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따뚜(tattoo)는 군대에서 귀영을 알리는 나팔소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군악연주란 의미도 파생됐다. 6·25전쟁 발발 50주년 되는 2000년 참전국 군악대를 모아 공연한 것이 계기가 돼 탄생한 원주국제따뚜는 이 지역의 대표 공연축제로 떠올랐다.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에서 매년 8월 한 달간 매일 밤 펼쳐지는 ‘로열 밀리터리 타투’의 아시아판을 꿈꾸며 2006년에는 4300석 규모의 전용 야외공연장까지 세웠다. 하지만 콘텐츠의 다각화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2010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이를 대신하기 위해 생겨난 축제가 ‘원주다이내믹댄싱카니발’이다. 올해 9월로 7회를 맞는 이 축제는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며 전국 지자체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화려한 수상 경력부터 보자. 2014년 강원도 우수지역축제 선정, 2015년 한국축제박람회 ‘최우수 축제 브랜드 상’ 수상, 2016년 ‘문화관광축제-유망축제’ 선정, 2017년 ‘문화관광축제-우수축제’ 선정…. 특히 문체부 유망축제로 선정된 뒤 불과 1년 만에 우수축제로 선정된 경우는 원주댄싱카니발이 최초라고 한다.
이번엔 숫자로 이를 검증해보자. 지난해 9월 20~24일 닷새간 이어진 이 축제를 찾은 방문객 추산 숫자는 47만5000명. 현재 강원도 최다 인구를 자랑하는 원주 인구 34만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원주국제따뚜 시절 방문객 숫자가 5만 명 안팎이던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그로 인한 경제유발 효과는 지난해만 344억 원으로 추산됐다. 따뚜 시절 예산이 연간 20억 원이었던 반면 댄싱카니발로 전환한 뒤 지난해 예산이 12억 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고무적이다.
국민연극 ‘라이어’의 어머니
불과 5년 사이에 이뤄진 이 변화로 인해 원주 시내 곳곳에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춤 연습이 펼쳐지고 있다. 한때 근엄하던 군사도시가 춤바람 도시가 됐다는 말까지 들린다. 그 춤바람 뒤에는 한 파란만장한 사내의 사연이 숨어 있다. 원주문화재단의 이재원 축제감독(47)이다.사실 그는 일반인에겐 낯선 존재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대학로 공연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이재원은 2000년대 대학로 흥행 돌풍의 핵이던 ‘라이어’ 1~3편을 제작한 파파프로덕션의 2인자였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16년째 대학로에서 공연되는 라이어 시리즈는 한때 대학로 3개 공연장에 서울 강남의 전용 공연장까지 마련하고 200만 이상의 관객몰이에 성공한 블록버스터급 연극이다. 파파프로덕션의 이현규 대표가 이를 발굴하고 한국적 공연으로 다듬어낸 ‘아버지’였다면 동갑내기 친구이던 이재원 이사는 그 성공가도를 보장한 인프라를 구축한 ‘어머니’였다.
이재원은 배우 출신으로 대학로 밑바닥에서부터 잔뼈가 굵어 셈이 빨랐고 술은 못 마셔도 친화력이 좋았다. 그래서 ‘라이어’의 대학로 안착에 1등 공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대학로 돈 돌아가는 시스템에 정통했기에 20명의 전속배우를 포함해 80여 명에게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월급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 전국 공연 유통 관계자들과 돈독한 인맥을 구축해 ‘라이어’ 공연 깃발이 대학로를 넘어 전국 곳곳에서 나부낄 수 있게 했다.
그렇게 파파프로덕션의 안방마님이 된 그는 ‘대학로의 현금지급기’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학로 기획자들이 자금난에 몰릴 때마다 S.O.S.를 치면 숨통이 트일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을 융통해주는 선심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경 돈 문제로 이 대표와 이 이사 관계에 금이 갔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결국 대학로에서 모습을 감췄다. 공연계에선 익숙한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에피소드의 하나인가 했는데 지난해부터 원주발(發) 공연축제 회오리바람의 주역이 바로 이재원이란 소리가 들려왔다.
기나긴 봄 가뭄을 달래주는 봄비가 하루 종일 내리던 4월 5일 식목일 초저녁 그를 만나기 위해 원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대학로에서 자취를 감춘 뒤 7년의 세월을 보낸 이 파란만장한 사내의 사연을 1박 2일에 걸쳐 들었다.
