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美·日 평양과 대화 시도… 구경꾼 될 순 없는 노릇

[한반도 지오그래픽] 각자도생 전략 경쟁으로 냉엄해지는 국제정세

  •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입력2023-08-0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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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화에 빗장 건 北, 南 빼고 다 푸나?

    • 중·러와 공조 유지되는 한 南과 대화 않을 듯

    • 尹, 유엔 연설서 北 거론 않은 첫 韓 대통령

    • 대북 접근 새롭게 할 필요 있어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호텔 내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뉴시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마치고 호텔 내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뉴시스]

    “한때 그 무슨 ‘운전자’를 자처하며 뭇사람들에게 의아를 선사하던 사람이 사라져버리니, 이제는 그에 절대 짝지지 않는 제멋에 사는 사람이 또 하나 나타나 권좌에 올라앉았다. (…)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다.”

    지난해 8월 18일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발표한 담화의 일부다. 윤석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담대한 구상’에 대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절대로 (남측을)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라며 남북 접촉에 대해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고도 했다.

    최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방북 추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외무성 국장 담화를 통해 “남조선의 그 어떤 인사의 입국도 허가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담화 말미에 “이러한 원칙과 방침은 불변하며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라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남북이 합의한 남북관계 특수성마저 저버리고 국제관계 일반성을 대남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물론 아예 접촉의 싹까지 잘라버리는 북한의 이 같은 기조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김정은의 하노이 트라우마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하노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이 기조는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대남·대외관계를 단절한 폐쇄 기조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 결렬, 이른바 ‘하노이 노딜’ 이후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정은에게 하노이 노딜은 ‘하노이 트라우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깊은 내상을 입힌 것이다.

    하노이 정상회담 당시 평양에서부터 열차를 달려 전 세계의 이목을 끈 김정은의 행보는 자신감 자체였다. 개선장군처럼 하노이에 입성한 뒤 회담 전날 참모들과 호텔방에서 회의하는 모습까지 공개했다. 비밀리에 회담 전략을 숙고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맡겨둔 걸 받으러 온 사람같이 행동했다. 회담장에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믹 멀베이니 비서실장 대행 세 명과 함께한 것에 비해 김정은은 김영철 당시 부위원장, 리용호 외무상 둘만 대동하고 나와 배석자 수를 맞추지 않는 파격을 보였다. 평생 협상과 설득이 필요 없던 김정은에게 복잡다단한 외교의 세계는 먼 나라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할 사항을 김정은은 2018년 9월 평양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먼저 제시했다. 9·19 평양공동선언 제5조 2항에 “미국이 6·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 조치를 계속 취해 나갈 용의”를 표명했던 것. 이는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보증수표를 써주고 중개를 요청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영변 핵시설 처리 문제를 기준 삼아 북·미 간 본격 비핵화 대화 중재가 시작됐고, 우여곡절 끝에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합의 결렬로 북·미관계는 꽁꽁 얼어붙었다.

    영변 핵시설 폐기 이외 추가 제안에 대해 탄력적으로 대응할 김정은의 플랜B는 없었던 듯하다. 만약 김정은이 영변 외 핵시설 폐기를 포함해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바 ‘영변 플러스 알파’ 제안을 받아들이고 유엔 대북제재 일부 해제를 이끌어내며 시간을 벌었다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핵시설 사찰 과정에서 지루한 공방이 펼쳐지고 합의 이행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겠지만 북한 처지에서는 시간도 벌고 일부 제재 해제를 통해 경제적 실익도 챙길 수 있었다.

    3대 세습 지도자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준비되지 못한 모습을 노출하고 결국 성과 없이 귀국길에 올랐다. 그래서인지 하노이로 출발했을 때의 의기양양하던 태도와 달리 귀국할 때는 야음을 틈타 한밤중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노이에서 빅딜까지는 몰라도 중간딜 정도라도 성과를 거뒀다면 평양 시내 퍼레이드라도 벌였을 텐데 그러하지 못했다.

    하노이에서 뺨 맞은 김정은은 서울을 향해 화내는 모습을 보였다. 하노이 노딜 이후인 2019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은 남측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미국에 대해서도 구체적 제재 완화 입장을 담은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했다. 미국은 묵묵부답이었다. 급기야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고 북한은 기약 없는 봉쇄에 들어갔다. 미국은 그해 11월 치러진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북한 문제는 외교 우선순위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새로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조건 없는 대화’를 내세웠지만 2019년 북한이 미국에 요구한 ‘새로운 계산법’에 대한 구체적 답은 듣지 못했다. 조건 없이 대화에 다시 나섰다가 빈털터리로 돌아오는 모험을 김정은은 감수하지 않았다. 대신 강대강(强對强) 노선을 선포하며 전술핵능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하노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핵무장 강화는 ‘대화’라는 선택지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더군다나 2022년 새로 등장한 윤석열 정부는 한미연합훈련을 확대하고 워싱턴선언을 통해 대북 확장억제를 한층 강하게 했다. 남북대화가 재개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중·러 공조가 유지되는 한 북측은 남측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기조를 유지할 공산이 크다. 하노이 트라우마에 빠진 김정은이 위안을 얻고 기대고 있는 것은 신냉전 프레임과 중국, 러시아와의 공조다. 현재의 국제질서를 신냉전과 다극체제로 규정하고,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부정하는 북한은 자신들을 포함한 민주주의 그룹 대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그룹 간의 대결 구도를 주장하며 북·중·러 규합에 편승하고 있다. ‘강대강’ 대결과 ‘정비례’ 대응을 내세우며 핵능력을 고도화하며 한미일 안보협력에 적극 대응하는 한편 자신들의 안전보장과 생존권, 제재 완화와 발전권 보장을 주장하는 것. 중국이나 러시아 외교 당국자들도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의 합리적 안보 우려를 해소해야 한다”며 녹음기를 틀 듯 똑같은 말을 반복하곤 한다.

