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인문학적 사고와 이공계적 사고가 함께 작동하는 인재를 찾아라

‘인문학적 인재’의 채용과 양성

  • 김상배│stephensbkim@yahoo.com e Teacher Group 히브리어 강사

    입력2011-11-22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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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업이 요구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란 단순히 인문계 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 과학기술 업무를 수행할 능력과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갖춘 인재를 뜻한다.
    • 이런 사람은 인문학과 이공학이 머릿속에 같이 들어 있어서 과학기술이나 인문학 한 가지만 알고 있는 사람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사고와 이공계적 사고가 함께 작동하는 인재를 찾아라
    “애플의 DNA에는 기술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애플의 기술은 리버럴 아트와 결합됐으며 인문학과 결합되어 우리 심장이 노래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던진 이 한마디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위력의 파장은 미국보다도 한국에서 더 강력하고 실감나게 퍼져가고 있다. 우선 삼성전자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뽑겠다고 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인문학이 기업 위기의 돌파구라는 연구보고를 내놓았다. 그리고 학계에서도 인문학을 첨단 과학기술에 융합하겠다는 말이 갑자기 많이 들린다.

    그전에 한국에서 융합이라고 하면 인지과학 혹은 IT 쪽에서 주로 과학자들끼리 하던 말로 여겼는데 잡스의 발언 이후 인문학이 갑자기 융합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인문학 교수도 거의 없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이하 융대원)에 가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찾겠다고 발표했다. 미국발(發) 잡스의 한마디에 모두들 갈팡질팡하며 서두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인문학 쪽에서 보면 인문학자가 모여서 사회를 향해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런 천덕꾸러기 인문학이 갑자기 기업의 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처럼 부각되고 인문학 전공자는 경영문제의 해결사처럼 되었다. 인문학에 몸담은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화가 나쁠 것은 없지만 마치 유명 부흥사가 “이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라고 한마디 한 걸 가지고 금방 복이 떨어질 것처럼 흥분하는 대중을 보는 것처럼 좀 안쓰럽고 불안하기도 하다.

    어떤 변화이든지 그 변화를 주도하는 자는 좋은 변화가 되도록 만들 책임이 있다. 기업이든 학교든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서 허둥거리지 말고 작금의 변화가 좋은 변화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인문학의 본질과 용도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해보고 합리적으로 적절하게 대처하자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취지다.



    인문학 인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삼성그룹이 갑자기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채용키로 한 데는 최근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한 이후 그동안 다소 관심이 적었던 소프트웨어에도 경쟁력을 갖추어야 되겠다는 경영적 판단을 내린 것이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와 함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전문가를 찾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스티브 잡스의 최근 발언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잡스의 발언은 첨단 과학기술업에 인문학을 도입하면 엄청난 대박을 터뜨릴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삼성에서도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찾되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겠다고 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조사에 응한 CEO 중에서 97.8%가 인문학적 소양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응답했으며, 82.7%는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채용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했다. 경영인들도 인문학 강좌에 많이 참석하고 있고 인문학 독서량도 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문학에 대한 기업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CEO는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하는 데 소극적이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5.7%의 CEO가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해 부서에 골고루 배치하고 1.2%는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해 별동대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으며, 9.6%는 외부 인문학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인문학적 소양이 기업경영에 중요하다는 공감대는 확산되고 있으나 정작 인문학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은 오리무중이다.

    삼성전자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300명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대 융대원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생 및 재학생을 상대로 취업설명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가 융대원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을 찾는 것은 이 두 곳이 첨단기술과 인문학을 융합한 교육을 실시하는 대표적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은 2005년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융합기술전문대학원이며 서울대 융대원은 카이스트의 뒤를 이어 2009년에 개원해 2011년에 안철수 교수를 원장으로 영입해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면 삼성전자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확보하려고 찾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과 서울대 융대원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은 다수의 인문학자를 교수요원으로 채용해서 교과과정을 통해 인문학이 융합될 수 있게 편성되어 있으므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서울대 융대원은 좀 다른 것 같다.