모든 것은 감자탕집에서 시작됐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한때 대학로에서 제일 잘나갔던 공연기획자는 그렇게 쫓겨나다시피 원주시 외곽에 내려와 허름한 감자탕집을 열었다. 공연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입에 풀칠을 해야겠다 싶어 음식 솜씨 좋은 여동생을 꼬드겨 같이 시작한 일이었다.“손님은 대부분 인근에서 농사짓는 어르신들이었어요. 순박한 분들인데 밥값을 계산 안 하고 가시는 경우가 있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밥그릇 안에 돈이 들어 있더라고요. 소주값 깜빡하고 가셔도 얼마 뒤 들러꼭 계산해주고 그렇게 정이 쌓이면서 가족 단위 단골도 생기고 저도 매일 한 끼는 감자탕으로 먹다 보니 살이 10㎏나 찌더군요. 몸도 맘도 편했지만 서울에서 함께 내려온 가족은 못 견뎌했고 결국 저 홀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났을까. 2011년 6월 원주에서 전국연극제가 열리게 됐다. 그런데 개막 두 달을 앞두고 원주시 관계자들이 그의 감자탕집에 들이닥쳤다. 10억 원이 넘는 예산을 받아 홍보하는 데 다 썼는데도 공연장이 텅텅 비게 생겨 발을 동동 구르다 서울에서 제법 유명한 공연기획자가 내려와 칩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공연 일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며 손사래쳤다. 하지만 딱 한 번만 도와달라는 절박한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순 없었다. 그래서 조건을 걸었다. 원래 3만2000석 전석 무료인 티켓 중 불요불급한 좌석을 빼고 2만8000석을 유료화하고 그 수익의 절반을 자신과 직원들에게 공평하게 나눠달라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원주시 조직위에서 이를 수용하자 그는 불과 두 달 만에 2만8000석 전석을 매진시켰다. 29년 된 전국연극제 사상 처음이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비법으로?
“아시잖아요, 공연기획이 뭐예요? 사기잖아요(웃음). 티켓이 한 30%쯤 팔렸을 때 ‘완판됐다’며 일체의 티켓예매를 중단했어요. 그러곤 ‘얼마 안 남은 잔여 티켓은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는 경우에 한해 살 수 있다’고 입소문을 냈죠. 그러자 ‘도대체 뭐길래’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아침 9시부터 사무실 앞에 길게 줄을 서기 시작하더니 결국 다 팔렸어요. 660석 극장 티켓을 보조석까지 860장이나 팔았으니까 말 다했죠.”
그러자 전국연극제 내내 관심을 보이지 않던 원창묵 원주시장이 갑자기 공연을 보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티켓이 동이 난 상황이라 유료관객 한 명의 티켓을 환불해주고 간신히 맨 뒷좌석 하나를 마련했다.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하필이면 그날 그 작품이 가장 재미없는 연극이었어요. 연극을 보고 나온 시장님이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으로 ‘내일 사무실로 좀 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시장실로 찾아갔더니 ‘도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 어떻게 이렇게 재미없는 공연을 유료로, 그것도 전석 매진시킬 수 있느냐’고 다그치더라고요. 그래서 제 이력을 설명하면서 ‘원주 시민이 이런 공연을 오랫동안 기다려오셨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는 설명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그날 이후 매일 공연을 보러 오시는 거예요. 매번 볼 때마다 재미는 없는데 객석은 꽉꽉 차고(웃음)….”당시 원주는 따뚜축제를 대신할 ‘원주다이내믹페스티벌’을 준비 중이었다. 따뚜 야외공연장에서 군부대의 탱크 쇼와 이러저러한 초청 공연을 결부한 동네 축제였다. 원 시장은 그에게 이 축제 준비를 도와달라고 했다. 축제기획안을 훑어본 이 감독은 바로 고사했다. 콘텐츠를 외부 초청공연으로 채우고 시민은 들러리로 세우는 축제라면 하나마나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감자탕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시 원 시장의 메신저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당시 예술감독이 찾아와 축제의 기본 개념까지 바꿀 수 있다고 설득해 다시 나섰다. 하지만 출근 첫날 시장 참석 프레젠테이션 때 기획안이 그대로인 것을 보고 폭발했다.
“차라리 그 돈 갖고 싸이 콘서트를 하세요. 그럼 최소한 돈은 벌 수 있을 겁니다.”
기존 축제 준비팀은 노발대발했고 그렇게 출근 첫날이 마지막 날이 됐다. 몇 개월 뒤 축제가 열렸는데 공연 도중 무대가 날아가 27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15억 예산을 들인 축제는 시민의 외면을 받은 채 끝났다.
