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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현대사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라인 강의 기적’ 주역 아데나워 서거 50주기

  • 백범흠|중국청년정치학원 객원교수·정치학 박사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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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정책을 두고 좌파, 우파로 나뉘어 충돌하는 한국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 4월 19일은 독일 통일의 씨앗을 뿌린 아데나워(1876~1967) 서거 50주기다. 독일은 통일이라는 과업 앞에서 좌·우파의 구분이 없었다.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ehrung)’로 통일을 이뤄냈다. 동·서독 통일은 아데나워(총리·보수)가 에르하르트(총리&경제장관·보수)와 함께 이룩한 경제력 및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바탕으로 바르(특임장관·진보)가 설계하고, 브란트(총리·진보)가 추진했으며, 슈미트(총리·진보)가 이를 더 단단히 하고, 콜(총리·보수)과 겐셔(외교장관·중도)가 종결지은 게르만 민족의 일대 과업이었다.

1989년 11월 9일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사회주의통일당(SED) 정보담당 서기는 술렁대는 기자단 앞에서 동독 국민은 ‘지금 즉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동베를린 시민이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른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베를린 장벽은 몰려든 시민에 의해 세워진 지 28년 만에 무너졌다.

이듬해 초 서독(Bundesrepublik Deutschland)이 경제난에 처한 소련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가한 독일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2+4회담이 열렸다. 1990년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되고, 9월 2+4 회의의 승인을 받아 10월 3일 ‘거짓말같이’ 통일이 이뤄졌다.

다수 외교관과 국제정치학자는 독일 통일을 ‘동방정책(Ostpolitik)의 승리’라고 평했다. 아직도 많은 이가 동방정책에 앞서 ’서방정책(Westpolitik)’이 있었으며, 동방정책은 ‘서방정책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말 같은 통일

1939년 5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동몽골(東蒙古) 노몽한(할힌골)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 소련군 간 전투는 기갑부대 중심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휘하 소련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일본군의 노몽한 전투 패배는 1941년 4월 일·소 중립조약 체결로 이어져 2개월 뒤인 6월 독·소 전쟁 개시 후 독일의 간청에도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고수함으로써 결국 독일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노몽한 전투는 1939년 9월 독일군, 소련군의 폴란드 침공, 1940년 5월 독일군의 벨기에·프랑스 침공,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침공, 1941년 12월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등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시발점이 됐다.



‘중립국 통일안’ 거부

독일 제3제국(히틀러 제국)은 소련 침공 이후 동부전선은 물론, 미국·영국 등 사방에서 적을 맞았으며 1945년 4월 베를린이 함락당하면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독일은 패전으로 인해 프로이센 왕국 이래의 고유 영토 오데르-나이세선(Oder-Neisse Line) 이동(以東) 약 10만㎢를 소련과 폴란드에 빼앗겼으며, 나머지 영토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분할 점령당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이어 불과 27년 만인 1945년 두 번째 패전을 겪은 독일인들은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

공황 상태의 서독을 추슬러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공동체(EC)에 가입시켜 다시 열강의 하나로 우뚝 서게 만든 콘라트 아데나워 전 서독 총리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7년 4월 19일 라인 강변의 소도시 뢴도르프에서 91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워진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시절 쾰른 시장을 지낸 보수 기민당(CDU) 출신 아데나워는 1949년 73세의 나이로 서독 총리로 선출됐다. 당시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서독 내정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경제성장과 △서독의 국제 지위 회복이라는 2대 목표 달성에 주력했다. 아데나워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공산주의의 위협을 저지할 수 있으며, 서독의 국제적 지위도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데나워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장관에게 경제정책을 위임해 지금도 전 세계가 찬탄하는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서독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950년 1000달러에서 1969년 5000달러로 급증했다(2015년 경상가치 기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독일인에게 민족주의란 대체로 보수 진영의 가치였다. 진보 진영은 일반적으로 국제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1951~1955년 외무장관을 겸직한 아데나워는 일정 기간 미국, 영국, 프랑스의 간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되 주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아데나워의 외교 방향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총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추진한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후 소련(러시아)에 접근한다’는 방식과 유사했다. 아데나워와 슈트레제만의 외교정책은 공히 ‘독일에 대한 위협은 동쪽의 소련으로부터 나오며 서쪽의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한 후 소련에 대응한다’는 국가 전략에 기초했다.

