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아버지·할머니 살해한 대학생 심경 고백

“아버지는 내게 ‘벽’이었다”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4-09-03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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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6월10일 한 대학생이 자신의 아버지와 할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지금 세상과 유리된 채 감옥에서 회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으며, 현재 어떤 심경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와의 특별면회,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증언 등을 토대로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았다.
    괜찮아?”

    “잘 지내요.”

    “몸은?”

    “아픈 덴 없어요. 그냥 잠을 못 자요.”

    “...”



    잔뜩 찌푸린 하늘이 오락가락 비를 뿌리던 지난 8월13일. 유경미(가명·46)씨는 익숙지 않은 길을 손수 운전하느라 몇 차례 헤맨 끝에 어렵사리 성동구치소에 도착했다. 그는 수감중인 아들과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미처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눈물을 쏟았다. 수갑을 찬 채 담담한 얼굴빛으로 대답하던 이준원(가명·23)씨는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자 이내 표정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떨궜다.

    지난 6월11일 ‘대학교수·할머니 흉기 피살, 대학생 아들 범인 충격’ ‘대학생이 아버지·할머니 흉기 살해 후 방화’ ‘교수 아버지·칠순 할머니 패륜살인’ 등 충격적인 제목이 붙은 신문기사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씨. 여느 대학생과 전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그가 왜 그토록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것일까.

    충격적 존속살해 그리고 방화

    사건이 발생한 것은 하루 전인 6월10일. 분당소방서는 오후1시30분쯤 신고를 받고 분당 W아파트로 출동해 20여분만에 화재를 진화했다. 시커멓게 그을린 집안 거실에서 발견된 것은 뜻밖에도 2구의 사체. 곧바로 경찰이 달려왔고, 확인 결과 사체에선 수 차례 흉기에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사건 전날 준원씨는 자신의 후배와 술을 마시고 밤12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터질 것같은 통증에 시달린 그는 두통약 13알을 삼키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새벽3시,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준원씨는 자신의 방에 있던 스키 폴대에 흉기를 묶어맨 채 아버지 이민성(가명·48·당시 K대 경영학부 교수)씨가 잠든 안방으로 향했다.

    모로 누워 곤히 잠든 아버지의 목을 흉기로 찌르는 순간 아버지가 놀라 일어났다. 아버지와 아들은 스키 폴대 양쪽 끝을 잡고 몸싸움을 벌였다. 옆방에서 잠자던 준원씨의 할머니 전모(73)씨가 이교수의 비명을 듣고 거실로 뛰쳐나왔다. 당황한 준원씨는 부엌으로 달려가 흉기를 집어들고 나와 할머니를 찔렀다. 순식간에 아버지와 할머니를 살해한 준원씨는 피묻은 옷가지와 스키 폴대 등 범행에 사용된 물건 일체를 챙겨 숨긴 뒤 휘발유를 사들고 와 집안에 불을 질렀다. 모든 흔적이 깨끗이 지워지기만을 바라며….

    어머니 유씨의 울음으로 중단됐던 모자의 대화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요즘 무슨 생각하며 지내요?”

    필자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대신 잔뜩 긴장한 얼굴로 경계의 눈길을 보내던 준원씨는 어머니의 말에 비로소 경계심을 풀었다.

    “괜찮아,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하게 해. 속에 있는 말 참지 말고….”

    유씨는 지금까지 어머니인 자신에게조차 좀체 드러내지 않던 속내를 아들이 혹시라도 내비치지 않을까 싶어 안타깝게 아들의 얼굴을 지켜봤다. 그러나 준원씨의 대답은 짧았다.

    “죄송해요, 후회돼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필자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 자신한테 어떤 일이 닥칠 지 알아요?”

    “제가 어떻게 될 지 그런 거 생각 안 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워요….”

    복잡한 심경으로 말끝을 흐리던 준원씨는 “어머니와 동생이 걱정돼요. 동생이 보고 싶어요.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이라고 독백하듯 말했다.

    구치소로 향할 당시 “만나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던 유씨의 말처럼 준원씨는 사건과 관련한 언급을 피했다. 사건 이후 여러 차례 아들을 면회한 유씨는 아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직까지도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한없이 궁금했지만 차마 아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었다는 것.