그러자 이번엔 원창묵 시장이 직접 감자탕집으로 찾아왔다. 그래도 고개를 가로젓자 관련 국장과 과장이 계속 찾아오기 시작했다. 다시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적어도 3년은 제가 무슨 짓을 해도 버텨주겠다 약속하면 해보겠다.” 이는 수용됐고 그는 축제를 주관하는 원주문화재단 사무국장을 맡게 됐다. 이후 그는 원주시 문화사업협력관을 거쳐 현재는 원주문화재단 축제감독 겸 댄싱카니발 예술감독을 겸하고 있다.
맘껏 춤춰라, 당신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에겐 시민 참여 공연이 돼야 한다는 밑그림만 있을 뿐이었다.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하는 일본의 마쓰리와 브라질의 카니발을 벤치마킹했다. 상금을 내걸고 시민들이 단체로 참여하는 댄싱카니발을 구상했다. 돈 주고 프로팀을 데려올 생각은 아예 접었다. 오히려 참가비를 받기로 했다. 해외팀도 숙박비와 식비만 해결해주고 왕복항공료는 자체 부담케 하는 원칙을 세웠다. 한국 공연축제가 해외공연계의 봉으로 불리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가팀의 규모가 커야지 이를 보기 위해 원주를 찾는 방문객 숫자도 많아질 수 있다는 생각에 70명(현재는 50명) 이상의 단체로 제한했다. 최고상금 3000만 원을 건 것도 이때부터였다.
처음엔 전국에 있는 400여 개 무용학과에서 한 팀씩만 참여해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용학과 학생들에겐 입상 여부가 더 중요하지 축제 참여 자체는 별 메리트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추어 춤 동아리로 눈을 돌렸다. 전국 곳곳의 춤 동아리를 찾아다니며 홍보에 나섰다.
그 무렵 원 시장이 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네 맘대로 다 뜯어고치는 건 좋은데 내 임기 내에 성공한 축제 한 번은 꼭 보게 해달라.” 회심의 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댄싱카니발 경연은 원주 시내 중앙동 원일로 200m 거리에서 펼치기로 하고 따뚜 공연장에선 유료 기획공연을 준비했다. 1부는 원주의 꿩 설화(은혜 갚은 까치 설화의 원형)를 극화한 자체 연희공연이었고 2부는 이재원 감독의 인맥을 동원한 뮤지컬 갈라쇼였다.
2012년 9월 다이내믹페스티벌에서 다이내믹댄싱카니발로 바뀐 축제가 첫선을 보였다. 따뚜 공연장에서 유료 기획공연은 성공을 거뒀다. 닷새의 공연 기간에 4300석 객석 중 나흘은 80%만 팔렸지만 마지막 날은 전석 매진이었다.
“한국에 없는 공연축제”
하지만 이 감독이 주목한 것은 원일로에서 펼쳐진 댄싱카니발 경연이었다. 러시아에서 입소문을 듣고 참여한 3개 팀을 포함 45개 팀 4410명이 참여했다. 앙증맞은 초등학생부터 백발 노인까지, 군부대 병사들부터 러시아에서 온 금발 무용수까지 각양각색의 퍼레이드 공연이 펼쳐졌다.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높았지만 이를 보기 위해 운집한 관중의 반응이 더 뜨거웠다.첫 축제를 성공시켰지만 외부 초청공연에 의지하지 않고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는 축제,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에 없는 공연축제’로 가는 길은 아직 멀었다. 축제사무국부터 뜯어고쳤다. 5명의 직원이 똑같이 매달 150만 원을 나눠 받고 있었다. “일 중심의 조직이 아니라 임금 나눠 먹는 조직이었다”는 게 그의 판단. 최저연봉을 2200만 원으로 높이는 대신 성과에 따라 직급과 직책의 차별을 두고 그에 따라 연봉도 차별화했다. 축제가 성공할 때마다 인원을 계속 추가해 현재는 30명까지 늘었다. 또 공연 전문 인력을 필요 기간 동안 채용하는 전속 프로젝트 팀제를 도입했다. 그러자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2012년 축제 땐 ‘번외경기’였던 댄싱 경연대회를 ‘본경기’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원일로에서 펼쳐지는 댄싱경연 퍼레이드는 낮 시간대 일종의 리허설 무대로 삼고 저녁시간대 따뚜 공연장의 메인 공연으로 올리기로 한 것.
원주댄싱카니발의 최고 장관인 길이 120m, 폭 15m의 대형 가설무대도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했다. 따뚜 야외공연장의 무대 길이는 최장 40m. 군악대 퍼레이드가 펼쳐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마추어 댄싱팀을 위한 더 확실한 무대장치가 필요했다. 누군가 무대 너머 야외농구 코트를 비롯한 ‘젊음의 광장’을 가리키며 “가설무대를 저 끝까지 뽑아볼까요?”라고 했다. 이 감독은 무릎을 쳤다.
