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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취재

양봉 농가 덮친 ‘꿀벌 에이즈’

확산 2년 만에 토종벌 멸종 위기

  • 송화선 기자│spring@donga.com

양봉 농가 덮친 ‘꿀벌 에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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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형 벌통

농민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약’과 ‘소독’에 매달리고 있다. 역시 지난해 대량 감염 사태 때 벌을 잃은 뒤 최근 종자벌을 구해 양봉을 재개한 전북 남원의 농민 모춘재씨는 “농가에 방문해도 좋으냐”는 질문에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8월 열린 농촌진흥청 설명회에서 최용수 연구사가 가장 강조한 것도 ‘예방’이다. 꿀병질병관리센터 매뉴얼에는 “애벌레가 한두 마리씩 떨어질 때 주저하지 말고 애벌레 있는 방을 잘라내 소각하라. 소각할 수 없으면 땅에 묻어라. … 떨어진 애벌레는 반드시 소각해야 한다. 감염된 애벌레 한 마리가 성봉(큰벌) 10만 마리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최용수 연구사는 나아가 애벌레가 벌집 밖으로 떨어지기 전부터 감염을 확인할 수 있는 개량형 벌통을 사용하라고 권했다. 전통적인 형태의 벌통은 벌집이 고정돼 있다. 반면 개량형 벌통은 벌집을 움직일 수 있어 농민이 벌통 내부 상황, 즉 여왕벌의 산란과 애벌레 감염 등을 살펴볼 수 있게 돼 있다.

분업을 바탕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꿀벌 사회에서 일벌이 담당하는 역할 중 하나는 청소다. 이 임무를 맡은 벌들은 애벌레나 성충이 벌통에서 죽을 경우 냄새와 부패를 막기 위해 신속히 사체를 벌통 밖으로 내다버린다. 꿀벌은 질병에 감염되거나 노쇠하면 스스로 밖에 나가 죽음을 맞는 습성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낭충봉아부패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통은 성충이 나가고, 새로 태어난 애벌레는 밖으로 버려져 결국 텅 비게 된다.

최 연구사는 “새로운 형태의 벌통을 사용하면 병에 걸린 애벌레를 발견하는 즉시 여왕벌을 격리시킬 수 있다. 이렇게 열흘 정도 산란을 막아 새로운 애벌레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고, 이미 감염된 애벌레를 제거하면 벌통의 바이러스 밀도가 크게 감소해 추가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농촌진흥청이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충북 충주에서 이런 방식으로 벌통을 관리한 결과,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6개 모두 추가 감염률이 0%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청이 “토종벌을 구할 획기적인 대책”이라고 밝히고 전국 농민들을 대상으로 설명회까지 연 이유다. 이에 대해 농민 김미연씨는 “전에도 벌통을 바꾸라는 말을 듣고 개량형 벌통을 구입해 벌들을 옮겨줬지만 다시 감염된 적이 있다. 이번엔 효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2007, 2008년부터 뭔가 이상한 병이 돈다는 소문이 파다했어요. 벌은 죽어나가고, 원인은 알 수 없고…. 안 해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이 정부가 나서서 벌 기르는 법을 알려준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김미연씨의 말이다. 농민들은 바이러스 확인 2년 만에 국내 토종벌산업이 사실상 붕괴하다시피 한 데는 정부의 책임이 작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전국 토종벌의 90%가 사라진 뒤에야 낭충봉아부패병을 가축전염병으로 고시했다. 지난해 9월 240억원 규모의 저금리 융자, 기술교육비 지원, 방역체계 구축 등을 대책으로 내놓았을 때는 이미 상당수 농민에게 방역할 벌통조차 없는 상태였다.

2차 피해 확산

양봉 농가 덮친 ‘꿀벌 에이즈’

국내 토종벌 분야 유일의 신지식인인 김대립씨가 벌통을 들고 있는 모습. 그의 농가도 낭충봉아부패병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농민들은 정부가 피해 보상에 소극적이라는 점에도 분노한다. 현행법상 가축이 태풍 풍수 혹한 등의 현상으로 떠내려가거나 동사할 경우 자연재해로 인정받아 피해액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토종벌 폐사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게 정부의 해석이다. 농민들이 조직한 한국토봉협회 자체 조사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우리나라 토종벌은 33만6780통. 2010년 말 기준으로 이중 93%가 피해를 보았다. 현재 이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 몫이다. 충북에서 토종벌을 기르는 농민 윤동섭씨는 “정부가 초기 방역에 실패함으로써 피해를 확산시킨 데 대한 책임은 왜 지지 않나. 만약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퍼질 때까지 정부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 한우 농가가 큰 피해를 보았어도 이렇게 했겠는가. 똑같은 농민을 근거 없이 차별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토종벌 농가에 큰 타격을 입힌 낭충봉아부패병은 과수·채소·화훼농가 등에 2차 피해도 주고 있다. 식물의 약 40%는 곤충의 수분(受粉)작용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 수분의 80%는 꿀벌이 담당한다. 세계 100대 농작물의 71%가 꿀벌을 통해 수정된다는 통계도 있다. 꿀벌이 줄어들면 당장 농업에 차질이 생기는 셈이다. 2008년 안동대 조사 결과 우리 농업에서 꿀벌이 수분 작용에 기여하는 경제적 가치는 약 6조원으로 평가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 과일·채소류 가격이 폭등했을 때부터 농민들 사이에서는 “토종벌 집단폐사가 원인일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올해는 그 양상이 훨씬 뚜렷하다. 전국 배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전남 나주배 농가 중 상당수가 올해 꽃가루를 구입해 인공 수분을 실시했다. 중국산 가격이 1㎏당 200만원에 달할 만큼 추가 비용이 막대했지만 착과율은 자연 수분 때만 못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강원도 춘천의 사과 농가도 비상이다. 춘천시농업기술센터가 지난봄 사과 재배농가의 개화 상황을 표본 조사한 결과 1000㎡당 평균 꽃 수는 1만2800개로 전년의 60% 수준에 그쳤다. 전국 매실 생산량의 약 30%가 나오는 전남 광양 매실 농가도 과실 수가 예년보다 줄어들었다. 농민 김대립씨는 “대추를 기르는 농민에게서 올해 대추가 유난히 안 열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벌 때문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온 건 아니지만, 모든 과일이 안 되는 건 사실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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