    “준원이는 변호사에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덤덤하게 사건에 대해 털어놓더군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대요. 준원이가 제3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아이가 대체 왜 그랬는지, 그동안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도무지 말하려 들지 않아서 알 수가 없어요. 너무 답답해요.”

    준원씨는 경찰의 정신감정 의뢰로 5주 넘게 공주에 위치한 법무부치료감호소에 수감됐다가 8월초 성동구치소로 옮겨졌다. 당시 그를 정신감정한 담당의사는 준원씨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인격해리(人格解離)로 부분적 기억상실 증상을 보였습니다. 치료감호소에 수감된 초기엔 충격과 우울감이 큰 상태로 말을 하려 들지 않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한달 가량 시간이 지나서야 조금씩 입을 열었습니다.”

    인격해리(해리장애)는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무의식적인 충격이 정신에 영향을 끼쳐 인격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심각한 정도에 따라 부분 기억상실 또는 완전 기억상실 증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준원씨의 경우 자신의 힘이 아닌 제3의 힘이 자신에게 작용해서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담당의사는 “그런 현상을 흔히 귀신에 씌인 것 같다고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인격해리는 두려움이나 억압 등 강한 스트레스로 인해 비롯한다. 이런 극단적 상황이 오면 인간은 저항을 하거나 도피를 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억압이 너무 강해 두려운 나머지 도망을 못 가는 상황이 지속되면 억눌려 있던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상대를 향해 폭발한다. 이런 공격적인 충동이 자신을 향하면 자살로, 타인을 향하면 살인으로 귀결한다. 특히 이런 감정은 순식간 폭발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어머니 유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들을 만나기 위해 면회신청서를 제출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착잡한 표정을 보이던 유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궁합이 중요하다는 것 절감해요. 남편도 나도 서로 잘못 만난 것 같아요. 연애할 땐 그런 게 왜 안 보였을까. 남편도 좀더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여자 만났으면 잘 살았을 거고….”

    끝을 흐리는 말 속엔 유씨의 깊은 회한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이교수를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 나갔던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였다. 그 뒤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한 유씨는 친정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올렸다. 유씨의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했던 이유는 평범하지 않은 시댁 때문이었다. 시부모 될 사람들이 당시 별거상태였던 것. 이교수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사업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2남1녀의 어린 자식들을 두고 집을 나갔다. 때문에 이교수의 어머니가 직접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해 억척스레 돈을 모으고 아이들을 길러야 했다.

    “결혼 초부터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시어머니 표현을 빌자면 남편을 상감마마처럼 떠받들어야 했어요. 준원이를 낳은 직후였는데 시어머니는 바깥일을 하고, 남편은 전혀 육아나 집안 일에 도움을 주지 않아 아이가 백일이 지날 때까지 친정에 있었어요.”

    그후 이교수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아들 준원이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나선 유씨는 캐나다에서 연년생으로 아들(중 2년)과 딸(초교 6년)을 낳았고, 준원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무렵 다섯식구가 함께 귀국했다. 2년 전엔 대학 4학년 때부터 우울증을 앓아 정신병원을 수 차례 드나들던 시누이가 자살했다. 시누이와 지내다 혼자 남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게 된 유씨의 생활은 고달팠다.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은 그녀가 뒤늦게 얻은 두 아이를 돌보기도 벅찬 나날이었다.

    “시누이가 죽은 후 어머님이 몹시 불안정했어요. 기분이 하루에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했죠. 남편은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기분이 언짢으면 그 화살을 전부 제게로 돌렸어요. 그때마다 이제 너하고는 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어요.”

    유씨를 힘들게 한 또 하나는 시어머니의 의심이었다. “홀로 사시는 친정어머니 전세보증금 문제로 동생들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어요. 4형제가 500만원씩 보태자는 말을 주고받았는데 어머님이 그 얘기를 들으셨던 모양이에요. 남편한테 내가 돈을 몰래 빼돌려 친정에 보태주고 있다고 했답니다.”

    아슬아슬하고 어둡던 집안 분위기에 설상가상으로 이교수의 외도 문제가 보태졌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남편은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했어요. 거의 술로 지냈는데 이때 한 술집 여자를 만났어요.”

