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심층연구 - 천안함 사건으로 본 군의 언론통제 역사

  • 조종혁|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 popmedia@hanmail.net|

    입력2010-06-03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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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여러 언론은 군을 질타했다. 군이 정보를 감추고 언론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다른 한편에선 정치권과 언론이 군사기밀을 적나라하게 공개해 안보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상반된 목소리도 나왔다.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행위가 잘못된 것일까. 천안함 사건은 안보위기 상황에서 군사기밀보호의 한계, 언론자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필자인 조종혁 교수는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군대의 언론통제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서 이 숙제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보내왔다.


    언론자유와 군사기밀보호는 대립적 관계다. 특히 이 둘은 전시(戰時) 상황에서 극명하게 충돌할 수 있다.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은 이 둘의 모순이 언제든 심각한 이슈로 불거질 수 있는 중대 사안임을 명증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군, 언론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정리된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나폴레옹, 영국 신문에서 기밀 캐내

    심층연구 - 천안함 사건으로 본 군의 언론통제 역사

    침몰 3일전인 4월23일 천안함의 항해모습.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페닌슐러전쟁 당시 영국 웰링턴의 군사작전 계획을 다름 아닌 영국 신문을 통해 알아냈다. 미국 육군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심리학자들로 하여금 나치독일의 라디오 방송내용을 분석하게 하여 독일군의 군사전략에 관한 유용한 정보 소스로 활용했다. 6·25전쟁 직후 미국 CIA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적국에 대한 주요 정보의 대부분은 적국의 매스미디어로부터 얻는다”고 술회한 바 있다.

    군사기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저 밖의 어딘가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특별한 정보들의 묶음이 아니다. 시간과 상황의 맥락에서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판단된 정보들의 묶음에 불과하다. 군사기밀은 태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군사기밀은 상대적인 측면도 있어 언론이 정의하는 군사기밀과 군이 정의하는 군사기밀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군사기밀은 무엇보다 시간과 상황의 산물이다. 이로 인해 어제의 군사기밀이 오늘엔 상식이 될 수 있다. A그룹이 정의하는 ‘사실 정보’가 B그룹에는 ‘역(逆)정보(사실과 정반대의 정보)’에 불과하거나, ‘과(誇) 정보(사실의 과장)’이거나, ‘비(非) 정보(날조된 정보)’로 판단될 수도 있다. 여기에 국가기관에 소속된 개인이나 조직의 정치적 동기가 작용하여 마땅히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할 정보에 ‘기밀’의 라벨이 붙기도 한다.

    군사기밀의 가치는 불확실성의 경감으로 측정된다. 적이 아군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을 경감시키는 정보일수록 그 정보는 아군에게 기밀의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역설적이지만 무엇이 군사기밀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는 궁극적 잣대는 우리 군도, 우리 언론도 아닌 적이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군의 초계함은 하픈 미사일을 탑재하고 있다’라는 정보는 객관적 검증이 가능한 사실적 정보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정보라면 군사기밀이 된다. 군사기밀 누설은 적군을 이롭게 하고 아군의 위험성을 증대시키므로 군사기밀의 보호는 당위성을 갖는다. 동시에 ‘알권리’와 ‘열린 아이디어의 시장’을 추구하는 민주사회의 언론관과는 충돌을 면하기 어렵다.

    美 언론의 자율적 보도통제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미국의 여러 사례에서 군사기밀의 통제를 에워싼 군과 언론의 관계가 반드시 모순적이거나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심각한 국가안위 문제가 대두될 경우 미국의 주류 언론이 관행적으로 ‘국가기구’의 기능을 ‘자율’적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군 당국도 무조건적 보도통제 대신 군사기밀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가이드라인의 제시에 동의하여 언론의 자율통제에 명분을 제공했다. 이처럼 언론이 자율적으로 접점을 찾아온 점은 천안함 사건으로 군과 언론 간 불신이 심화되는 우리의 상황과 대비되어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할 것이다.