    인문학 대박?

    인문학적 사고와 이공계적 사고가 함께 작동하는 인재를 찾아라

    서울 서초동 삼성타운.

    융대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지식기반 경제사회가 점점 발전함에 따라 우리 사회는 물리, 화학, 수학 등의 기초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 사회, 생명과학, 의학, 공학 등이 학제적으로 통합된 현장 중심형 전문인력과 IT, BT, NT 등이 결합된 신생 융합기술 분야의 창의적 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이 진단에 따르면 융대원은 이공계와 인문계를 아우르는 융합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설립된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융대원은 “세계적 수준의 지식생산기지의 역할을 수행해 국가 미래 산업 분야의 신기술 개발을 선도하고,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창의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양성하고자” 설립된 교육기관이라고 소개문은 밝히고 있다.

    우리의 관심사인 인문학과 관련해 이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면 앞의 현실 진단 부분에서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필요성을 채워주기 위해 융대원이 어떻게 할 것이라는 부분에서는 인문학이 빠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융대원에 있는 4개의 학과 소개에도 인문학의 위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융합이란 말의 이론적 성격상 인문학이 구색 맞추기처럼 문구에는 들어가 있으나 실제 융대원이 융합을 실행할 때에는 인문학이 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인문학의 필요성을 언급한 융대원의 현실 진단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현재 상태의 융대원에서는 삼성전자가 원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삼성전자 인사팀이 무슨 생각으로 융대원을 찾는지 잘 모르겠지만 기업이 원하는 융합적 인재를 배출하기에는 융대원의 현 시스템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의 수요와 공급은 서구에서 시작된 새로운 현상인데 한국에서는 거름 지고 장에 가는 식으로 모방해보는 형편이다. 남이 한다고 하니 우리도 하기는 해야겠는데 기업이나 학교에서는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감지된다.

    물론 어떤 시도를 하든지 처음에는 잘 모르고 엉거주춤하게 따라 하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만큼 이것 자체를 문제시할 수는 없다. 과학과 인문학의 접목을 먼저 시도한 카이스트는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변화에 대처할 것으로 보이며, 삼성이나 융대원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기업과 학교가 이번 기회에 인문학 접목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만큼 앞으로 계속 추진한다면 언젠가는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의 어정쩡한 상태는 되도록 빨리 끝날수록 좋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찾는 기업과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려는 학교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성과를 앞당기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영에 인문학을 접목하기를 원하는 기업계에서는 우선 사람들이 인과관계에 대해서 잘못된 판단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떤 회사에서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했더니 대박을 터뜨렸다는 말의 배경은 인문학을 접목한 사건 다음에 대박이 난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문학을 접목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대박이 났다고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인문학은 이러한 생각이 반드시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물론 이 사실은 오늘날 인지과학이 좀 더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수백 년 전 흄이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이 설파한 내용이다. 대박이 난 이유는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다른 요인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회사에서 인문학을 접목한 후 대박이 났다면 인문학을 접목한 시점과 대박 난 시점 사이에 수많은 경영학적 판단, 판단에 따른 결정, 결정에 따른 실행이 있었을 것이며, 그 많은 판단과 결정과 실행 중에 어느 것이라도 대박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