 제2차대전 패전 후의 아데나워와 1차대전 패전 후의 슈트레제만의 외교는 독일이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아데나워 외교의 중심은 환대서양(trans-atlantic) 관계, 즉 미국과의 관계 강화와 프랑스·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과의 경제협력 증진이었다. 핵무장한 소련으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서 서독은 미국으로부터 경제뿐 아니라 군사 지원도 받아야 했다. 아데나워는, 영국을 혐오한 슈트레제만과 달리 소련의 위협에 맞서려면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동맹이 긴요하다고 확신했다.

서독은 1950년 발의된 ‘슈망 플랜(Schuman Plan)’을 통해 패전국의 멍에를 벗었다. 슈망 플랜에 근거해 1951년 서독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참가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창설됐다. 서독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통해 해외시장을 확보했으며 경제를 계속 성장시키고 주권도 강화해나갈 수 있었다.


‘라인 강의 기적’… 국력 회복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진보 사민당(SPD) 쿠르트 슈마허 대표의 반대에 부딪혔다. 독일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 사민당은 ‘아데나워가 서독을 미국, 영국,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있다’고 비난하는 한편, 슈망 플랜 참가도 반대했다. 사민당은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이 서독을 미국 블록에 편입시킴으로써 독일 통일을 어렵게 할 것으로 내다봤으나 아데나워는 독일 통일은 유럽 질서가 근본적으로 변해야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데나워는 당장 분단된 독일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서독을 유럽에 통합시켜야만 통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아데나워는 1952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안한 ‘중립국 통일안’을 거부했다. 1950년 한반도에서 발생한 6·25전쟁은 서독에 기회로 작용했다.

6·25 전쟁 특수가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밑거름이 됐다. 6·25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주된 관심이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향하면서 유럽은 소련의 군사력에 그대로 노출됐다. 한반도 다음은 유럽이 아닌가 하는 공포가 서독 재무장에 대한 영국, 프랑스의 거부감을 희석시키면서 재무장 논의가 급진전됐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6·25전쟁이 발발한 후 개최된 뉴욕 외무장관 회담에서 서독 재무장에 합의했다. 서독은 1955년 5월 파리 조약 발효와 함께 군사 주권을 회복했으며 연방군을 조직하고 NATO에도 가입했다. 서독은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에도 가입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동·서독 분단이 더욱 굳어졌으나 서독이 라인 강의 기적에 힘입어 국력을 회복함에 따라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이 서독의 국제 지위를 인정해주는 한편, 독일 통일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국제 지위 회복이라는 1차 목표를 달성한 아데나워는 유라시아 대륙의 상황 변화에도 주목했다. 아데나워는 어느 나라 지도자보다 빨리 중·소 분쟁 진전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데나워는 1962년 3월 ‘르몽드’ 인터뷰에서 ‘소련이 중국을 큰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소련이 △6·25전쟁 △타이완 해협 위기 △중국의 대약진운동 등과 관련해 단순한 갈등을 넘어 적대 관계에 들어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중국 인구가 7억여 명이던 데 반해 소련 인구는 2억여 명에 불과했다. 중국의 거대한 잠재력에 주목한 아데나워는 1960년대 말 나타나는 미국-소련-중국 3각 구도를 예측해냈다.

또한 중소 분쟁이 서독을 포함한 유럽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련이 중국을 제압하려면 군사력을 동아시아에 집중시켜야 하므로 서독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 대해서는 온건하게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독일공산당 해산시켜

아데나워는 1962년과 1963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서독과 프랑스가 중소 분쟁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했다. 이 같은 국제 상황을 이용해 서독은 1963년 독일-프랑스 우호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와 동등한 국제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드골은 중국에도 접근한다. 소련으로 하여금 유럽에 더욱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프랑스와 중국은 1964년 1월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역사적 결정에 도달했다.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서독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국제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서방정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독일 통일로 가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아데나워의 다른 업적 중 하나는 서독 사회로 하여금 공산주의 대한 면역력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독일공산당(KPD)은 1949년 실시된 서독 총선에서 5.7%를 득표해 연방의회에 진출했으나 동독 공산당과의 연계를 의심받은 데다 스탈린을 옹호하는 실책을 저질러 1953년 총선에서는 겨우 2.2%를 득표해 연방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독일공산당은 1956년 연방헌법재판소에서 정당 활동이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반한다는 판결을 받아 해산됐다. 독일공산당 해산 과정에서 아데나워의 역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독일공산당을 계승한 독일평화연합(DFU)은 1961년 총선에서 1.9%, 1962년 노동자 집중 거주 지역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의회선거에서 2%를 득표하는 데 그쳐 연방은 물론 주 의회 진출에도 실패했다. 서독 사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이 확인된 것이다.