    심층연구 - 천안함 사건으로 본 군의 언론통제 역사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한 6개국 33명이 2000년 6월 경기 파주시 통일공원의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를 찾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은 군사기밀의 통제를 위해 공보위원회를 창설하고 의장에 덕망 있는 현직 언론인인 조지 크릴을 임명했다. 크릴은 18개 항의 군사기밀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언론인에 의한 자율통제’를 고수했다. 이 위원회의 역할은 특정기사가 군사기밀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편집인의 질의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 가이드라인은 군부대의 배치상황과 이동, 해군함정의 항해경로, 해안 방어선의 위치, 군사목적의 실험에 관련된 정보를 기밀사항으로 제시하는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의회가 부여한 전시권한권(War Powers Act)을 행사하여 언론 및 통신에 관한 검열청을 발족시켰다. 루스벨트는 ‘AP통신’ 사장 브라이언 프라이스를 검열청 소장으로 임명하고 언론통제와 대(對) 적국 선전을 함께 관장하게 했다. 이 기구의 직원 수가 1만4462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미 정부가 전쟁관련 보도와 선전의 관리에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검열청이 제시한 군사기밀의 범주는 아군의 병력 규모와 군부대의 이동상황, 각종 함정의 이동경로와 침몰관련 사항, 항공 공습, 적군의 위치 추적, 일기예보, 적군의 손실 관련 소문, 적에 의해 사용 가능한 사진·도면·지도·아군 사상자 수 등이었다. 검열청의 소장 프라이스는 국가안보의 위험이 명약관화한(solid and reasonable) 경우에 한해서만 언론보도가 규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함으로써 미국 언론이 추구하는 자율통제의 관행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미 정부가 현직 언론인으로 하여금 언론통제 기구의 수장 직을 맡게 한 것은 주목되는 대목이다. 프라이스는 현직 언론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질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언론자유의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따라서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자유의 정신을 결코 위축시키지 않을 인물로 언론과 국민에게 받아들여졌다. 당시 미국 정부의 언론통제 정책이 얼마나 성공적이었고 언론과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이었는지는, 미 언론이 뉴멕시코 주에서 실행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을 사전에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도하지 않은 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어 미 언론은 미군의 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뒤 프라이스는 ‘특별 퓰리처상’을 받았다.

    맥아더의 ‘언론자유’ 실패

    심층연구 - 천안함 사건으로 본 군의 언론통제 역사

    6·25전쟁당시 북한측 기자단이 휴전회담장 부근을 서성이고 있다.

    그러나 미군의 언론자율통제 방식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6·25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맥아더 유엔 군사령관은 자신의 지론이던 언론자유를 천명했다. 그는 군사기밀의 보호 문제는 언론인의 자율적 통제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으로 믿었다. 6·25전쟁 초기 그가 제시한 군사기밀보호에 관한 가이드라인은 “언론은 적에게 ‘도움과 위안(aid and comfort)’이 되는 정보의 공개를 삼가야 한다”는 정도였다. 당시 전쟁 당사국인 한국의 언론은 북한군의 서울 점령으로 거의 기능이 와해되어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주로 미국 등 해외 언론에 적용되었다.

    맥아더의 가이드라인은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취재경쟁에 몰두한 기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기자들은 ‘도움과 위안의 경계’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그 결과 6·25전쟁에서 군과 언론은 밀월관계에서 출발하여 최악의 대립관계로 치닫는 양상을 보였다. 전쟁 발발 시 미 행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검열청을 가동하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이 어떤 형태의 언론통제도 혐오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시카고 선타임스’에 보낸 전문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 어떤 명확한 언론통제의 규정이라 해도 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다. 언론통제는 뉴스를 인쇄하는 언론인들 스스로의 사명감 그리고 이들의 자율적 의지에 의해서만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1950년 7월 AP통신의 램버트 기자와 ‘UP통신’의 캘리셔 기자가 적에게 도움과 위안이 되는 기사를 쓴다는 이유로 미8군으로부터 취재를 거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두 기자가 맥아더에게 취재거부의 취소를 직접 청원하자 맥아더는 언론인들이 적과의 심리전에서 막중한 책무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킨 후 군의 취재금지 명령을 취소시켰다. 같은 시기 8군사령관인 워커 장군은 ‘뉴욕헤럴드트리뷴’의 히긴스(여성) 기자의 한국 입국을 거부했다. 워커는 미 육군이 한국 전선에서 ‘여성용 화장실 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히긴스는 “한국의 야산에는 잡목이 무성해 그런 걱정이 필요 없다” 응수했다. 다시 맥아더가 개입하여 히긴스는 인천상륙작전을 취재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 ‘엠바고’ 깨지고

    6·25전쟁에 대한 미국 언론의 취재 열기는 엄청났다. 기자들은 보통 계급장 없는 군복에 자위 목적의 무장을 하고 병사들을 따라 전장을 이동했다. 이들에게는 미군 시설의 이용과 함께 장교의 예우가 주어졌다. 기자들은 단독 입수한 특종 기사, 르포 기사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1950년 7월 한 달 동안 6명의 미국 기자가 전투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는 저널리즘 역사상 전례가 없는 기록이다. 언론사 간 취재경쟁의 가열로 보도의 수위는 점차 군의 신경을 자극했다. 기자들은 군부대의 이동, 작전계획과 작전명령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보도하기 시작했다.