    이와 같이 인과관계는 대단히 복잡하다. 이러한 복잡성을 대중은 싫어한다. 버스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복잡한 물리학적 설명이나 기계공학적 설명보다는 버스는 차장이 “오라이” 하는 힘으로 간다고 하는 것이 옛날 촌부들에게는 더 설득력 있게 먹혔다. 차장이 “오라이”라고 외친 다음에 버스가 움직였으니 둘 사이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시중에 나도는 성공한 인물이나 기업을 다룬 서적들에서 이러한 식의 엉터리 설명을 곧잘 본다. 이러한 단순함을 바로잡기 위해서 인문학적 사고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애플이나 구글이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서 인문학이 돈을 벌어줄 것이라거나, 삼성경제연구소가 인문학이 기업 위기 탈출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연구보고서를 냈다고 해서 인문학이 현재 자기 회사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만일 경영에 인문학을 도입해 엄청난 이익이 나고 기업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문학자들이 다 성공한 기업가가 되었을 것이며 산업계에 진출한 인문학자가 터뜨린 대박이 연일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인문학적 사고와 이공계적 사고가 함께 작동하는 인재를 찾아라
    그런데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업이 인문계 출신을 채용하거나 인문학을 접목해 원하는 효과를 얻으려면 먼저 인문학이 어떤 학문인지 그 본질부터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는 방대한 인문학을 논할 공간이 별로 없으므로 글의 목적에 맞는 몇 가지 사항만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인문학이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정의라는 말은 영어로 define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유한(finite)한 정의 대상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 경계를 분명히 해서 그 경계 너머에 있는 다른 것과 구별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통상 인문학을 자연과학과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정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정해서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인문학의 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전적 정의에 따라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프로그래밍 언어를 연구하는 것도 인문학일까? 철학이 인문학이라면, 물리학자가 양자역학을 설명하다가 철학적 주제를 논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그 물리학자는 인문학을 하는 것일까, 자연과학을 하는 것일까?

    무엇을 정의하는 것은 이와 같이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 이런 것도 적당히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 유명한 재즈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에게 한 기자가 재즈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Lady, if you have to ask, you‘ll never know” 라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재즈가 무엇인지 들어보면 아는 것이지 듣고도 몰라서 물어보아야 되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인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이런 식으로 슬쩍 넘어갈 수도 있겠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척 보면 알아야지 보고도 모르는 사람한테 설명해준다고 알겠어?” 또 다른 재치 있는 대답을 소개한다면, “경제학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경제학자가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이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인문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대답을 할 수 있겠다. “인문학은 인문학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대답의 장점은 항상 옳다는 것이며, 단점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대답에 따라 인문학자들이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면 인문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게 3년 정도 하다보면 풍월을 읊을 수도 있다.

