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5년 영국 의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가이 포크스의 초상화.
어나니머스는 상설 조직도, 규약도 없다. 당연히 직위도 없고 위계질서도 없다. 따라서 누구 말을 들을 필요도, 복종할 이유도 없다. 인터넷상에서 누가 해킹을 제안했을 때 그저 동참하면 된다. 어떤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해킹에 성공하면 어나니머스란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게 전부다. 따라서 어나니머스는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다분히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느 조직처럼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자유와 개방이라는 가치만을 공유할 뿐이다. 모든 간섭과 검열 반대를 주장하고자 해킹을 시도한다.
어나니머스의 가공할 파괴력은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만들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해커가 동시다발적으로 힘을 합쳐 기존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것. 흡사 모래폭풍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켜버리지만, 얼마 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조용히 가라앉는다. 모든 행위는 철저하게 개인 중심으로 이뤄진다. 어나니머스에서 활약하는 일부 해커들은 “어나니머스를 믿고, 스스로 어나니머스라고 생각한다면, 어나니머스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원 제약이 없으니 누구나 어나니머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단체(group)라기보다는 운동(movement)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미국, 영국 등 서구권 젊은이들이 주도했지만, 지금은 아시아·중남미를 비롯해 세계 전역에서 어나니머스에 참여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으로 대표되는 정보감시 사회가 철저한 통제와 감시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면 어나니머스는 반대로 통제 불능과 자유를 기반으로 존재한다. 리눅스의 오픈소스 주장과도 일맥상통하고, 정보사회주의나 전자민주주의(e-democracy)를 지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신념 내걸어 범죄 합리화

국군기무사령부가 5월 2일 국군 기무학교에서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후원으로 ‘제7회 국방 해킹 방어대회’를 개최했다. 육·해·공군에서 최고 수준의 해킹방어 요원들이 참가해 기량을 겨뤘다.
어나니머스의 활동 대부분은 범죄행위다. 한국에서의 해킹도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비롯해 여러 실정 법규를 위반한 것이다. 그들이 그간 저지른 짓은 재론할 여지 없는 사이버 범죄다.
혁명을 꿈꾸는 자에게 범죄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되는 것처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미국 오클라호마 청사 테러나 9·11 테러에 대해 그 어떤 합리화도 군색한 변명과 핑계가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테러가 혁명의 수단으로 인정받으려면 사회통념에 근거한 보편타당한 이유와 함께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버 테러도 마찬가지다.
사이버 범죄는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비대면성, 익명성, 전문성, 시간·공간의 초월성을 철저하게 활용한다. 특히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비대면성, 누군지 알 수 없는 익명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대담한 행위를 하게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자신의 얼굴과 이름, 신분 등 정체를 노출하지 않을 수 있는 터라 죄를 저지를 때 이점이 있는 것이다. 실력을 갖춘 해커라면 침입 로그 기록 삭제나 IP 변조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발 가능성을 낮춘다는 것은 처벌받을 확률이 떨어짐을 의미한다. 처벌받을 걱정이 줄면 범죄는 증가한다.
더욱이 사이버 범죄는 직접 다른 나라에 가지 않더라도 그 나라 사람 기관 조직을 대상으로 범죄를 할 수 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언제라도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고 범죄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이 사이버 범죄의 특성이다. 일반 범죄와 달리 막상 피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범죄 발생 사실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당연히 목격자 확보도 어렵다. 그래서 사이버 범죄의 수사는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고,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갖춘 수사 인력을 요구한다.
사이버 범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데서 오는 간편성과 달리 폐해는 일반 범죄보다 심각하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강도나 절도 같은 일반 범죄의 경우 숙련되고 전문적인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일정 기간 사이에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의 대상과 횟수는 제한적이다. 하지만 사이버 범죄는 피해 대상이 무한에 가깝다. 컴퓨터 마우스 클릭 한 번에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사람과 기관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 대부분의 문서와 기록이 전산화한 현실에서 컴퓨터 시스템의 마비는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이버 범죄의 피해는 막대할 수 있는 데 비해 막상 어나니머스와 같은 사이버 범죄자들은 다른 사람이 받는 피해에 대한 감각이 무디다.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경우가 많다. 단순한 호기심과 재미, 또는 장난으로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을뿐더러 자신들의 행위가 불법이며, 처벌받는다는 사실마저 모르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정보사회주의나 정부 통제 배제 등 이념이나 신념 등으로 범죄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사이버 범죄라는 것이 다른 일반 범죄 특히 강력범죄처럼 직접 칼이나 흉기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남의 돈을 빼앗는 것이 아니기에, 즉 행동의 결과를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없기에 더욱 쉽게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더 큰 편익을 위해 작은 피해와 비용은 감수할 수 있다는 합리화도 강하게 작용한다. 전산망 마비 등으로 생기는 피해가 돈 많은 기득권층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부를 부정하게 획득한 기득권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