보수 정치인 아데나워가 이뤄놓은 △경제성장과 국제 지위 향상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 확보는 진보 정치인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독일은 경제성장과 함께 복지제도를 잘 갖춰 중산층 비율이 70% 넘었으며 이들은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1960년을 전후해 소련이 핵과 미사일 전력을 대폭 강화하면서 미국은 더 이상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보수 진영의 기민/기사연합(CDU/CSU)이 복지 등 진보정책을 대거 수용하자 정치적 위기에 몰린 진보 사민당은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전당대회를 계기로 이념 정당에서 탈피했으며, 아데나워 주도의 ‘서방정책’도 일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만, 아데나워의 서방정책은 독일의 분단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독재체제 아래 동독 주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약점도 갖고 있었다.


교역 통해 동독 주민 삶 개선

훗날 독일 통일의 책사로 평가되는 기자 출신 에곤 바르는 1963년 바이에른 주 휴양지에서 독일 통일을 향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구상했다. 바르는 모든 문제를 독일민족주의 프레임으로 생각했다. 바르는 보수 정치인 아데나워는 물론 진보 정치인 슈마허도 독일 분리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아데나워는 무엇이 독일의 국익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바르는 아데나워가 독일과 미국의 국익을 혼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 통일을 위한 조건들은 소련과 함께 가야만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동독을 흔들 것이 아니라 안정시켜야 소련과의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바르는 서독은 동독을 인정하고, 교역을 통해 동독 주민의 삶을 개선시켜 동·서독 간 정치·경제·문화적 유대를 증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는 이를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ehrung)’라는 말로 정리했다.

1968년 미국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이 당선됐으며, 닉슨의 외교 책사인 헨리 키신저는 프라하 사태(바르샤바 동맹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긴장 완화 정책을 취했다. 키신저는 이에 앞서 1964년 워싱턴에서 바르와 만났는데, 바르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독일민족주의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키신저는 바르를 비스마르크적 전통을 가진 독일민족주의자라고 생각했다.

1969년 사민당 출신으로는 최초로 총리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1960년 서베를린 시장 시절부터 함께 일해온 바르를 특임장관으로 기용했다. 바르는 미국과는 다소 거리를 두면서 소련에 접근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키신저는 소련이 서독의 동방정책을 활용할 수 있다고 봤으나 미국이 서독의 동방정책을 반대하면 서독과 서독 우방국들 간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동방정책이 베를린 문제에 대한 소련의 양보를 이끌어내 근 20년간이나 지속된 베를린 위기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브란트는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해 겨울비 내리는 바르샤바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키신저를 포함한 미국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서는 독일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 까닭이었다.

1972년 11월 ‘동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며, 동·서독 간 교류를 확대해나가자’는 내용의 기본조약이 동·서독 간 체결됐다. 기본조약은 동·서독의 교류를 촉진했다. 이산가족이 재결합하고, 동독인의 서독 이주도 일부 허용됐다. 동·서독 간 교류 확대는 서독에 대한 동독의 경제의존 증대로 이어졌다.

1982년 집권한 보수 기민당(CDU) 출신 헬무트 콜 총리는 바르가 창안한 동방정책의 틀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르는 콜을 만나 소련 비밀접촉선을 인수할 의향이 있는지 타진했다. 콜은 하루를 고민한 다음 넘겨받겠다고 답했다. 통일이라는 국익 앞에서는 좌파, 우파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콜은 동방정책과 반공주의 수사(rhetoric) 간 절묘한 조화를 시도했다.