    何必曰利

    그러면 인문학자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옛날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을 만났다(孟子見 梁惠王). 혜왕은 맹자를 보고 말하기를(王曰), “어른께서 천리를 마다 않고 왕림해주셨는데(不遠千里而來) 우리나라에 무슨 이가 있겠습니까(亦將有以利吾國乎)?”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맹자는 대답하여 말하기를(孟子對曰) “왕은 인이나 의 같은 좋은 것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를 말하십니까(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라고 질책했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지혜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그리스 철학의 원조로 인정받는 탈레스는 어느 날 별을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졌다. 이것을 본 한 하녀가 깔깔거리며 탈레스는 하늘에 있는 것은 잘 알면서 자기 발밑에 뭐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바보라고 놀렸다. 소크라테스(혹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린 플라톤)의 말과 같이 이와 같은 놀림은 모든 철학자와 인문학자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이처럼 저 위에 있는 무엇을 추구하기 때문에 구름 잡는 소리를 곧잘 한다. 그러므로 땅에서 이익을 남기는 법이나 회사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려는 사람이 인문학자를 찾아와 물으면 원하는 대답 대신 “何必曰利(하필왈리)?”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용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인문학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피폐해진 인간성을 회복해준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인문학에 종사하는 인문학자들은 자연과학이나 첨단기술이나 기업 경영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자들을 보면 그들이 이공계인이나 경영자와 비교될 만큼 더 인간적이고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카이스트의 인문학자인 전봉관 교수는 “‘인간이 어떤 존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하지만, 현재 제도권 인문학에서 그 해답을 명쾌하게 해명한 논문이 과연 몇 편이나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인문학계에서 그 해답을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인문학은 인간이 어떤 존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며 인문학자는 그런 문제의 해답을 얻을 목적으로 인문학을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인문학이 삶의 지혜를 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지혜에 관한 한 기업인 가운데 인문학자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더 많다. 인문학은 삶의 지혜를 제공해주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이 망가진 세상을 구원한다거나, 인간성을 회복해 준다거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길을 보여준다거나,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준다는 등의 통속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줄 것이 별로 없는 소용없는 학문이다. ‘소용없다’―영어로 ‘useless’ 그리스어로 ‘아크레스토스’라는 용어는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피아, 즉 지혜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인문학이 추구하는 소피아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삶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생활의 지혜나 살아갈 길을 물어보고 싶은 사람은 인문학자보다는 데일 카네기나 스티븐 코비나 앤서니 라빈스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인문학은 그런 종류의 지혜를 차원이 낮은 것으로 여겨 무시한다. 무릇 학자가 추구해야 할 소피아는 높은 차원의 지혜이며 실생활에는 소용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 그리스 사상의 토대를 이루며 서구 인문학의 사유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맹자가 남긴 ‘何必曰利’라는 말이 동양의 학문하는 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문학이 주는 즐거움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학문이 소용없는 학문임을, 특히 이윤을 남기고 경영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에 아무런 실제적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임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인문학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인문학 자체가 인류가 진정으로 성취해야 할 고고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하는 사람은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인과 같은 사람을 경멸한다. 인문학은 경영학과 같은 이익을 위한 학문이 아니며, 따라서 인문학은 경영문제의 해결을 위한 학문도 아니다. 인문학의 가치는 소용없음에 있으며 인문학자가 수천 년 동안 사회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 것도 이익을 멀리하며 쌀독에 쌀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비록 굶주리고 해어진 옷을 입으면서도 오직 소용없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문학 자체가 소용없는 학문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고대 시대부터 수많은 인문학자가 인문학으로 아무런 쓸모없는 일을 많이 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인문학은 실제로 거의 쓸모없는 학문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아무 소용도 없다는 인문학을 추구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학문 자체가 살아가는 데 아무 소용이 없더라도 인문학은 진정 평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을 하는 다른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스탠리 피시(Stanley Fish)라는 석학이 설명하기를 인문학자가 인문학을 하는 이유는 인문학이 주는 즐거움 때문이라고 했다. 공자는 공부하는 즐거움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수사의문문으로 표현했다. 인문학도가 이런 재미를 모르면 인문학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인문학도는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문학이 주는 재미 때문에 인문학을 하는 것이다.

    인문학을 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어떤 인문대학 학장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신입생들에게 플라톤이나 공자 책을 읽게 했더니 처음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당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지적 성취를 상당히 뿌듯해한다. 3~4학년 학생들이 1학년과 얘기해보곤 ‘야, 얘들 굉장하네’ ‘우리도 정신 차려야겠다’고 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플라톤과 공자를 읽은 후배를 보고 선배가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급생이라고 해서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 하면 후배보다 못한 선배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문학이 사람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인문학을 알면 더 나은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고 인문학을 모르면 더 못한 사람이 된다.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으면 인문학을 하라는 말이다. 인문학을 하면 선배나 그 누구 앞에서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인문학 지식을 통해 “내가 너보다 낫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삶에 실제적 도움을 주지는 못하는데도 인문학을 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인간의 깊은 욕구와 관련이 있다.

    반융합적 사고방식

    사람에게 있는 강한 욕구 중에 하나가 남보다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입는 옷을 따라 입고 그들이 들고 다니는 가방을 사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구입하려고 애를 쓴다. 하버드의 유명한 스티븐 핑커 같은 학자나 켄틴 벨이나 탐 울프 같은 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이 예술이나 인문학을 하는 심층 동기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자기를 화장하는 화장품이며 자기를 장식하는 장식품이며 자기의 신분을 보여주는 계급장이다.

