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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브렉시트 & 대처리즘

‘애매모호한 영국’ 안개 낀 늪에 빠지다

  • 이명재 | 아시아경제 논설위원

‘애매모호한 영국’ 안개 낀 늪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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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은 실제 철도 노동자가 로치 감독에게 보내온 편지를 바탕으로 했다. 작업 현장에서 암에 걸린 이 노동자의 얘기가 영화로 옮겨진 뒤 이 편지의 발신자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노동자들이 좌절한 것은 삶의 질이 뒷걸음질치고 팍팍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 면이 더 크다.

마침 올해는 ‘금융 빅뱅(Big Bang)’ 30주년이다. 1986년 10월 영국 정부가 밀어붙인 대대적인 금융개혁 정책을 가리키는 금융 빅뱅은 금융회사 간 경쟁 촉진 및 시장 자유화가 골자였다. ‘더 시티(The City)’로 통하는 런던 금융가는 지금 세계 금융업의 메카가 돼 있다. 미국 월가로만 향하던 기업공개(IPO) 물량이 시티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헤지펀드 자산운용사들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유로화 체제에서 시티는 더욱 번성해 유로화 거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영국은 유로화를 쓰는 유로존에 속해 있지 않지만, 발달한 정보기술(IT) 덕분에 런던에서 모든 형태의 금융 비즈니스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티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전문 인력은 지난 15년 사이에 50% 늘었다. 시티의 발전과 다른 한편으로 EU 체제와 세계화의 과실을 특정 계층이 독차지한다는 불만과 불신도 그만큼 높아졌다.

브렉시트 투표 결과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불만에서만 찾는 것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지금의 영국 사회가 뭔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돼 가고 있다는 것, 뭐가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는 것, 그것이 명료한 불만이든 막연한 불안이든 ‘영국의 현재’에 대한 영국민들의 거부감을 보여준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와 푸들

실직자들의 얘기를 다룬 ‘풀 몬티’ 같은 영화가 다소 직설적인 화법으로 영국 사회의 환부를 드러냈다면, 은유와 암시로 사회를 비판한 영화도 있다.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라는 1989년 작품이 그런 영화다. 런던에 있는 바로크풍 호화 레스토랑 ‘르 올랑데’를 배경으로 일주일여 동안 벌어지는 기괴한 에피소드를 다뤘는데, 표면적으론 식욕과 성욕의 억압과 해방을 그린 듯하다. 그러나 실은 대처 시대(와 그 이후)에 영국 사회를 질식시킬 정도로 극성이던 자본주의의 탐욕을 풍자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매트릭스’로 유명한 워쇼스키 형제가 2005년 제작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는 미래의 런던이 배경이지만 오늘날의 영국 현실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브이’라는 혁명가를 중심으로 한 체제 전복 시도를 그린 이 SF물의 원작은 대처 시절인 1980년대에 발표된, 같은 제목의 그래픽 노블이다. 어린이 관객들을 겨냥한 클레이 애니메이션 ‘치킨 런’조차 풍자를 담았다. 예컨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치킨 파이 자동 제조기가 대처리즘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니냐는 식이다.

“우리는 대륙에 속했으나 대륙과는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는 영국의 계몽사상가 헨리 볼링브로크의 말로 시작한다. 영국의 지정학적 위치, 그 본질적인 특성을 잘 정의한 말이다. 떨어져 있되 고립돼 있지는 않은 것이다. 지난 2000여 년간 영국의 역사는 대륙으로부터 이탈과 대륙으로의 편입이 교차한 역사였다. 이탈이냐, 편입이냐는 우선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영국의 국력과 경제력,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의해 좌우되는 딜레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그 딜레마가 어느 때보다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국민투표에서 이민자가 많은 지역이 토박이가 많은 지역보다 EU 잔류 지지율이 높았던 것은 그런 딜레마의 표출이다. 저교육·저소득 지역에서 탈퇴 성향이 강했던 것은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불만이 주민들 사이에 확산됐기 때문으로 해석됐다. 지난 150여 년 동안 자유화와 세계화를 선도해온 영국의 궤적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내부의 새 균형 찾아야

쥘 베른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가 세계를 돌면서 보여준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자신감과 여유였다. 1세기 반이 지난 2003년의 영화 ‘러브 액추얼리’에서 영국의 총각 총리는 옆에 선 미국 대통령을 통쾌하게 한 방 먹인다.

“영국은 작은 나라지만 강합니다. 우리에겐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스, 숀 코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해리 포터도요. 축구선수 베컴의 왼발도 있습니다. 물론 오른발도요(웃음). 힘에는 힘입니다. 미국은 대비해야 할 겁니다.”

그렇듯 당당하던 모습은 이제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된 게 현실이다. 2003년 영국이 미국을 따라 이라크전 참전을 결정했을 때 ‘미국의 푸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이 말에 예전 같지 않은 오늘날 영국의 국제적 위상이 집약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젠 더 이상 필리어스 포그와 같은 상류층은 물론 중산층과 노동자들도 제국주의의 과실을 누릴 수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가 아니다. 영국 사회는 내부의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한다.

대처가 타계하기 2년 전인 2011년에 개봉된 영화 ‘철의 여인(Iron Lady)’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영화 속 대처는 치매로 기억이 오락가락했다. ‘치매 환자’ 대처는 자기가 주도한 일이 영국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는지 자신조차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은유처럼 읽힌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 붙인 제목 ‘애매모호한 일본의 나’처럼 ‘애매모호한 영국’이다. 이 늪 같은 현실, 짙은 안개에 싸인 현실에서 어떻게 앞을 헤쳐나갈 것인가.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에 나오는 주인공과 친구들처럼 헤로인에 빠져서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하지만, 영국의 혼돈과 방황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신동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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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 아시아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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