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류 언론과 전쟁
- 외교예절 파괴…슈퍼파워 과시
- ‘망가진 방송인’에서 ‘좌충우돌 대통령’으로
대화와 타협, 배려와 금도를 지키려는 전통적인 미국 대통령상(像)을 트럼프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트럼프의 욕망과 목적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반대편과의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트럼프의 언행과 논리는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배려와 금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트럼프는 사건을 사건으로 덮고 스캔들을 스캔들로 덮는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논란과 충격의 연속이었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12개국이 6년 이상 조율한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단숨에 중단시켰다. 미국-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명령을 내렸으며, 화학무기를 사용한 시리아 정부군을 즉각 공습했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모든 뉴스는 가짜’라며 언론과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의 주류 언론과 우방 국가들은 트럼프에게 부정적이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장 글로벌기업들의 미국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LG전자도 미국에 세탁기 공장을 만들 계획이다. 아베 정부는 미국에다 7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미국 경제는 트럼프의 감세와 규제 완화, 이주기업 복귀, 신규 이민 제한 정책으로 주가가 상승하고 실업률이 감소하면서 경제지표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비주류 보수의 이단아
트럼프는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지만 그의 성향을 단순히 보수로 보기는 힘들다. 그는 9년 동안 민주당원이었으며 현실정치에 대해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는 비주류의 삶을 살아왔다. 트럼프가 여론의 십자포화에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 가난한 백인 유권자들의 절대적인 지지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 민주당원들이었다.트럼프는 좌우를 막론하고 거대 언론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도 언론에 대한 그의 적대 의식은 취임 이후 터져 나온 트럼프 정권의 러시아 유착설로 강화된다. 러시아가 X파일을 무기로 트럼프를 협박했고, 이에 겁에 질린 트럼프가 친러주의자가 됐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트럼프가 친러시아적 태도를 보인 것은 2013년보다 훨씬 이전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자신에 대한 섹스스캔들을 터뜨린 사람들에게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그런 협박을 했다면 그는 친러주의자에서 반러주의자로 바뀌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친러적 태도, 미국 국익이 우선이라는 대외정책은 지난 8년간 오바마 외교정책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것이다. 오바마는 집권 8년 동안 지독한 반러주의자였다. 힐러리와 오바마는 ‘푸틴 죽이기’에 매달렸다. 그런데 오바마는 중동 문제도 북한 핵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트럼프의 친러시아 정책은 오바마 8년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지 섹스비디오로 겁먹은 트럼프가 지어낸 정책이 아니다.
언론 대신 트위터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은 트럼프의 러시아 유착설을 퍼뜨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러시아와의 내통 의혹으로 낙마한 데 이어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마저 같은 이유로 언론의 사퇴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트럼프는 이 모든 배후에 언론과 오바마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론과의 전쟁’을 통해 자신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가 지지자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 한다. 실제로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 CNN, LA타임스 등 유력 매체의 기자들이 국정 현안을 설명하는 백악관 브리핑 때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은 언론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의회를 설득한다. 반면 트럼프는 언론과의 공생관계를 버리고 그의 특기인 트윗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 트럼프는 이미 후보 시절에 무려 2000만 명의 팔로어를 가진 ‘트윗’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여론을 만드는 데 큰 재미를 보았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에도 자신에 대한 공격에 트윗을 통해 반격하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고 있다. 제도 언론과 담을 쌓은 트럼프가 트윗과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한 여론 형성에 성공할지는 관심거리다.
언론과 우방국들 사이에 좌충우돌을 불사하는 트럼프가 노리는 것은 그에 대한 정치적 지지와 4년 뒤 선거다. 대통령 트럼프는 당선의 일등공신이자 정치적 기반인 미국 백인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이들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신기술을 두려워하며, 비용이 드는 환경보호에는 관심이 없다. 미국의 국제정치 개입도 반대한다.
