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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義 위해 죽은 이항복

  • 백승종 | 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손자 교육법까지 챙긴 ‘꼰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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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식한 장인, 기민한 사위

또 다른 설화는 권율과 이항복, 두 사람의 차이점을 암시한다.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무더운 여름날, 입궐하는 장인에게 이항복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처럼 더운 날은 겉옷만 제대로 차려입으시지요. 속옷이야 낡은 옷이면 어떻습니까. 뉘라서 알겠습니까.” 장인은 그럴듯한 말이라며, 평소 집에서 입는 옷을 입었다.

뒤이어 이항복도 조정에 나갔다. 그날따라 그는 선조 임금에게 기이한 제안을 했다. “전하, 날씨가 너무 덥사옵니다. 이제 관복일랑 모두 벗어버리고, 편복 차림으로 회의를 하심이 어떠하옵니까?” 왕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았다. “경들은 모두 관복을 벗으시오!”

낡고 해진 속옷을 걸친 권율은 순간 당황했다. 권율의 옷차림을 두고 대신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조의 낯빛도 붉어졌다.



그러자 이항복이 아뢰었다. “권공은 벼슬이 높아도 가세가 어렵사옵니다. 이처럼 낡은 옷마저 여벌이 없을 지경이옵니다.” 왕은 권율의 청렴에 감동해 즉석에서 상을 내렸다.



우리는 권율을 장수로만 기억한다. 사실은 달랐다. 그는 문과(文科)를 통해 조정에 진출한 문인이다. 그 역시 사위 이항복과 마찬가지로 문무의 재능을 겸비했다. 왜란 때 도원수로서 큰 공을 세운 권율은 청렴하지만 고지식했다. 위의 설화에서 보듯, 두뇌가 기민해 임기응변에 능한 사위 이항복과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이 설화의 줄거리는 영락없는 허구다. 사위가 장인을 꾀어 일부러 궁지에 빠뜨린 적도 없고, 왕이 바로 그 장인에게 선물을 준 일도 없다.

그럼에도 설화에 담긴 세평이 귀중하다. 줏대 없고 무능한 선조 임금보다 한결 뛰어난 이가 이항복이요, 융통성이 부족한 권율 장군보다도 이항복이 낫다는 평가는 경청할 만하다.



당파 초월한 우정

타고난 익살꾼에 ‘꾀 보따리’가 이항복이었다. 그는 학문에도 뛰어나 25세 때 문과에 합격했다. 말솜씨와 글솜씨가 다 뛰어나 일단 조정에 들어가자 그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 조정엔 당쟁의 거센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래도 이항복은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선조도 그의 재주와 능력을 믿고 요직을 맡겼다. 장유는 이렇게 말했다.

“공은 39년 동안 벼슬을 하였는데 이조판서를 한 번, 병조판서를 다섯 번, 정승을 네 번, 원수(元帥)를 한 번, 체찰사를 두 번이나 지냈다.”(장유, ‘행장’)

그때 조정엔 이항복의 동지 이덕형도 있었다. 속설과 달리, 그들의 우정은 성인이 된 다음에 시작됐다. 이항복이 다섯 살 연하의 이덕형을 처음 만난 것은 22세 때였고 서울의 과거시험장에서였다. 혈연과 학연으로 보면 이항복은 서인, 이덕형은 동인이었지만 우정으로 하나가 된 그들은 당쟁 극복에 힘썼다.

그러나 1592년 잔혹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국운은 더욱 기울었다. 이제 두 사람은 국난 극복을 사명으로 여겼다. 이덕형은 외교 수완이 뛰어나 사신으로 뽑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됐다.

병조판서 이항복은 명나라로 떠나는 벗에게 말했다. “자네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하면, 내 시체를 이 나루터에서 찾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덕형이 답했다. “명의 구원병이 안 오거든, 자네는 내 시체를 명나라 도읍에 와서 찾아가게.”

두 사람은 외교와 국방을 전담하다시피 하며 구국의 일념으로 분주했다. 다행히 이순신, 권율 및 의병장들의 승리가 잇따라 왜적은 물러갔다. 그랬으나 한번 도탄에 빠진 민생은 회복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초로의 정승 이덕형이 먼저 세상을 등졌다. 이항복은 노구를 이끌고 상가를 찾아가 친구의 시신을 손수 염했다. 당파를 초월한 두 사람의 우정은 후세의 귀감이 될 만했다.

사람들의 뇌리에 두 재상은 구국의 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들이라면 낡은 사회질서의 폐단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지어냈다. 구질서의 통쾌한 전복, 이는 민중의 꿈이었다.



선배 관리 같은 아버지

이항복과 권씨 부인은 자녀를 여럿 두었다. 이항복은 이따금 자녀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했다. 자녀들이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조언도 기꺼이 했다.

1612년(광해 4), 강원도 양구현감으로 있던 큰아들 이성남(李星男)이 위기에 빠졌다. 일이 잘못되어 그가 체벌한 역졸이 죽고 말았다. 이성남은 상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이항복은 애타는 마음을 담아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아버지는 노련한 선배 관리로서 아들에게 침착과 냉정을 주문했다.

“네가 수사를 받고 있는 지금, 벼슬을 그만둔다면 네가 허약하고 겁쟁이로 보여 다들 가소롭게 여길 것이다. 일의 형세로 보아도 마땅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조용히 조사에 임해야 한다. 만일 관찰사가 너를 처벌하려고 조정에 건의할 경우에는 말이다. 체포를 하든 파직을 하든, 서울의 대간(臺諫)들이 죄를 고발해 파직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처리하든지 아무 걱정 말고 맡겨두자. 결국 이 사건이 무사히 종결되면, 그때는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면 좋겠다.

‘역졸도 백성이온데, 비록 가벼운 매질을 하긴 했지만 저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제 마음이 매우 불편합니다. 다시는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이 일로 수개월 동안 하명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무죄 처분을 받아 더더욱 송구합니다.’ 이런 글을 올리고, 조정의 법에 따라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러면 이 일이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편지의 말미엔 차마 숨기지 못할 이항복의 진심이 확연히 드러난다. 아들의 안위를 염려한 아버지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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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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