    인문학 강좌에 몰리는 CEO들 중에도 이런 동기로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명품가방에 대해 가진 열정이나 인문학을 향한 열정이나 그 심리적 동기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돈 좀 생기면 자기 집안 서재를 인문학 서적으로 채우고 인문학적 소양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자기가 가진 돈을 사용해서 자기를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는 선비의 모습으로 꾸미고 싶은 것이다. 비록 자신이 지금은 사업을 하지만 천한 장사꾼이 아니라 사실은 선비 같은 사람이고 선비들처럼 서책을 가까이하고 선현의 글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문학을 배우는 것은 쓸모없는 인문학을 더욱 쓸모없이 만든다. 인문학을 이렇게 배워 이런 용도로 사용하면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기업 활동에도 백해무익하다. 인문학에 대한 이러한 특성을 알면 인문학으로 낭비하는 돈과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인문학 자체가 소용없는 학문은 아니다. 인문학도 제대로 쓰면 기업 활동이든 과학연구든 기술개발이든 용도가 많은 학문이다. 비록 인문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인문학을 소용없는 학문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같은 학문이라도 과학자나 기술자나 기업인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쓸모 있는 용도가 보일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한마디는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을 듣고 기업이나 학교에서 인문학을 접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접목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어떻게 경영에 접목하는 게 좋을까. 많은 사람이 인문학 전공자를 많이 채용해 그들에게 기업의 방향을 자문하거나 인문학 별동대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방안은 문제가 대단히 많다. 기업이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하려는 것은 좋으나 인문학 전공자라고 해서 업무에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무실에 앉아서 볼펜이나 종이를 잡고 하는 일은 문과 출신이 해야 되고 바깥에 나가서 레미콘 돌리고 나사 조이고 기름칠하는 일은 이공계 출신이 해야 된다는 채용 원칙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옛날에 글 모르는 사람이 문서로 된 일을 처리할 때 동네에 글 아는 사람을 찾아가서 부탁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하는 융합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인문계와 이공계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반융합적 사고방식 때문이며, 그것도 무식하고 미개한 전근대 사회에서 글하는 사람에게 문서처리를 부탁하던 방식을 아무런 반성 없이 고수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계 출신을 뽑아서 사무실 업무를 맡기거나 그들로 별동대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하는 방법으로는 대단히 전근대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과 이공학의 화학적 결합

    인문계와 이공계의 융합에 의한 창조적 사고는 한 회사에서 이공계 출신과 인문계 출신을 동시에 채용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융합은 물리적 결합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과 같은 것이다. 융합에 의한 창조적 사고는 인문계적 사고와 이공계적 사고가 한 사람의 머릿 속에서 경계선 없이 함께 작동되고 있을 때 일어난다.

    많은 사람이 애플의 예를 들지만, 애플의 경우 스티브 잡스 자신이 철학과 출신이고 천부적인 미학적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문학과 예술적 감각이 첨단기술과 함께 잡스라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 융합되어 창조적 아이디어로 나타난 것이다. 애플에는 이렇게 인문학과 첨단과학이 융합된 두뇌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란 단순히 인문계 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필요로 하는 첨단과학기술적 업무를 수행할 능력과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갖춘 인재를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인문학과 이공학이 머릿속에 같이 들어 있어서 화학적으로 결합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과학기술이나 인문학 한 가지만 알고 있는 사람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인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전공 간의 벽이 두껍지 않은 미국대학에서는 이런 인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 대학에서는 인문학과 첨단과학을 함께 전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놓고 있으며 또한 많은 학생이 전공을 두 개, 혹은 세 개까지 하기도 한다. 또한 미국 대학에는 수많은 한국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국내 대학 출신이라도 찾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우수한 융합적 인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성적증명서를 통해 이공계 출신이라도 인문학 과목을 많이 선택해 수강한 학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문계 출신이 이공계 과목을 선택해 수강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인문계 출신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을 채용해서 회사에서 업무교육을 철저히 시킨 다음에 일을 맡기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그러면 인문학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인문학이 접목된 사람이 회사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문학 전공자를 채용해서 사무실 서류처리와 같은 별도의 ‘인문계’ 업무를 맡기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제 대학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과학기술 전문가를 양산하는 방향으로 개선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카이스트에서 이미 인문학을 도입하고 있다. 학제 간 융합을 기치로 내건 서울대 융대원도 앞으로 인문학을 과학에 접목하는 일을 어떤 형태로든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카이스트와 서울대에서 이런 모범을 보인다면 앞으로 한국의 많은 대학이 따라갈 것이다. 미국에도 하버드에서 무엇을 하면 나머지 대학이 따라 하는 경향이 있다. 그와 같은 선도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과학기술 전문가를 배출하는 바람직한 시스템을 가지고 학교를 운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융합을 시도하는 학교에서는 인문학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우선 쉬운 방법은 과학 기술에 관심이 있고 장래성도 보이는 인문학 전공자를 선발해서 과학기술자로 육성하는 것이다. 인문계 출신이 대학원에서 첨단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일단 학생을 선발해서 교육 하다보면 인문계 출신도 잘 소화하고 따라오는 학생이 있을 것이고 이공계 출신이라도 어려워서 포기하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인문학을 직접 교육할 수도 있다. 기존 인문학부 각 과에 교수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부탁해서 가르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인문계 대학원에서 개설하는 인문학 과목을 수강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안의 장점은 사람이나 시설을 구하기 용이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종합대학에서는 개설되어 있는 기존 인문학 과목이나 인문학 교수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 또한 그런 교수들은 이미 인문학계에 자리 잡은 학자들이니 그들의 학문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학문의 유기적 연결

