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호

포커스

‘신경영’ 유물? 수평·자율·쌍방향 돼야

삼성 사내방송이 뭐길래…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6-08-04 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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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 구글에 한참 못 미친다” 사내방송 후폭풍
    • ‘신경영’ 촉발, 실천, 독려
    • “脫권위주의 시대…사내 커뮤니케이션 기법도 변해야”
    ‘삼성전자 소프트웨어(SW) 엔지니어가 구글 입사를 시도한다면 1,2%만 합격할 것이다.’

    ‘인스타그램은 4명이 6주 만에 개발했다. 삼성은 몇 백 명이 해도 1년은 걸릴 것이다.’

    6월 21일 삼성그룹이 사내방송(SBC)으로 내보낸 특집 프로그램 ‘삼성 소프트웨어 경쟁력 백서’의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삼성 안팎에 논란이 일었다.

    이날 방송된 1부 ‘소프트웨어의 불편한 진실’은 외부 전문가들의 신랄한 비판을 통해 삼성 SW의 현주소를 짚었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등장 이후 모바일 운영체제(OS) 경쟁에서 밀려 구글과 애플에 시장 주도권을 내줬다. 2013년 나온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운영체제 ‘타이젠’은 현재 시장점유율이 0.1%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 기술인 스마트카, 인공지능, 가상현실(VR) 분야에서도 삼성 SW의 저력은 잘 감지되지 않는다.





    “왜 ‘직원 역량’만…”

    삼성의 SW 경쟁력 현실을 통렬하게 다룬 이번 사내방송에 대해 상당수 언론은 ‘삼성의 냉철한 자기반성’이라고 평가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SBC는 삼성 내부의 문제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내보내왔고 이번 특집도 그 일환”이라고 밝혔지만, 근래 들어 SW 분야 인수합병(M&A)이 잦고 직제를 단순화하는 등의 조직 개편과 맞물려서도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온다.

    삼성 출신 한 인사는 “사내방송이 과거처럼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진 않지만, 직원들은 사내방송이 어떤 이슈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회사가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직원보다는 임원, 특히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부 임원을 겨냥한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고 했다.

    사내방송을 지켜본 전·현직 삼성 SW 인력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출신 한 인사는 “상부 보고와 연말 평가를 목숨처럼 중시하는 조직에서 소프트웨어 역량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직원들 사이에서 늘상 해오던 얘기라 새로울 게 없다”고 꼬집었다. 임원 출신의 전직 ‘삼성맨’은 “창조와 혁신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강압적인 톱다운(top-down)식 관리 문화인데, 그것은 언급하지 않고 직원 역량만 문제 삼아서 반발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사내방송 2부 ‘우리의 민낯’은 7월 5일 방송됐는데, 1부가 야기한 논란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방송 일정이 예정보다 일주일 늦춰진 것으로 알려졌다. 2부 역시 외부 전문가의 발언을 통해 ‘SW의 큰 그림을 그리는 아키텍처(architecture, 건축) 개념이 없어 설계가 엉망이다’ ‘사원은 상사가 만든 코드에 대해 ‘이게 문제다’라고 말할 수 없는 문화다’ ‘직급이 올라가면 조직관리 부담이 커 전문성을 키울 수 없다’는 등 조직문화의 문제를 거론했다. 최근 ‘열린 소통의 문화를 지향’하며 조직문화 혁신을 추구하는 삼성그룹의 방향과 맥이 닿아 있는 내용이다.

    삼성 사내방송 SBC(Samsung Broadcast Center)의 역사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국내 기업들은 재벌사를 중심으로 앞다퉈 사내방송을 도입했다. 1985년 5월 현대그룹을 시초로 이듬해 포항제철과 한국전력, 1987년 럭키금성(현 LG그룹), 1989년 삼성그룹이 각각 사내방송을 시작했다(손미나, ‘조직특성에 따른 사내방송의 통제요인에 관한 연구’, 2006).



    ‘신경영’ 전파 창구

    사내방송을 본사 위주로 내보내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삼성은 시작 단계부터 사내방송을 전국 사업장에 동시에 내보내고, 계열사마다 자체 방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SBC 설립을 주도한 이영진 전 제일기획 전무는 “그룹 비서실에서는 전사 방송을, 각 계열사 홍보팀에서는 각사 방송을 제작하다가 외환위기 이후 효율성을 높이고자 사내방송 제작 기능이 제일기획 영상사업단으로 한데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제일기획 SBC본부가 사내방송 제작을 담당한다.

    SBC는 1992년 9월 다른 기업은 물론 국내 공중파 방송국보다 먼저 위성방송을 실시했다. 사전 제작한 비디오테이프를 각 계열사로 내려보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1993년 삼성그룹 시무식은 위성방송을 통해 전 사업장에 생중계됐다고 한다.

