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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義 위해 죽은 이항복

  • 백승종 | 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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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이항복은 벗 이덕형과 더불어 난세의 조정을 지킨 기둥이다. 재치와 해학 또한 세상의 으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그는 따뜻하고 자상하면서도 때론 까다롭고 추상(秋霜)같이 엄했다.
“이항복은 호걸이었다. 그 성품도 시원시원하였다. (…)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덕형과 나란히 이름을 떨쳤는데, 둘 다 문장가로 성공하여 벼슬이 높아졌다. 일찍이 정철은 이 두 사람을 상서로운 기린과 봉에 견주어 칭송했다.”(이항복 졸기, ‘광해군일기’)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그의 인물평이 그러했다. 이항복(李恒福·1556~1618,

호 백사(白沙))은 재치와 해학이 세상의 으뜸이었다. “호걸”이라거나 “성품도 시원시원하였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그런 그에게 이덕형이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들은 난세의 조정을 지킨 기둥이고, 훗날 나란히 청백리로 꼽혀 후세의 귀감이 됐다.

이항복은 강철 같은 신념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를 목숨을 던져서라도 지키려 했다. 이러한 그의 일생은 후배 장유(張維)가 저술한 ‘행장(行狀)’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남아 있는 숱한 설화에서도 그의 인간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런 이항복은 어떤 아버지였을까. 유쾌하고 기지가 번득이는 호걸쾌사(豪傑快士)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그의 평소 언행과 이따금 가족에게 보낸 편지, 곧 ‘간독(簡牘)’을 살펴보면,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이자 때론 까다롭고 추상(秋霜)같이 엄한 아버지였다.





영의정의 손녀사위

세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이항복의 이미지는 ‘익살꾼’이다. 오랫동안 회자돼온 ‘오성과 한음 이야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훗날 오성부원군에 책봉된 이항복과 그의 벗 이덕형(李德馨·1561~1613, 호 한음(漢陰))의 우정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는 전국에 널리 퍼져 있다. 20세기 후반에 수집 정리된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에도 상당히 많은 관련 설화가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의 이목을 끄는 것은 이항복의 가족 얘기다. 그의 결혼담부터 들어보자.



소년 이항복의 집 마당에는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린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웃집 대감은 홍시를 무척 좋아해 자기 집으로 넘어온 가지에 달린 홍시를 몽땅 차지했다. 이항복은 항의했으나 대감은 막무가내였다. 이항복은 궁리 끝에 대감의 사랑방 문에 구멍을 뚫고 주먹을 불쑥 들이밀며 물었다. “이것이 누구의 주먹입니까?” “네 놈의 주먹이지!” 대감이 이렇게 말하자, 이항복은 똑같은 논리로 대감을 굴복시켰다.



이 설화는 과연 역사적 사실과 일치할까. 그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거기엔 간과하지 못할 점이 있다. 설화 속 인물의 특징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는 점이다. 장유는 ‘행장’에서 소년 이항복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15세가 되자 공은 몸집이 건장했고 용맹하였다. 씨름과 공차기 등 ‘소년들의 놀이’도 썩 잘하였다. 어머니 최 부인이 그 사실을 알고 준절히 나무랐다.”

요샛말로 이항복은 ‘노는 아이’였다. 설화에 묘사된 것처럼 이항복은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요, 재치가 남달랐다. 이웃집 대감으로 기술된 영의정 권철(權轍)에 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권철은 다소 장난기가 있었지만 솔직하고 기개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년 이항복의 기지와 용맹에 호감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권철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 장군이다. 그들 권씨 부자는 호걸의 풍모를 지닌 이항복을 몹시 아껴 사위로 삼았다.


고지식한 장인, 기민한 사위

또 다른 설화는 권율과 이항복, 두 사람의 차이점을 암시한다.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무더운 여름날, 입궐하는 장인에게 이항복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처럼 더운 날은 겉옷만 제대로 차려입으시지요. 속옷이야 낡은 옷이면 어떻습니까. 뉘라서 알겠습니까.” 장인은 그럴듯한 말이라며, 평소 집에서 입는 옷을 입었다.

뒤이어 이항복도 조정에 나갔다. 그날따라 그는 선조 임금에게 기이한 제안을 했다. “전하, 날씨가 너무 덥사옵니다. 이제 관복일랑 모두 벗어버리고, 편복 차림으로 회의를 하심이 어떠하옵니까?” 왕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았다. “경들은 모두 관복을 벗으시오!”

낡고 해진 속옷을 걸친 권율은 순간 당황했다. 권율의 옷차림을 두고 대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조의 낯빛도 붉어졌다.

그러자 이항복이 아뢰었다. “권공은 벼슬이 높아도 가세가 어렵사옵니다. 이처럼 낡은 옷마저 여벌이 없을 지경이옵니다.” 왕은 권율의 청렴에 감동해 즉석에서 상을 내렸다.