    그럼에도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인문학 과목이나 인문학자들에게는 이러한 장점과 함께 융합을 목표로 하는 기관에서 신중히 생각해야 할 문제들도 존재한다. 우선 인문대학에서 개설하는 인문학 과목은 인문대학의 필요에 맞춘 것이니만큼 융합과학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미흡한 내용일 수 있다. 또한 인문학자들도 융합과학도를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전공을 과도하게 구분하는 인문학자, 자기 견해에 대한 확신이 지나쳐 비판적 성찰이 부족한 인문학자,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해 과학은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나쁘고, 기술은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나쁘고, 기업은 이익만 추구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가치관을 가진 인문학자는 오히려 학생을 오도하고 창의성을 질식시킬 우려가 크다.

    학교가 융합을 목표로 했으면 가르치는 교수도 융합에 대한 동일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인문학 교수라도 이왕이면 과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으며 끊임없이 과학적 연구도 병행해 과학자들과 대화가 되는 사람이어야 장래 첨단과학자들에게 필요한 인문학 교육을 적절하게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융합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물론 한 사람이 모든 학문 영역을 다 공부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분야를 전공해 깊이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 목적은 자기 전공분야에서 학문 전체가 유기적으로 발전하도록 기여하는 데 있다. 오늘날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져서 한 가지 전공만 알고 있는 사람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학이 변화되어가는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각 분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 학문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다양한 전공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많이 나와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어야 학계가 시대적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문학계와 과학계에 도전을 안기고 있다. 과학기술자가 아무리 첨단을 달린다 하더라도 자기 분야밖에 모르면 곤란한 점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의 융합도 이공계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융합의 범위는 인문학까지 확대되어가고 있으므로 이공계인들도 인문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첨단과학을 하는 사람이 인문학적 소양을 풍부하게 가지게 되면 첨단과학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이공계나 경영학을 하는 사람들도 인문학을 좋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이 보존하고 있는 인류의 방대한 문화유산을 직접 만나서 접하게 되면 그들의 심장 박동이 달라지며 숨 쉬는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들은 인문학과 함께 걸으며 인문학과 함께 뛰며 인문학과 함께 춤출 것이다. 그들이 인문학을 접목해 개발해낼 제품은 많은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고 노래하고 춤추게 만들 것이다. 인문학 덕분에 과학기술자의 창의성은 배가될 것이며 콘텐츠는 무한해질 것이다. 첨단과학과 기술이 인문학을 만나 융합되면 그것은 과학기술의 세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인간 삶의 구석구석 모든 부분으로 날아가서 삶을 개선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적극 채용하는 기업이나 학제 간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학교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새 시대를 열어가고 주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문계와 이공계를 구분하고 차별대우하는 기업이나 옛날 생각만 하며 전공이 주는 안일함을 버리지 못하고 전공의 벽 안에서 안주하기를 고집하는 학교는 쓸모없는 졸업자를 배출하다가 새로운 시대에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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