    처음 외도 사실을 알았을 때 유씨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너무도 당당하게 나왔다. “그 여자하고 있으면 내가 잘나 보이기 때문에 만난다. 네가 아무리 뭐라 해도 그 여자와의 관계는 내가 결정한다”는 남편의 말에 유씨는 그를 거의 포기했다.

    고부 갈등과 남편과의 불화. 아들만큼 기가 센 시어머니와 남편 사이에 끼여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태에서 유씨는 맏이인 준원씨를 남편에게 맡기고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지난해 12월 미국으로 향했다. “언니가 그 집에 그냥 있었으면 미쳤을 것”이란 여동생의 말이 유씨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준원이를 떼놓고 그때 미국 가는 게 아니었는데… 스물 세 살이나 됐으니 제 앞가림은 할 줄 알았던 제가 잘못이에요. 제가 아이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집을 비운 5개월새 시어머니와 남편, 준원이 사이에 무슨 일이 얼마나 있었는지, 아이가 엄마도 없이 혼자 속으로 얼마나 곪았을지 생각하니 기가 막힐 뿐이에요. 준원이가 말을 안하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씨가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준원씨와 이교수를 가장 가깝게 지켜본 사람은 그녀의 남동생이자 아이들의 외삼촌인 유영민(가명·38)씨다. 그는 “매형과는 종종 바둑도 두고, 준원이도 외국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봐왔습니다. 누구보다 매형의 상태를 잘 아는 제가 진작 그 집에서 준원이를 빼내 왔어야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건이 있기 한달 전, 이교수가 그를 술자리로 불러냈다. 유씨의 기억.

    “매형과의 술자리는 서너 시간은 가지요. 그런데 그날은 매형이 좀 이상했어요. 가족을 다 데리고 캐나다에 가서 살겠다며 진지하게 얘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희노애락이 다 순간이다’ 그래요. 갑자기 동료 교수를 두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어요. 그 교수가 자기 아들은 서울대 보내놓고 S대에 들어간 준원이의 입학 턱을 내라고 한다며 자기를 비웃었다고요. 술도 별로 안 취한 상태에서 밑도 끝도 없이 처가에 불을 지른다는 둥 횡설수설하는 겁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유씨는 다음날 둘째 누나와 여동생에게 전날의 일을 털어놓고 상의했다. 매형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준원씨를 그 집에서 빼내오는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친할머니를 두고 손자를 외가로 데려오기가 어색하고 마땅한 구실도 없어 결국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더욱이 할머니는 준원씨를 큰 손주라고 많이 예뻐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외삼촌 유씨는 그때 조카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됐다.

    “매형은 매사에 철저하고 꼼꼼해서 학자로는 좋은 성격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독선적이어서 비수같은 말을 할 때가 많았어요. 준원이를 야단칠 때는 머리나 볼을 툭툭 치면서 비아냥대는 투로 말하는데, 아무리 자식이고 아이지만 얼마나 모욕을 느꼈겠어요. 아마 이런 게 준원이한테 상처가 됐을 겁니다. 아이는 있는 대로 상처받았지만 정작 매형은 아무일 없다는 듯 아들을 대해요. 이런 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차라리 아버지한테 대들거나 집에서 도망쳐 버리지….”

    외삼촌 유씨에 따르면 준원씨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농구도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지금처럼 내성적이고 무기력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 변했어요. 집에 가보면 아이가 멍하니 TV만 보고 있는 거예요. 아무 의욕도 없고 자포자기한 아이 같았습니다.”

    외삼촌이 아버지와 자식 사이를 떼놓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부자간 감정의 골은 깊게 패여 있었다. 문제는 아들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아버지에게도 있었다. 이른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아들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준원씨 담당변호사의 설명.

    “주변 사람들을 만나본 결과 이교수는 장남인 준원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과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명문대를 나와 미국 유학을 거쳐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일류 코스만 밟은 엘리트 출신이어서 그랬겠죠. 더구나 이교수는 그 자신이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어머니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소 아들에게 ‘너는 왜 못하냐, 왜 노력을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많이 다그쳤던 게 갈등을 더욱 크게 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바라는 만큼의 능력이 안되고, 아버지는 그런 아이를 이해 못하면서 부자관계가 악화됐죠.”