우리는 권율을 장수로만 기억한다. 사실은 달랐다. 그는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한 문인이다. 그 역시 사위 이항복과 마찬가지로 문무의 재능을 겸비했다. 왜란 때 도원수로서 큰 공을 세운 권율은 청렴하지만 고지식했다. 위의 설화에서 보듯, 두뇌가 기민해 임기응변에 능한 사위 이항복과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이 설화의 줄거리는 영락없는 허구다. 사위가 장인을 꾀어 일부러 궁지에 빠뜨린 적도 없고, 왕이 바로 그 장인에게 선물을 준 일도 없다.

그럼에도 설화에 담긴 세평이 귀중하다. 줏대 없고 무능한 선조 임금보다 한결 뛰어난 이가 이항복이요, 융통성이 부족한 권율 장군보다도 이항복이 낫다는 평가는 경청할 만하다.



당파 초월한 우정

타고난 익살꾼에 ‘꾀 보따리’가 이항복이었다. 그는 학문에도 뛰어나 25세 때 문과에 합격했다. 말솜씨와 글솜씨가 다 뛰어나 일단 조정에 들어가자 그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조정엔 당쟁의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래도 이항복은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선조도 그의 재주와 능력을 믿고 요직을 맡겼다. 장유는 이렇게 말했다.

“공은 39년 동안 벼슬을 하였는데 이조판서를 한 번, 병조판서를 다섯 번, 정승을 네 번, 원수(元帥)를 한 번, 체찰사를 두 번이나 지냈다.”(장유, ‘행장’)

그때 조정엔 이항복의 동지 이덕형도 있었다. 속설과 달리, 그들의 우정은 성인이 된 다음에 시작됐다. 이항복이 다섯 살 연하의 이덕형을 처음 만난 것은 22세 때였고 서울의 과거시험장에서였다. 혈연과 학연으로 보면 이항복은 서인, 이덕형은 동인이었지만 우정으로 하나가 된 그들은 당쟁 극복에 힘썼다.

그러나 1592년 잔혹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국운은 더욱 기울었다. 이제 두 사람은 국난 극복을 사명으로 여겼다. 이덕형은 외교 수완이 뛰어나 사신으로 뽑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됐다.

병조판서 이항복은 명나라로 떠나는 벗에게 말했다. “자네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하면, 내 시체를 이 나루터에서 찾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덕형이 답했다. “명의 구원병이 안 오거든, 자네는 내 시체를 명나라 도읍에 와서 찾아가게.”

두 사람은 외교와 국방을 전담하다시피 하며 구국의 일념으로 분주했다. 다행히 이순신, 권율 및 의병장들의 승리가 잇따라 왜적은 물러갔다. 그랬으나 한번 도탄에 빠진 민생은 회복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초로의 정승 이덕형이 먼저 세상을 등졌다. 이항복은 노구를 이끌고 상가를 찾아가 친구의 시신을 손수 염했다. 당파를 초월한 두 사람의 우정은 후세의 귀감이 될 만했다.

사람들의 뇌리에 두 재상은 구국의 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들이라면 낡은 사회질서의 폐단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지어냈다. 구질서의 통쾌한 전복, 이는 민중의 꿈이었다.



선배 관리 같은 아버지

이항복과 권씨 부인은 자녀를 여럿 두었다. 이항복은 이따금 자녀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했다. 자녀들이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조언도 기꺼이 했다.

1612년(광해 4), 강원도 양구현감으로 있던 큰아들 이성남(李星男)이 위기에 빠졌다. 일이 잘못되어 그가 체벌한 역졸이 죽고 말았다. 이성남은 상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이항복은 애타는 마음을 담아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아버지는 노련한 선배 관리로서 아들에게 침착과 냉정을 주문했다.

“네가 수사를 받고 있는 지금, 벼슬을 그만둔다면 네가 허약하고 겁쟁이로 보여 다들 가소롭게 여길 것이다. 일의 형세로 보아도 마땅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조용히 조사에 임해야 한다. 만일 관찰사가 너를 처벌하려고 조정에 건의할 경우에는 말이다. 체포를 하든 파직을 하든, 서울의 대간(臺諫)들이 죄를 고발해 파직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처리하든지 아무 걱정 말고 맡겨두자. 결국 이 사건이 무사히 종결되면, 그때는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면 좋겠다.

‘역졸도 백성이온데, 비록 가벼운 매질을 하긴 했지만 저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제 마음이 매우 불편합니다. 다시는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이 일로 수개월 동안 하명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무죄 처분을 받아 더더욱 송구합니다.’ 이런 글을 올리고, 조정의 법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러면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말미엔 차마 숨기지 못할 이항복의 진심이 확연히 드러난다. 아들의 안위를 염려한 아버지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내가 듣건대, 양구현 아전들이 네게 원망을 품고 처벌을 바란다고 하는구나. 극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정상 더는 그곳에 머물지 못할 형편이거든 말이다. 설사 도주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서둘러서 꼭 빠져나와야 한다. 알겠느냐. 이 결정은 현장에서 직접 형편을 판단할 수 있는, 네 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그는 아들에게 ‘신변에 위협을 느끼거든 양구를 벗어나라. 나중에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너는 무사히 내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 뒤 사건은 별 탈 없이 해결돼 아들은 양구에 계속 머물렀다.  