국내 최장 길이 무대가 그렇게 탄생했다. 2013년 이후 댄싱카니발 경연팀은 그렇게 마련된 120m 거리 가설무대를 횡단하며 5분간 공연을 펼쳐야 한다. 덕분에 관객 수도 따뚜 공연장 4300석(입석일 경우 7000여명 수용)에 젊음의 광장 양옆 임시객석 1만6000여 석(입석일 경우 3만 명 수용)으로 확장됐다. 좌석일 때는 2만, 입석일 경우엔 4만 가까운 인파가 운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폐막일엔 대형 LED화면으로 공연 현장을 중계하는 따뚜주차장 일대까지 합쳐서 7만 관중이 운집한다. 상상해보라, 2만 명 넘는 사람이 환호하는 가운데 웬만한 패션쇼 런웨이 길이의 3,4배 되는 거리를 각종 퍼포먼스로 채우며 가로지르는 기분이 어떨지.
“처음 무대에 선 분들은 무대에서 내려가자마자 대부분 쓰러져요. 엄청난 긴장감이 확 풀리니까 속된 말로 ‘오줌 지렸다’는 분도 많으시죠. 그런데 그 무대에 한 번 선 기분을 잊지 못해 매년 경연에 참여하는 팀도 많습니다.”
“한국서도 이런 게 정말 가능해?”
원주댄싱카니발에는 이렇게 상상으로만 가능하던 일들이 수시로 펼쳐진다. 1000명이나 되는 원주 시민이 하나 된 목소리로 합창하는 ‘1000명의 합창단’, 강원도 지역 불우청소년 250여 명에게 클래식 악기를 쥐여주고 오페라 가수 폴 포츠, 뮤지컬 스타 최정원 등과 협업무대를 펼치게 하는 ‘꿈의 오케스트라’, 평균연령 75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추는 포크댄스, 시골학교 전교생이 참여한 브라스밴드 공연….“경연대회 심사위원은 외부에서 모시고 와요. 다들 한번 보시라고. 대부분 저랑 인연 때문에 마지못해 오시는 경우가 많죠. 아마추어 공연 심사라는 생각에 별 기대를 안 하신 거죠. 그러다가 막상 무대를 보고 나면 눈이 휘둥그레지죠. 원래는 당일치기로 가려던 분도 ‘방 좀 잡아줄 수 없느냐’며 며칠씩 더 머물다 가곤 합니다.”
실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공연관계자들 반응도 비슷했다. 안호상 국립극장장은 “수많은 지방축제를 가봤지만 리우의 삼바축제를 연상시킬 만큼 그렇게 스펙터클한 무대는 처음 봤다”고 했다. 손상원 정동극장장은 “어, 한국에서도 정말 이런 게 가능한 거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고 말했다.
일반 시민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2012년 45개 팀 4410명의 참가자 숫자는 지난해 144개 팀 1만1477명으로 3배나 늘어났다. 무엇보다 원주지역 자체 참가팀이 꾸준히 늘었다. 처음엔 10여 개에 불과하던 원주시 춤 동아리가 댄싱 페스티벌이 생기면서 60여 개까지 늘어났고 그중 상당수는 매년 참여하고 있다. 그렇게 모시기 어렵던 무용학과 공연팀의 참가도 늘어 지난해 대상은 서울종합실용예술학교 학생팀 ‘일루젼’에 돌아갔다.
해외에서도 입소문이 나서 왕복 항공료를 자비 부담하는 참가자가 2012년 1개국 3개 팀 110명에서 2015년 13개국 42개 팀 1506명으로 늘어났다. 해외 참가팀 숫자가 5년 전 전체 참가팀 숫자와 맞먹게 된 것이다.
2013년 이후 무료공연으로 전환돼 정확한 관객 숫자 산정은 어렵지만 지난해의 경우 방문객 추산 수치가 47만 명을 돌파했다. 경제적 파급효과도 2012년 28억7000만 원에서 2016년 343억으로 10배 이상 치솟았다. 전국 지자체의 시선이 원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난해 카니발 때는 참관단을 파견한 지자체만 130곳에 달했다.