    미국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밀려다니는 사이 준원씨는 사춘기 또래문화를 잃어버렸다. TV를 봐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게 되자 친구들과도 자연히 멀어졌다. 검정고시를 하느라 고교 시절도 인생에서 생략됐다. 미국이나 캐나다와는 너무 다른 한국의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준원씨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에도 점점 흥미를 잃었고 친구도 없이 혼자 방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에 대한 아버지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성적이 떨어진다고 심하게 질책받고 구두주걱이나 나무 몽둥이로 맞았던 것도 이 시기다. 어느날은 마루에서 잠을 자다 아버지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잘 수 있느냐고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래서 가출할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중학교 때 이미 3번의 가출 경험이 있었고 동네친구 집에서 자거나 집 근처의 빈 사무실에서 잔 적도 있었다. 이때부터 노골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됐지만 직접적인 표현은 하지 못했다.

    도피 갈망이 만든 ‘거짓말’

    담당변호사에 따르면 준원씨가 아버지에 대해 처음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수업 중 선생님이 생각나는 나라를 지도로 그려오라는 숙제를 냈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버지는 “지도책도 가져오지 않고 숙제를 하려 한다”며 화부터 냈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선 책을 모두 학교 사물함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사실을 이교수가 미처 몰랐던 것. 이후 아버지 앞에서 준원씨는 계속 주눅이 들어갔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도 아버지가 “스키장 가는 날”이라면 아무 소리도 못한 채 스키장으로 가야 했다.

    사춘기를 거친 후 대학생활을 하면서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준원씨의 마음은 ‘아버지를 없애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쪽으로 응어리져 갔다. 준원씨는 고교 입학시험을 국내에서 치른 직후 아버지 이교수의 판단에 따라 미국의 작은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국내에선 공부가 어렵다고 판단해 미국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곳에서 고등학교 한 학기를 다니고 여름방학 때 잠시 귀국했는데 비자가 재발급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국에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다시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준원씨의 기대는 무너지고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칼리지에 입학했다. 이때는 어머니와 두 동생과 동행했다. 그런데 준원씨는 이곳에서도 학교수업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교수의 호출을 받고 다시 국내로 돌아온 준원씨는 결국 삼수 끝에 토플 성적으로 S대에 특례입학했다. 그 과정에서 준원씨는 몹시 답답해했다.

    대학생활엔 흥미가 없어 학교성적은 계속 바닥을 헤맸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준원씨는 매우 평범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놀랍게도 그와 가까운 친구들은 준원씨의 생활을 사실과 전혀 다르게 알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준원씨가 학교에 몰고 왔던 아버지의 차가 준원씨의 차로, 있지도 않은 외제차는 어머니의 차로 둔갑했다. 또한 거주하는 집은 캐나다에서부터 알고 지내온 형과 함께 사는 80평형 아파트라고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형과 술집을 공동경영해서 큰돈을 벌었다” “여름방학 때 이탈리아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는 것도 준원씨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다. 담당변호사는 “준원이는 돈을 많이 벌고, 외국여행을 가고, 자유인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에게도 어떤 구속이든 싫고 집밖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꾸며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심리상태를 감정했던 치료감호소 담당의사의 견해.

    “현실 도피의 갈망, 스트레스와 우울감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색다른 스릴 혹은 사건으로 기쁨을 찾으려는 욕구가 강했다. 또 우울증 성향도 보였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쏟아지는 질책을 고스란히 당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커졌다. 가족과 친지들을 파악해보니 자살한 준원씨 고모는 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인 이교수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없어 확언하기 어렵지만 가벼운 조울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준원씨 할머니가 딸의 자살 후 보여준 변덕스런 증상도 조울증보다 약간 가벼운 정신장애로 보인다. 우울증이나 조울증은 유전성이 있다.”

    우울증은 흔히 의욕상실과 대인기피, 두통이나 식욕부진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구치소에 있는 준원씨의 현재 상태도 우울증에 가깝다고 담당의사는 보고 있다.