이듬해인 1613년(광해 5), 이항복은 손자의 교육 문제로 큰아들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교육 문제에 관한 이항복의 태도는 요샛말로 ‘꼰대’나 다름없었다.

“시아(時兒, 이름 미상)가 곧 ‘사략(史略)’을 뗀다고. 내 마음에 위로도 되고 다행스럽구나. 그런데 책은 한 번 쓱 보아 넘기기만 하면 안 되느니라. 숙독하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손자가 그 책을 다 뗐다 해도, 다른 책을 펼치게 하지 말고 두고두고 되풀이해 읽혀라. 50~60번을 반복해 읽은 뒤라야 다른 책을 봐도 괜찮다.”

손자 공부에 잔소리

‘사략’을 마친 뒤엔 또 어떻게 할지, 그에 관해서도 할아버지는 생각이 많았다. 문과에 급제하지도 못한 큰아들의 실력을 의심했기 때문일까.

“만일 ‘사략’을 숙독했다면, ‘통감(通鑑)’은 굳이 읽힐 필요가 없다. 그러면 ‘논어(論語)’를 읽혀야 할 텐데, 그 공부는 또 그 나름으로 주의점이 있을 것이다.”

이항복은 손자의 공부에 관해 장기적인 방침을 이미 마련해뒀던 모양이다. 그는 큰아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아가 7권이나 되는 책(‘사략’)을 읽었으면, 문리는 조금 트였겠구나. 당장 시사(詩詞)를 읽히고, 글쓰기[述作]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리는 있어도 글쓰기에 서툴러, 결국 서궤(書櫃, 책장)처럼 쓸데없는 공부로 끝나고 말 것이다. 절실히 경계하고 경계하라.”

이참에 이항복은 손자를 서울로 데려다가 자신이 직접 지도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런 중대한 교육 문제를 아들과 차분히 상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듯, 사실상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사략’을 숙독하고 나면, 시아를 데려와야 하겠다. 여기서 내가 시도 가르치고 글쓰기도 가르칠 것이다. 다른 대가들의 책도 다 가르치고 싶다. 한 가지 책을 끝내면, 네게 보내 시아가 부모를 만나고 여기서 배운 것을 숙독하게 하자. 숙독이 끝나면, 또 이리로 와서 다른 책을 배우게 하리라. 절반은 서울에 머물고, 절반은 시골에 있게 하는 것이 시아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항복의 정성스러운 지도에도 시아의 학문은 끝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아마도 시아는 요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씨 집안의 명예를 빛낼 아이는, 한참 뒤에 태어난 이시현(李時顯)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

이시현이 태어나기도 전, 이항복은 불귀의 객이 됐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로 조정에선 대북파의 세력이 강해졌다. 그들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마저 폐위할 것이었다. 이항복을 비롯한 몇몇 인사가 ‘폐모론’을 반대했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1617년(광해 9) 겨울, 이항복은 폐모론에 반대한 죄로 귀양길에 올랐다. 연로한 그는 중풍까지 앓아 반신불수가 됐다. 그럼에도 집권 세력은 무리한 유배 명령을 집행했다. 이듬해 여름, 이항복은 북청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유배를 떠날 때 이항복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그는 상을 치를 옷가지를 챙기고 나서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죄를 얻었구나.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 관복)로 염(殮)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 선비의 웃옷)와 대대(大帶, 선비의 큰 허리띠)만 쓰라.”

정치적 파탄은 계축년(1615년, 광해 5)에 시작됐다. 대북파가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 일가를 몰살하고, 여덟 살짜리 영창대군에게 ‘역적의 괴수’라는 죄명을 씌웠다. 이항복은 거세게 반대했다. 장유는 그때의 정황을 차분히 기술했다.

“소인배가 기세를 떨쳐 다가올 재앙을 예측할 수 없었다. 두 명의 대신이 밤에 공(이항복)을 찾아와 회유하고 협박하였다. 그래도 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들과 조카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족의 안위부터 살펴주소서!’라고 애원하자, 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훈계하였다. ‘나는 선조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재상이 되었다. 이제 늙어 죽을 목숨에 불과하다. 어찌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까 보냐.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북청에서 이항복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자, 광해군은 그의 관작(官爵)을 되돌려줬다. 이항복의 후손들은 대대로 명가의 전통을 이어 여러 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사도세자를 애써 보호한 이종성도 그의 후손이고, 신흥무관학교로 유명한 이회영·이시영 형제도 그러했다. 정녕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부러지지 않는 법인가.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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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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