    맥아더의 공보장교 에콜스 대령의 자제요청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아군 사병들의 훈련부족과 장비결핍, 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의 목표의식 부재, 병사들의 정신적 공황상태, 조직화되지 못한 후퇴, 지휘관들의 실책에 대해 보도했다. 한편 북한군은 ‘벌거벗은 산등성을 누비는 전투의 대가’로 묘사되기도 했다. ‘뉴스위크’는 군부대의 이동상황에 관한 상세기사에서 “미 1기갑사단과 24, 25보병사단이 현재 전투에 임하고 있고 7보병사단은 일본에서 대기상태에 있으며 2보병사단과 1해병사단은 미 본토에서 이미 출발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도쿄의 맥아더 지휘본부와 미8군은 이런 보도는 명백하게 북한군에게 도움을 준다고 비난했다.

    1950년 9월15일 감행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일본 도쿄의 프레스클럽 기자들에게는 일명 ‘누구나 다 아는 작전(Operation Common Knowledge)’으로 통용되었다. 급기야 AP통신의 한국계 기자인 빌 신이 이 상륙작전계획을 본사에 타전하는 사건이 터졌다. 미군은 즉각 신 기자의 군부대 출입증을 회수했고 기사송고장비의 사용, 항공편의 사용, 기타 군 시설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맥아더 지휘본부는 ‘48시간 보도 지연’ 조건으로 인천상륙작전계획을 사전에 기자들에게 브리핑해야 했다. 이번에는 ‘뉴욕헤럴드트리뷴’의 비거트 기자가 ‘실수로’ 이 엠바고를 깨고 말았다. 전쟁의 명암을 가르고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습상륙작전이 이렇게 속절없이 언론에 노출되어 적에게 알려지는 위험한 상황을 맞은 것이다. 미국 기자들 사이에서 미국 언론의 자율통제 전통을 지키지 못한 데에 대한 자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군사기밀의 범위와 정의에 대한 혼란은 더욱 확산됐다.

    “언론보도는 넝마주의”

    유엔 군은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뒤집었지만 군과 언론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한국군과 유엔 군은 1950년 9월27일 서울을 수복했고 10월19일 평양을 탈환했다. 그러나 11월 중공군 30여 개 사단이 북한전선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험난한 후퇴가 시작됐다. 12월4일 중국 ‘북경 방송’은 미 해병 1사단의 전멸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때 유엔군의 패배에 대해 ‘미국이 경험한 최악의 패배’라고 썼다. 미국 언론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직후 곧바로 압록강으로 진격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시간을 허비했다고 비판했다. 언론은 또한 중공군의 참전 의도를 사전에 탐지하지 못한 맥아더의 정보능력 결핍을 꼬집었다. 그러자 맥아더의 정보책임자 찰스 윌로비 장군은 ‘코스모폴리탄’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 언론에 대해 ‘현대문학의 넝마주의’라고 비난했다.

