닐까. 플라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소크라테스의 삶은 이토록 오랫동안 전 세계에 기억되지 못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세계인의 철학자로, 인류의 위대한 정신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다.물론 석공 아버지와 산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민중의 아들’ 소크라테스와 어리석은 대중을 혐오한 플라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정치적 차이가 심연처럼 가로놓여 있지만,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플라톤의 공로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구름’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때가 기원전 423년이니, 소크라테스가 마흔여섯 살 되던 해다. ‘구름’에는 소크라테스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잘난 척하는 이방인 샌님’으로 만들어버렸고, 소크라테스의 진심 어린 사상보다는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을 희화화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자연현상을 설명할 때 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연의 이치 자체로 설명한다는 점을 들어 그를 ‘무신론자’로 몰았고, 궤변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그를 화려한 언변을 지닌 혹세무민의 사상가로 몰았다. 당시의 궤변이란 가장 약한 주장을 가장 강한 주장으로 바꾸는 능력이었으므로 그것은 실수나 불의를 은폐하는 쪽으로 악용될 위험,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었다. 나쁜 짓을 저질러놓고도 화려한 언변만 잘 구사하면 유죄 판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이런 궤변론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아리스토파테스가 지적한 두 가지 부정적 특성이 24년이 흐른 뒤 소크라테스의 고발장에 그대로 나타난다. 무신론자이며 궤변론자로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자라는 비난은 사실 곡학아세를 일삼던 다른 소피스트들이 들어야 할 비난이었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설파함으로써 ‘대중의 감정’을 상하게 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회에서 눈엣가시였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할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무슨 쓸모가 있는지, 내가 아는 것은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끝없이 질문하는 것이 유쾌할 리 없다.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고통스러운 질문을 평생 회피하지 않는 것이, 생각이 한곳에 고여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았다.
이제 그만 전쟁을 멈추고 싶고, 이제 그만 잘먹고 잘 살고 싶고, 이제 그만 편안하게 출세와 영달에 이르는 길을 가고 싶은 아테네인들에게, 그는 자꾸만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아기를 낳는 여인과 고통을 함께하는 산파(産婆)이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인간 영혼의 산파가 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