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출판물을 이념 전파의 진원지로 파악한 정권은 출판사·서점 등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서점과 출판사는 수시로 압수수색의 대상이 되었고, 공안기관은 멋대로 출판물을 압수해갔다. 심지어는 출판되지 않은 원고마저도 압수대상이 됐다. 서점 주인과 출판사 직원이 구속되는 것은 다반사였고, 이념서적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무거운 국가보안법 처벌 대상이었다. 공안기관은 정기적으로 불온도서 목록을 작성해 배포했고, 그에 근거해 압수 수색과 구속이 이루어졌다.”(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
정부의 간섭과 누름에도 불구하고 이념 서적들은 쏟아져 나왔다. 학생과 청년들은 그 책들을 돌려 읽으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눈떴다. 그때 금지됐던 수많은 책이 살아남았다. 반면에 금지의 권력을 휘두른 권력자들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예를 들면 ‘자본론’ ‘해방 전후사의 인식’ ‘페다고지’ ‘타는 목마름으로’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들은 대학가에서 널리 읽히는 대표적인 책들이다.
서점 주인까지 잡아갔던 신군부

진시황제
“당시의 정보부나 군 수사대에 끌려간 사람들의 취조 과정은 다 비슷했겠지요. 모든 것이 다 고문이지.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4명의 대공반 수사요원이 번갈아가면서 심문을 하지요. 자기들이 미리 짜놓고 요구하는 답변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같은 사항을 계속 반복해서 물어요. 자기들이 원하는 답변이 안 나오면 몇 백번이고 반복합니다. 결국 누구나 지쳐버리게 되지. 무지막지한 고문이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절대적 좌절감과 공포감에 빠지게 만들어요. 버틸 장사가 없어. 나흘 닷새 지나면 결국은 요구하는 대로 대충 쓰게 되지요.”(리영희 대담, ‘대화’)
리영희는 ‘공산주의자’로 조작되고, 그의 거의 모든 책은 금서로 묶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무수한 책이 금서로 묶였다. 이런 책들을 통해 많은 젊은이가 우리 사회의 변혁 주체로, 열혈 운동권 분자로 거듭났다. ‘사상의 은사’라는 명성을 얻은 리영희의 책들, 저항시인의 대명사였던 김지하의 시집들,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과 관련된 저작물들은 당연히 금서들이었다. 5공화국에 이어 6공화국이 들어서며 5공화국 시절의 일부 금서들이 해금되는 등 이념서적에 대한 규제가 다소 느슨해진다. 1988년 10월11일 당시 이종남 검찰총장은 북한의 실상을 단순 소개하거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해 객관적으로 해석한 책들도 더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발표한다. 일종의 유화정책이다.
그러나 그 뒤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바람을 타고 북한의 사상과 이념을 담은 책들이 쏟아지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념을 소개하는 책들이 무더기로 출판되자 공안권력은 크게 당황한다. 공안권력은 태도를 바꿔 수시로 출판사와 서점을 압수수색하고, 금서들을 수거해간다. 심지어는 진보의 색깔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학술서적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걸어 문제로 삼을 지경이었다. 1989년 1월부터 그해 7월까지 출판사 압수수색 93회, 서점 압수수색 21회, 출판관계자 구속 26명이나 됐다. 금서가 늘고 그것을 처벌하는 법들은 무거워지지만 금서들은 지하에서 더 활발하게 유통됐다. 권력의 힘이 누르면 누를수록 그 반동의 힘도 더욱 커진다는 뻔한 사실을 권력자들만 몰랐다. 전쟁과 분단 과정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많은 작가나 시인들의 책들도 1980년대 후반 해금조치되기 이전까지는 금서라는 족쇄를 벗을 수가 없었다. 1987년이 되어서야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용악, 오장환, 임화의 시들을 읽을 수 있고, 이기영, 박태원, 이태준, 김남천, 한설야의 소설들도 읽을 수 있었다. 비로소 반쪽짜리 문학사가 온전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