    불행하게도 맥아더의 ‘전시(戰時) 언론자유’ 실험이 이렇게 실패로 귀결되어가면서 이는 엄청난 역풍, 즉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언론검열을 불렀다. 그 직접적 계기는 UP통신의 보도였다. 1950년 12월23일 이 통신사의 피터 웹 기자는 서울 근교에서 길가에 나뒹굴어진 워커 장군의 지프를 발견했다. 워커 장군은 육군 대위로 한국전선에 참전 중인 자신의 아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웹은 근처의 야전병원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워커 장군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부대로 돌아와 같은 회사 동료기자로 하여금 전화기 옆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본사 데스크에 이 소식을 알렸다. 동료 기자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이유는 옆에 있던 타 언론사 기자들이 송고 내용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날부터 맥아더는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기사에 대해 미 8군 언론보안부서의 사전검열과 허락을 받아 출고하도록 명령했다. 19개항의 검열규정은 아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평판을 떨어뜨리는 어떠한 정보와 내용도 금지했다. 위반시 기자는 취재지역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은 물론 군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음을 명시했다. 이로 인해 기자들은 유엔군의 ‘후퇴’라는 표현 대신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언론검열이 시작되면서 6·25전쟁의 진상은 있는 그대로 소상하게 세계에 알려질 수 없었다. 해외에 전해진 6·25전쟁의 이미지가 제2차 세계대전의 그것과는 다르게 오로지 파괴된 시가지,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어린이들, 소달구지를 따라가는 피난 행렬 등 대체로 흑백의 천편일률적인 부정적 이미지로 남아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1950년 7월26일부터 사흘에 걸쳐 발생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미국 언론의 사전 인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도될 수 없었다. 미 공군기의 공습을 피해 노근리 철교 밑 통로에 몸을 숨긴 부녀자와 어린이 등 300여 명의 시민은 사흘간 지속된 미 육군(제7 기갑사단 병력으로 추정)의 조준 기총사격으로 사망했다. 사건발생 2주 뒤 ‘CBS’의 에드워드 머로는 남한에서 발생한 ‘죽음의 골짜기’에 대해 “남한 사람들이 이 일을 영원히 용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멘트를 본사에 타전했다. 그러나 CBS는 이를 방송하지 않았다. 1950년 8월 발간된 잡지 ‘라이프’는 한 미군 장교의 “세상에…아이들까지 쏜다는 건 너무 지나치다”라는 말을 아주 짧게 인용했다. 1950년 9월30일자 ‘뉴욕타임스’는 남한의 양민들을 향해 발포한 미군의 ‘공황상태’를 비난하는 한 장교의 말을 구체적 설명 없이 언급했다. 노근리 학살 사건은 두 전직 AP통신 기자들의 탐사보도로 반세기가 지나서야 해외에 알려졌다.

    6·25전쟁에서 유엔군과 언론의 불화가 극에 달하면서 유엔군이 한반도로부터 완전 철수하는 방안까지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즉, 맥아더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의 완전철수를 계획하고 있다는 뉴스가 ‘시카고데일리뉴스’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맥아더의 공보담당 에콜스 대령은 훗날 키즈 비치 기자가 쓴 이 기사가 언론검열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고 술회했다. 처음에 맥아더는 한반도에서의 완전철수 계획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1년 4월 맥아더가 한국전선에서 해임된 후 비치 기자는 이 기사의 공급원이 다름 아닌 맥아더의 측근 장교임을 밝혔다. 트루먼 당시 대통령 역시 자서전에서 맥아더가 6·25전쟁을 국경 너머 중국 본토로 확전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차라리 한반도에서 완전철수를 희망했다고 썼다.

    트루먼에 의하면 맥아더는 일본 방어에 더 큰 주안점을 두었으며 언론의 비난과 계속되는 후퇴로 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저명한 언론인인 월터 리프먼도 유엔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철수하는 것이 대 중국 교섭에 유리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군과 언론의 갈등이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맥아더는 훗날 자서전 ‘의무, 명예, 국가’에서 한국으로부터의 완전 철수를 고려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과 미 합참이었다고 반박했다. 언론자유를 신봉하는 자신의 철학과는 달리 6·25전쟁에서 언론검열이 실시된 데 대해선 기자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했다.

    군사기밀 14건 보도 유감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하자 우리 언론은 군 관련 정보들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군도 언론도 이렇다 할 군사기밀보호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고 언론은 ‘단독 입수한 정보’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그 내용의 심층성, 정확성, 정보가치의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우리 언론이 보도한 천안함 관련 소식들은 군사기밀로 분류될 수도 있는 다음과 같은 사안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초계함인 천안함의 상세한 내부 구조(컴퓨터 그래픽과 다이어그램)

    적재무기의 종류와 함정 내 배치상황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무기의 화력 및 유효사거리

    함정의 최대 순항속도

    은폐와 엄폐를 위한 피항시의 이동경로

    근무 승조원의 숫자와 부여된 임무

    전투시 함장의 지휘위치 및 사격통제실의 위치

    비상시 통신망 및 지휘보고 체계

    적 잠수함 위치추적 및 교신 감청 능력

    해경 및 육해공군의 연합작전 능력 및 공조체계

    유사시 군과 정부기관의 정보처리 능력

    UDT/SEAL의 보유 장비와 해저탐색 능력 및 한계

    해군과 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해난 구조장비의 종류와 성능

    한미 정부당국의 반응과 공조체계

    정보는 다른 정보들과의 연결망에 의해 그 깊이를 더해나간다. 필자가 적시한 14건의 정보는 다른 정보들과의 수평적, 수직적 조합에 의해 우리 해군에 관한 상위의 크고 상세하고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할 것이다. 이 정보들이 공개할 필요가 있는 성질의 것이었는지 군과 언론은 자문해보아야 한다.