콜은 동방정책의 틀 안에서 서방정책적 요소, 심지어 오데르-나이세선 이동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부하지 않았다. 콜은 동독에 대한 양보는 재정 지원으로 국한했다. 동독에 대한 재정 지원이 동독 경제는 물론 동독 정권 자체를 안정시킬 것이며, 독일 통일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콜은 모순된 정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 결국 독일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독에 대한 의존 심화

1980년대 말까지 동독인의 3분의 2, 서독인의 3분의 1이 상대국을 방문했다. 서독의 발전상을 목도한 동독인들은 귀환 후 동독 체제에 이전보다 비판적이 됐다. 서독은 마르크를 동·서독 간 거래 시 결제수단으로 삼았으며, 끝까지 이 원칙을 고수했다. 동·서독 간 무역은 1970년대 이후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으며 1984년 무렵에는 150억 마르크(1마르크는 약 0.5유로) 수준을 유지했다. 동·서독 간 경제협력 확대는 단기적으로는 동독을 안정시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독의 서독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이는 동독 정권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아데나워가 에르하르트의 도움으로 이뤄낸 독일 경제의 힘은 소련과의 통일 협상 때 강력하게 발휘됐다. 1990년을 전후로 소련은 생필품 부족 등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다. 서독은 1990년 1월 소련에 쇠고기, 돼지고기, 버터, 우유, 치즈 등 2억2000만 마르크 상당의 생필품을 제공했다.

콜은 훗날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실각할 경우 독일 통일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고 당시의 지원 배경을 설명했다. 그해 2월 콜은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서독·소련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고르바초프는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으면서 독일 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련의 경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1990년 5월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서독을 방문해 차관 제공 가능성을 타진했다. 콜은 즉시 호르스트 텔칙 외교보좌관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소련 측은 텔칙에게 15억~20억 루블 상당의 지원을 요청했다. 서독은 소련이 요청한 액수보다 많은 50억 마르크를 제공하겠다고 응답하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미해결 문제를 2+4 회담에서 마무리하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0년 7월 고르바초프의 고향 코카서스 스타브로폴에서 서독·소련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서독·소련 양국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과 동독 주둔 소련군의 3~4년 내 철수 등 8개 항에 합의했다. 서독 정부는 이로써 독일 통일의 걸림돌이 모두 제거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후 고르바초프는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 비용으로 170억~175억 마르크 지원을 요구했다.

콜은 그해 9월 고르바초프와의 통화에서 80억 마르크 제공을 제의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철수할 소련군을 위한 주택건설비로만 110억 마르크를 요구했다. 양국은 흥정 끝에 소련군 철수비용 120억 마르크에다 무이자 차관 30억 마르크를 추가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소련에 대한 생필품 지원 결정이 기대 이상의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비구름 뒤에 숨은 태양”

199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서독·소련 정상회담에 배석한 텔칙은 고르바초프가 “독일인 스스로가 어떤 길을 갈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단어 하나하나를 정확히 받아 적느라 손이 아팠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텔칙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만약, 당시 고르바초프가 1000억 마르크를 요구했다 해도 서독은 틀림없이 제공했을 것이다. 서독은 소련의 독일 통일 승인을 경제력으로 샀다.”

겐셔는 독일 통일을 “비구름 뒤에 숨은 태양이 잠깐 얼굴을 내민 짧은 순간을 움켜쥐어 달성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겐셔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 통일은 도둑처럼 온 것이 아니라 순간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서독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인내와 지혜가 만들어낸 결과다.

독일 통일은 아데나워(총리·보수)가 에르하르트(총리&경제장관·보수)와 함께 이룩한 경제력 및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바탕으로 바르(특임장관·진보)가 설계하고, 브란트(총리·진보)가 추진했으며, 슈미트(총리·진보)가 이를 더 단단히 하고, 콜(총리·보수)과 겐셔(외교장관·중도)가 종결지은 게르만 민족의 일대 과업이었다.

한국의 경우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에 경제적 기초를 만들었으며,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에는 노태우 시대에 시작된 북방정책(Nordpolitik)을 한층 더 발전시켜 중국과 북한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후 정부에선 북방정책의 흐름을 이어받되 상황 변화에 맞게 수정해 한반도 안정과 통일 기반을 구축했어야 했으나, 이 정부들의 정책은 오히려 1970년대 이전으로 역행하고 말았다. 북한을, 생존을 추구하는 존재로 이해해야 제대로 된 통일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5월 9일 대통령선거 이후 출범할 새 정부는 한반도 문제의 항구적 해결을 위한 외교안보정책을, 통일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재정립해, 트럼프의 등장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으로 인한 초불확실성 시대에 맞게 변용하되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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