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경제로 풀어쓴 현대사

美 경제제재 연타 맞다 진주만 카운터펀치

2차대전은 ‘경제전쟁’ / 일본편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美 경제제재 연타 맞다 진주만 카운터펀치

3/3
미국의 대반격

1929년 대공황 이후 전개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움직임도 영국의 식민지 경제권 특혜관세 규정, 즉 블록경제와 함께 일본에 위험요소로 작용했다. 미국은 1930년 자국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이른바 ‘스무트 홀리법안(Smoot-Hawley Tariff Bill)’을 통과시켰는데, 이에 따라 약 2만 개 농산물과 공산품을 중심으로 평균 관세율을 40% 이상 올렸다. 무역으로 성장을 일궈나가던 일본 처지에서는 대미수출이 급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 일본 전체 수출물량의 40%가 미국으로 집중되던 시기였다.

일본에서는 그 무렵 군부가 재벌과 짜고 의도적으로 전쟁 여론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 시기 일반 국민들도 빈부격차와 생활고 때문에 ‘차라리 전쟁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2차대전 후 미국 주도의 연합국사령부(GHQ)에 의해 해체되기 전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4대 재벌이던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가 전국 회사 불입자본의 무려 49.7%를 점할 정도였다.

당시 대졸자의 신입사원 초임이 50엔 전후이던 시절에 미쓰비시합자회사 사장은 그보다 1만 배 이상 많은 430만 엔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전 국민의 반수에 해당하는 1차산업 종사자도 절반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작농 신세여서 부(富)의 배분 문제로 인해 일본 내부적으로 사회여론이 극도로 악화됐다.

일본에서는 2차대전 발발, 즉 일본의 진주만 공격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미국의 석유금수 조치와 미국 내 일본 자산의 동결조치 2가지를 거론한다. 일본은 전체 석유 수입량의 70%를 의존하는 미국이 석유 공급을 끊겠다고 나서자 대체 유전이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해 공급기지로 만들려 했다.



부당한 침략행위에 대한 서방 연합의 비난과 긴장이 고조되자 ‘어차피 한번은 날 전쟁’이라는 생각에 기습적으로 선공(先攻)을 취했다는 것이 일본 우익진영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는 대부분 프랑스 식민지로, 일본에 대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항쟁을 지원해주는 일종의 보급기지 기능도 수행했으므로 일본이 침략에 대한 내부적 명분을 찾기도 쉬웠다.

지금도 ‘셰일가스 혁명’으로 에너지 자원 패권의 향방이 중동에서 미국으로 향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1차대전 후에도 미국은 석탄에서 석유의 시대로 이어지는 ‘에너지 혁명’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8세기 초반만 해도 전 세계 석탄 소비의 85%를 점하며 많은 석탄 광산을 보유한 영국의 힘이 약해진 것도 때마침 동력자원의 헤게모니가 석유로 넘어간 것과 관련이 깊다.

발생 열량이 석유의 60%에 그칠뿐더러 안전사고 노출 위험부담 때문에 선진국들의 자원시장은 급속히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갔다. 중동 개발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석유자원 공급은 거의 미국의 독무대였다.

‘日美開戰’ 어전회의

미국은 1859년 펜실베이니아 타이타스빌 유전에서 석유가 발견된 직후부터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등극했다. 2차대전 종전 때에도 세계 석유 수출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미국은 특히 유전 개발뿐 아니라 석유를 등유, 경유, 중유, 가솔린 등 여러 가지 제품에 맞춰 활용할 수 있는 최고도의 정제기술까지 보유했다. 가령 옥탄가가 높은 항공연료는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여간해서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이 1941년 7월 인도차이나 반도 습격을 감행하자 미국은 신속히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조치를 취했다. 무역대금 결제가 안 되고 돈이 돌지 않으면서 일본이 받았을 심각한 타격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전후 전범(戰犯) 단죄를 위해 열린 도쿄재판에서 쇼와(昭和)천황 측근으로 내무대신을 지낸 기도 고이치가 “역사상 경제봉쇄가 그처럼 대규모로, 또한 그렇게 의도적으로 면밀하게 실행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뉴욕에 국책은행 격이던 ‘요코하마정금은행(橫兵正金銀行)’ 지점을 두고 남미 및 동남아 지역을 대상으로 한 달러화 무역 거래를 총괄했다. 이 은행은 현재 일본 제1의 메가뱅크로 불리는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의 전신이다. 미국 당국의 자산동결정책으로 인해 돈의 움직임이 강제로 끊긴 것은 곧 일본의 국제무역 거래도 중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2000년대 초중반 북한이 조지 W 부시 정권에 ‘악의 축’ 국가로 지정되며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있던 예금자산이 동결된 것과 비슷한 조치로 볼 수 있다.

1941년 10월 24일 자산동결조치의 후속으로 요코하마정금은행의 폐쇄가 통보됐고, 이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1일 도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 ‘일미개전(日美開戰)’ 논의가 공식화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분 아래 한 달 뒤인 12월 7일 결국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다.

신동아 2015년 11월호

3/3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목록 닫기

美 경제제재 연타 맞다 진주만 카운터펀치

댓글 창 닫기

2022/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