    천안함 침몰 후 정부기구의 대변인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군사기밀의 보도를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우리 해군이 현재 천안함과 같은 초계함을 20여 척 더 보유하고 있고 따라서 다른 병사들의 안위를 위해서도 천안함 관련 군사기밀의 보도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논지의 말을 했다. 그런데 이 대변인은 해군의 ‘동일한 초계함 20여 척 보유’ 상황을 스스로 공개한 셈이 됐다.

    국가안보를 초월한 언론자유의 추구는 무의미하다. 그런 정도의 언론자유를 갖는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언론인은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보도지침’과 같은 정치적 언론탄압의 잔상을 갖고 있어서 언론통제나 군사기밀이라는 어휘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오히려 이러한 조건반사적 반응을 경계해야 한다. 언론자유를 포함한 모든 민주주의적 가치는 탄탄한 국가안보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구현된다.

    이스라엘의 軍-言 협력

    우리의 안보상황에서 언론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군사기밀의 유출을 제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한국과 비슷한 정도의 언론자유를 누리면서도 효과적으로 군사기밀을 보호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스라엘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의 2008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언론자유는 세계 173개국 중 46위, 대한민국은 47위였다. 이스라엘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부·군·언론의 3자 협정에 의해 언론통제에 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후 군사기밀의 보호를 위한 전통과 관행을 쌓아왔다. 언론은 군사적 이슈에 관한 한 이 세 주체가 협의하여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준수한다. 이 가이드라인 중 괄목할 만한 점은 언론통제의 대상에서 ‘정치적 이슈’는 철저히 배제된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은 국가안보나 군사기밀보호 목적이 아닌 다른 어떤 정파적 목적의 보도통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통제와 관련한 분쟁이 발생하면 언론사는 3자위원회에 제소할 수 있고 판례는 대체로 언론사의 승리로 귀결된다.

    우리도 국가안보에 직결된 군사기밀의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모델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즉 언론, 군, 정부의 대표가 함께 참여하는 언론통제협의기구를 모색하고 언론사에 의한 자율통제의 전통을 확립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협의체가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은 천안함 사건과 같은 위중한 안보관련 상황에서 언론인들로 하여금 군사기밀의 범주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공유할 수 있게 하고 또한 그 보호수준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군의 ‘커뮤니케이션 전략’ 엉망

    여론은 지금 군이 운영하는 위기대응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 핵심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예컨대 지휘보고 체계의 결함, 의사결정의 장애, 언론통제의 미숙, 군 비판 보도의 양산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귀결된다. 전문적 커뮤니케이션 관리의 결핍은 군과 정부를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군은 내부뿐 아니라 언론과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매뉴얼을 수립해놓아야 한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위기를 상정한 상황별 가이드라인으로서 적에 대한 심리전이나 대국민 홍보를 위한 필수적 사안이다.

    심층연구 - 천안함 사건으로 본 군의 언론통제 역사
    趙 鍾 赫

    1947년 5월19일 충남 보령 출생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미국 애크런대 매스커뮤니케이션학 석사, 미국 미시간대 커뮤니케이션학 박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 조교수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 학장

    現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하이테크 전쟁과 매스미디어’‘6·25전쟁 당시 군의 언론통제(영문)’‘현실과 신화’‘적응과정의 커뮤니케이션 모드’ 외


    북한정권은 그들대로 심각한 안보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군의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북한군의 잠수함 전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북한정권이 처한 위험을 감소시키지는 못한다. 그 위험은 비군사적인 데에서 오기 때문이다. 군사력의 위협은 그것에 상응하는 군사력에 의해서, 무기체계에 의한 위협은 그것에 상응하는 무기체계에 의해 상쇄될 수 있다. 세계는 북한에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종용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럴 의도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핵무기의 포기를 세습정권의 포기이자 생존의 포기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북한 체제의 이러한 호전성은 역설적으로 북한정권이 남한의 ‘소프트 파워’에 강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북한 내부로 넘쳐흐르기 시작한 남한 관련 소식들은 북한정권의 유지에 핵무기 이상의 위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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