트럼프는 2월 28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미국의 일자리를 되찾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이민·의료·통상·세제·규제 등 각종 정책을 ‘미국 우선주의’에 맞게 바꾸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제 ‘세계의 대통령’에서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오바마케어’ 폐지를 비롯해 기업을 위한 감세·규제개혁, 논란이 되고 있는 이민정책 개혁 등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임금을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트럼프의 좌충우돌식 정치는 오히려 그의 공약 이행에 청신호를 주고 있다. 미국 의회는 트럼프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묵시적 동조를 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여론과 이해 단체에 좌고우면한 오바마와 달리 트럼프는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공약을 밀어붙인다. 앞으로 트럼프가 제시하는 법안들이 공화당 의회에서 신속하게 집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가장 큰 장점은 일에 대한 집중력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소송이나 말싸움 어떤 종류의 논란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TV 리얼리티 쇼의 시청률 상승을 위해 광대짓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다. 만약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한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울 것이다. 대통령 트럼프에 관련된 소송은 아마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예적 요소들
트럼프는 목적 달성을 위한 ‘갑질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트럼프가 악수하는 장면만 봐도 정상적인 악수가 거의 없다. 상대방을 잡아당기거나 강하게 힘을 준다. 상대방에게 아쉬운 점이라도 있으면 무안할 정도로 오래 손을 잡고 있거나 두 손으로 상대의 손을 덮기도 한다. 이러한 악수법은 전형적으로 자신이 갑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이후 외국 정상과도 이러한 악수를 거리낌 없이 한다.‘갑질 리더십’은 목표 달성에 유리하다.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은 기분이 나쁘지만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전의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와 부딪치려면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데 차라리 조금 양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의회나 일부 언론에서는 벌써 이런 징조가 보인다.
트럼프는 단순히 ‘갑질’만 하는 악당은 아니다. 그의 갑질에는 연예적 요소도 강하다. 트럼프는 방송활동을 통해 ‘사이다 발언을’ 날리고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능숙하다. 청중에게 권위 있고 호소력 높은 강력한 목소리로 어필하고 출연자들이 그의 부하인 양 지시하면서 방송을 주도해나갔다. 넘치는 자신감, 자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강력하게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가 시청률 상승에 큰 몫을 했다. 대중은 메시지가 분명하고 대세를 주도하는 지도자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한방 먹었다
트럼프의 ‘갑질 리더십’은 예상치 못한 공격적인 수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허를 찌르며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이면 적은 균형을 잃고 수세에 몰린다. 예상을 깨고 비논리적으로 움직이면 그 효과는 더 커진다. 그는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며,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트럼프는 점잖게 ‘대통령답게 보이는 것(being presidential)’보다 마키아벨리스트에 가깝다.트럼프의 장기가 잘 발휘된 것은 사드의 전격적인 한국 배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는 한국의 새 대통령이 탄생하면 사드 배치 문제를 재론할 수 있다고 판단해 한국의 대선 이전에 사드 배치 완료는 물론 가동까지 시킴으로써 불가역적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에 사드 배치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진다. 집권 가능성이 높은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은 사드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다가 트럼프에게 한방 먹은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진보와 보수 중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한국의 안보적 가치와 경제적 협력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한반도 안정화라는 가치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한국은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며, 중국과 러시아의 도발을 억제하고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혈맹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한반도를 새롭게 바라보는 트럼프에게 한국은 전략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한국은 공짜 안보를 누리면서 미국 시장에서 큰 이익을 보고 있다고 트럼프는 생각한다.
트럼프는 앞으로도 한국과 다양한 이슈와 문제를 갖고 다투거나 협력할 가능성이 많다. 무엇보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입장 조율도 있고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중국과의 대결에서 한국을 자꾸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할수록 한국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은 예측 불가능한 갑질의 지도자인 트럼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두 가지 대안이 있다.
아베 참고하고 러시아 활용하라
첫째, 아베 모델이다. 아베 정권은 2016년 12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아베는 북방도서를 반환받기 위해 푸틴에게 총액 3000억 엔에 달하는 ‘8개 항목의 경제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금액은 부풀려진 것이고 다양한 조건이 달려 실제는 거의 집행되지 않고 있다. 2월 10일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아베는 일본이 투자해 수십만 명의 고용창출이 된다는 점을 부각해 트럼프의 체면을 한껏 세워주었지만 실제 실행 여부는 불확실하다. 트럼프가 중시하는 미국에서 일자리 창출 등을 제시해 일단 트럼프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아베 모델의 특징이다. 이행 여부는 조건에 조건을 달아서 천천히 집행해가면 되는 것이다.둘째,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러시아가 한국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면 푸틴은 트럼프를 설득할 수 있는 ‘카드’다. 지금 푸틴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러시아 극동 개발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의 투자환경이 워낙 열악해 중국이 에너지 분야에 투자하는 것을 제외하고 외국인 투자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트럼프에게 잘 보이려고 미국에 투자한 수백억 달러의 일부라도 한국이 극동에 투자한다면 푸틴은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최근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의혹과 측근들의 ‘러시아 내통’ 논란 등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