    대학생활마저 적응에 실패한 준원씨의 꿈은 ‘커피숍 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외삼촌 유씨는 매형이 살해되기 한달 전, 같이 술을 마시던 날 커피숍 얘기를 꺼냈다고 기억했다. 이교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자에게 커피숍이 돈 되는 사업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는 것. 그런데 준원씨는 이런 아버지의 생각을 몰랐던 것 같다고 유씨는 안타까워했다.

    한편 준원씨의 할머니는 손자가 바라는 대로 커피숍을 차려주려 했다. 올해 3월 애지중지하던 지방의 땅을 팔아 준원씨 앞으로 통장을 만들었다. 그 돈을 사업자금 몫으로 해놓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이교수는 준원씨에게 사업계획서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엉뚱하게 꼬였다. 담당변호사의 설명이다.

    “준원씨가 작성한 사업계획서라는 게 이탈리아 원두커피를 써서 한 잔에 1만5000원 받으면 원가가 50원이고 하루 100잔 팔면 월수입이 얼마라는 식이었다. 그걸 본 이교수가 흥분했다. ‘종업원도 없고 가게 운영비도 없지 않나? 이따위가 무슨 사업이냐, 거기에 생활태도도 제 멋대로니 가게는 꿈도 꾸지 말라’며 한심하다고 꾸짖었다.”

    이 일로 준원씨는 충격을 받아 좌절하고 만다. 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국 지난 6월20일 입대할 예정이었던 준원씨는 군대에 가게 된 것도 아버지가 자신을 한국으로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 여겼다. 거기에다 자신의 유일한 꿈마저 아버지에 의해 좌절되자 크게 절망했다. 군 제대 후에도 평생 아버지에게 끌려다니며 이렇게 숨막히게 살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커졌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여야 내가 살 것 같았다’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준원씨는 평소 아버지가 자신을 사람 취급 안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교수는 군복무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와 입영을 앞두고 친구들과 송별회 등으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 부쩍 많아진 준원씨와의 충돌은 사건이 있기 얼마전부터 더욱 잦아졌다. 외삼촌 유씨는 아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아버지의 무정함에 가슴아파했다.

    “매형은 자신이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입대에 대한 부담감이 어느 정도 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 준원이에게 규율이 엄격한 군대는 얼마나 중압감을 주는 대상이었겠는가. 이런저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술 먹고 늦는 것만 못마땅해하며 아이를 코너로 몰았다.”

    이즈음 준원씨는 아버지와 집안에서 가능한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교수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4시경이면 일어나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준원씨는 아버지가 잠든 뒤 귀가하고, 출근하면 일어났다.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고 잔소리도 지겨워서 그렇게 생활한 것이다.

    사건 발생 사흘 전, “생활태도가 한심하다”며 심하게 꾸중하던 이교수는 준원씨의 할머니가 집에 와서야 꾸중을 멈췄다. 이날 준원씨는 외식을 하자는 아버지의 제의를 뿌리치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집에 들어간 시각은 새벽3시. 서재에서 PC작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발견한 그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무섭다”고 말했다. 다음날 여자친구를 만난 준원씨는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사체만 처리할 수 있으면 연쇄살인을 잘 할 수 있을 텐테…”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후 후배를 만나 술을 마신 뒤 밤12시경 귀가한 준원씨는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느끼고 두통약을 삼켰다. 그리고 결국 새벽3시 아버지와 할머니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지난해 12월 이교수는 준원씨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겠다며 아내 유씨와 다른 두 아이를 미국으로 보냈었다. 그 뒤 불과 5개월만에 이교수는 장남과의 갈등을 끝내 풀지 못한 채 존속살해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뒤늦게 비보를 접하고 급히 한국에 온 어머니 유씨는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한번 안아볼 수조차 없었다.

    “준원이를 두고 미국으로 가는 게 아니었는데… 전부 내 잘못이다. 우리 아이가 엄청난 죄를 저지른 건 알지만 그래도 엄마니까 ‘내 아들을 살려달라’고 빌고 싶다. 제발 살려달라.” 남편과 시어머니를 죽인 ‘살인범 아들’에 대한 모정은 그저 눈물이 되어 흐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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