    그러나 SBC의 위상은 무엇보다도 ‘삼성 신경영’의 촉매제이자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점에 있다. 1993년 6월 초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던 중, 삼성의 세탁기 생산 라인에서 부품 규격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칼로 부품을 깎아내는 장면이 담긴 사내방송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데, 이 일은 이 회장이 같은 달 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회장은 해외 출장 중에도 사내방송 비디오테이프를 챙겨 봤다고 한다.

    이후 SBC는 신경영을 그룹 내에 설파하는 주요 도구 중 하나가 됐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핵심 간부들을 모아놓고 8시간에 걸쳐 마라톤 회의를 했는데, 그 주요 내용을 40분짜리 영상 2개로 압축해 SBC로 이틀에 걸쳐 내보냈다. 당시 신문기사는 ‘삼성그룹 비서실은 23개 계열사들에 한 명도 빠짐없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도록 요청했다’고 전한다(매일경제, 1993년 6월 24일).

    이영진 전 전무는 “프랑크푸르트 회의의 주요 내용을 전사에 내보낸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며 “당시 이 회장의 신경영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그룹 비서실에 재직했던 한 인사는 “사내방송팀은 비서실 내 다른 팀들보다 인력이 더 많았을 정도로 회장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기억했다.


    “일방향 커뮤니케이션”

    그러나 요즘 SBC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는 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가 읽힌다.

    “연수원에 입소해 2주간 교육받으며 삼성이 얼마나 훌륭한 기업인지 익혔다. 이건희 회장에 대한 존경심도 생겼다. 하지만 아침마다 사내방송을 반(半)의무적으로 보면서 ‘여기가 북한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업무에 참고가 되는 내용도 있지만, 사내방송의 상당 부분은 반도체 등 옛 성공신화를 강조하는 데 할애됐다.” (최근 퇴사한 중간관리자급 삼성 직원)

    삼성의 비주류 계열사에 속했던 한 인사는 “사내방송은 윗분들이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는 도구, 특히 신입공채 출신에게는 ‘나도 삼성그룹의 일원’이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주는 존재 정도의 의미”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이나 세계시장 동향, 미래 전망 등의 사내방송 콘텐츠는 시청할 만한 값어치가 있지만, 사내방송이 경영진 능력은 불문에 부친 채 직원의 능력을 꼬집는 것은 언짢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삼성 출신의 황창규 회장이 이끄는 KT 직원들도 사내방송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황 회장 취임 후 KT는 아침 사내방송 시간을 8시 40분에서 8시 20분으로 앞당겼다. KT의 한 20대 직원은 “매일 아침 경영진이 기치로 내건 ‘고객인식 1등’을 강조하는 내용을 반복해 보여주니 다들 피로감을 느낀다. 부서장이 사내방송을 열심히 보는지 은근하게 체크하는 것도 거슬린다”며 “회사 내 다양한 사업을 소개해주는 것만 회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정도”라고 평했다.

    무엇이 사내방송에 대한 전에 없던 거부감을 초래했을까.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비단 삼성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내 기업에 사내방송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까지만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이제는 변화된 사회구조에 맞게 사내방송도 달라져야 한다. 제조업 중심의 고성장 시대에는 한 방향으로 열심히 뛰기만 해도 성과가 나왔다. 권위주의적 조직문화가 오히려 효율성을 높였고, 조직원들은 사내방송을 통해 하달되는 경영진의 생각에 반발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하기가 더는 어려운 시대가 됐다.”(신호창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단체메일, n분의 1

    “커뮤니케이션은 내용뿐만 아니라 툴과 채널에도 메시지가 담긴다. 사내방송은 화자(話者)가 경영진으로 이미 결정돼 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이 없다면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삼성 SW 역량의 한계를 외부 전문가뿐 아니라 내부 직원들의 목소리로도 전했다면 방송에 대한 반응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PR 전문가 박일준 KCMG 대표)


    그러나 삼성은 아직도 위에서 명령만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분위기다. 물론 명령이나 지시는 당연히 위에서 내려오고 제안이나 의견은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올려봐야 안 되더라’는 불신감 때문에 밑에서 위로 의견이 안 올라오고 있다. 결국 타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결론이다.



    1993년 삼성신경영실천위원회가 발행한 ‘삼성 신경영 : 나부터 변해야 산다’에 실린 이건희 회장 발언의 한 대목이다. SBC는 이처럼 삼성이 사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이 실릴 수 있었던 조직이다. 그렇다면 신경영 이후 ‘스타트업 삼성’에 맞는 사내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어떤 것일까.

    박일준 대표는 “스타트업 조직문화를 확산시키려 한다면 상대에 맞춰 관점을 바꾼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처럼 커뮤니케이션의 관점도 수평과 자율, 쌍방향을 키워드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최 원장은 최근 키가 작은 어린이에게 상을 주기 위해 무릎을 꿇어 화제가 된 바 있다. 신호창 교수는 “많은 경영자가 사내방송을 자신이 쓸 수 있는 ‘단체메일’처럼 여기는데, 차라리 직원들에게 단체메일을 보내는 게 낫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사내방송에서 자신의 지분이 n분의 1로 한정돼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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