10년 단위로 변신한 산골소년
서울에서 내려온 공연전문가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 거라 치부해버릴 일일까. 사실 이 감독은 강원도 영월 출신이다. 원주 바로 옆 동네 산골마을에서 2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워낙 산골이라 학교를 가려면 20km씩 왕복 40km를 걸어 다녀야 했단다. 비가 많이 와 자칫 냇물이 불어 넘치면 하굣길 막힌다고 수업 중간에도 집으로 돌려보냈고 전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가 돼서야 들어왔다고 한다.고등학교는 원주에서 다녔는데 아버지가 고1 때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원주 시내서 한 연극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해 지방극단에 들어간 뒤 10년간 배우 생활을 했다. 1991년 무작정 상경해 극단 로뎀을 거쳐 극단 서전에 들어갔다. 반듯한 외모에 발성도 좋아서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리더’와 마당극 ‘봉이 김선달’, 국립극단의 ‘천명’에 잇따라 발탁되며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려 할 때 뜻밖의 시련이 닥쳤다. 1999년 연극 ‘편지’ 공연 도중 갑자기 무대공포증이 엄습한 것.
“그동안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무대 위에서 갑자기 덜덜 떨려 서 있기조차 힘든 거예요. 간신히 공연은 마쳤지만 이후 무대에 설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극단 기획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가 있는데 이현규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라이어’를 샘터파랑새극장에서 장기공연하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당시 박계배 샘터파랑새극장장은 극단 서전 대표이기도 했는데 배우 시절부터 아끼던 이재원 예술감독이 차기 기획공연을 위해 극장을 비워 둬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감독의 중재로 ‘라이어’는 파랑새극장에서 장기공연에 들어갈 수 있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 감독도 ‘라이어’ 시리즈의 배우 겸 기획자로 참여하게 됐다.
그렇게 공연기획자로서 10년 세월을 거칠 것 없이 달리다 다시 시련이 찾아와 원주로 내려오게 됐다. 그렇게 10년간 배우로, 두 번째 10년은 공연기획자로, 세 번째 10년은 공연축제 예술감독으로 변신을 거듭한 그의 인생사가 끝날 무렵 차마 묻지 못하던 심중일언을 던졌다. 2010년 대학로를 떠날 무렵 ‘횡령’이라는 말까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대학로 기획자들에게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준 게 문제가 됐어요. 대표 결재를 받지 않고 회삿돈을 마음대로 썼다는 거죠. 당시엔 대표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 전화로 구두결재 받고 처리한 거였는데 대표는 기억에 없다 하고, 제 도움을 받은 기획자들이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한 서류까지 내밀더라고요. 대학로에 들어온 뒤 제 모토가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자’였는데 그런 상황을 겪으니 만사가 허무하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제 맘속 한구석에 돈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제 수중의 재산 탈탈 털어 회사에 끼친 손해액이라는 걸 다 갚고 훌훌 떠난 거죠.”
‘아시아의 리우’를 꿈꾸는 원주
기나긴 인터뷰가 끝날 무렵 기자의 머릿속엔 영화 시나리오 하나가 절로 그려졌다. 세 갈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피날레를 장식하는 축제의 장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첫째는 한때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다가 추문에 휩쓸려 낙향한 중년의 공연기획자가 관료주의와 싸워가며 시민축제를 만들어가는 드라마다. 둘째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브라스밴드를 만들어가는 시골 초등학생들의 고군분투기다. 셋째는 시한부 인생을 남겨두고 춤에 대한 열정에 눈뜬 노인 커플의 눈물겨운 댄싱경연대회 참가기다.“원주댄싱카니발의 주인공은 제가 아닙니다. 매번 자신의 꿈과 이야기를 갖고 스스로의 무대를 만들러 오는 수많은 분이 주인공이죠. 객석에 앉아서 프로들의 공연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넘어서 다소 서툴더라도 자신들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가끔 원주 지역팀을 홀대한다고 불만을 토로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원주댄싱카니발은 제가 만드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직접 만드신 겁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주인 생색 내지 말자고 해서 그런 것인데 다시 바꿀까요?’”
그의 목표는 원주댄싱카니발을 아시아의 리우카니발로 키워내는 것. 아직도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그를 믿고 축제를 맡겨준 시장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낙마하면 축제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게다가 10년에 한 번씩 마(魔)가 끼는 이력도 있지 않은가.
“뜻이 좋으니까 운도 따라준 게 아닐까요. 제가 뭐 정치하겠다거나 돈 벌자고 이걸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바꾸고 ‘이게 맞다’ 싶으면 어떻게든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다 시장님께 불려가 혼날 때가 많았죠. 그럴 때면 예전엔 ‘지금 저 데리고 온 거 후회하는 거죠. 지금이라도 사표 쓸까요’라고 했죠(웃음). 요즘은 대놓고 그래요. ‘차라리 저를 자르세요. 저 오라는 데 많으니까 다른 곳에 가서 (댄싱카니발) 할 게요(웃음).”
권재현의 심중일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