    新냉전 프레임에 기댄 평양

    현재의 신냉전 프레임은 20세기 이념 중심 냉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신냉전은 이익 추구를 위한 각자도생의 전략 경쟁 특징이 강하다. 즉 중국과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북한을 지원하려 할지 알 수 없다. 단기적으로 북한이 한미일 안보협력 대척점에 서서 미사일 도발과 핵실험 위협으로 중국, 러시아와 함께 신냉전 프레임 대결의 첨병 구실을 할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중국, 러시아와 전면적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언젠가는 제공해야 한다. 만약 북한이 대결 국면 조성 외에 아무런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북이 현재 편승하고 있는 구(舊) 사회주의권 출신 권위주의 국가들 간의 협력 리그에서조차 언젠가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미·중 전략 경쟁이 신냉전 프레임 격화 일변도로만 가란 법은 없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연달아 “미국이 원하는 것은 중국과 무한경쟁을 벌이는 탈동조화 디커플링(decoupling)이 아니라 위험 제거 디리스킹(derisking)”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중국 측 반응도 주목해 봐야 한다. 리창 총리 등이 “디리스킹은 기업이 알아서 하는 일이며 중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야말로 리스크”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미·중 간에 큰 틀에서 디커플링보다 디리스킹 방향과 내용에 대한 논박이 오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미·중 간 이뤄진 최근의 고위급 접촉을 달갑게 보지 않는 북한은 대남 단절 기조를 유지하며 중국과 밀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9월 23일부터 열리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기간을 전후해 김정은이 방중한다면 북한의 대중 밀착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북한은 또한 대러 밀착 행보를 이어갈 공산이 크다. 바그너 용병 그룹이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격하며 푸틴 정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임천일 외무성 부상은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북한 주재 러시아대사를 만나 “무장반란 사건이 순조롭게 평정될 것”이라며 푸틴 정권 지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김정은은 러시아에서 벌어진 측근의 무장반란을 계기로 측근과 권력 엘리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사상 통제의 끈을 더욱 바짝 조일 공산이 크다. 이런 와중에 대남 대화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6월 19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6월 19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또 다른 변수는 미국과 일본의 대북 접촉 움직임이다. 블링컨 국무장관이 6월 19일 시진핑 주석 면담 과정에서 대북 영향력 행사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는 대북제재 이행뿐 아니라 중국에 북·미 대화 중재를 요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빙산의 일각만 드러나는 외교가의 공식 브리핑 관행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대만은 물론 한반도 상황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바이든 행정부 입장을 생각했을 때 미국이 중국에 북·미 대화 중재를 요청해도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한미동맹 특성상 미국이 한국 정부를 건너뛰고 중국을 통해 물밑으로 북한에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고 김정은이 하노이 트라우마를 딛고 다시 한번 북·미 대화에 나선다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 북한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걸 지켜만 보는 구경꾼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여기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북·일 대화 필요성을 진즉에 제기한 상태다.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6월 30일 ‘북한 납치 문제에 대한 온라인 유엔 심포지엄’에서 북·일 정상 간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정은이 정상적 지도자라면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활용해 북·중, 북·일 연쇄 정상회담 추진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중국과 미국, 일본과 모두 대화할 기회를 갖는다면 대남 대화 필요성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즉 미·일 대북 접촉이 구체화하면 북한의 대남 단절 기조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北 언급 않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

    지난해 9월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 대통령 중 유엔 연설에서 북한을 거론하지 않은 첫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6월 19일 국회 연설에서 북한을 언급하지 않았다. 여야 모두 현시점에 북한을 언급하지 않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새다.

    그럼에도 북한은 중국, 러시아와 더욱 밀착하고 있고, 미국과 일본은 대북 접촉 시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 대화에 빗장을 건 북측이 남측만 빼고 서서히 빗장을 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 도발과 8월 한미연합훈련 등 난제가 많아 평양이 당장 대화를 막고 있는 빗장을 풀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 정세를 예의주시할 필요성은 있다. 최소한 일반적 국제관계 차원에서라도 북한에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주변국 모두 대화를 시작하는데 특수한 대북 태도를 견지한답시고 구경꾼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각자도생의 전략 경쟁기를 맞아 한반도 정세는 더욱 냉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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