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호

기득권 지키려 ‘公共의 적’ 만들었다

남미 人身공양 中 분서갱유 유럽·美 마녀사냥…

  • 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입력2012-11-20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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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혹하고, 야만스러운 ‘사법살인’의 배경엔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 있는 경우가 많다. 소녀가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학자가 산 채로 파묻힌 것은 미개한 문화, 광기 탓이 아니다.
    기득권 지키려 ‘公共의 적’ 만들었다

    멕시코 테오티와칸의 아즈텍 유적. 아즈텍 황제들은 적군의 심장을 신에게 바쳤다.



    사제들이 제물로 바칠 사람을 둘러메고 피라미드 계단을 오른다. 피라미드 꼭대기 ‘태양의 신전’ 앞에서 제물은 커다란 석판 위에 놓이고 4명의 사제가 두 팔과 두 다리를 잡았다. 이윽고 다른 한 명의 사제가 칼로 인간 제물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하늘 높이 쳐들었다. 심장의 뜨거운 피가 제단 위에 뿌려지고 구멍 난 몸뚱이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아즈텍 제국(1325~1521)의 인신공양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데이비드 카라스코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이렇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근대 이전 인신공양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아즈텍의 인신공양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규모 때문이다. 1486년 아즈텍 제국의 새로운 황제에 즉위한 아우이소틀은 피라미드 재건을 기리는 단 한 번의 행사에서 8만 명 넘는 사람을 죽였으며 해마다 수십만 명을 제물로 바치기 일쑤였다.

    인신공양의 명분은 아즈텍이 섬기는 태양신을 위해서였다. 아즈텍 신화에서 태양신과 밤의 신은 끊임없는 전쟁을 벌인다. 밤의 신의 승리는 곧 인간의 멸망을 의미한다. 태양신이 힘을 유지하게 하려면 인간의 피와 심장을 끊임없이 공급해야만 했다. 아즈텍이 주변 국가를 침공하고 포로를 생포해 그들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바친 것도 그래서다. 심지어 500㎞ 떨어진 곳까지 원정을 가서 포로 수만 명을 생포해 태양신에게 심장을 바쳤다. 이른바 ‘꽃의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들은 적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로잡아 신에게 바치고자 싸웠다. 사람의 피가 곧 ‘전쟁의 꽃’이며 피를 얻기 위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꽃의 전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반역 막은 인신공양



    이런 끔찍한 일이 어떻게 일상화했을까. 아즈텍이 등장하기 전 멕시코 지역은 씨족공동체인 칼풀리(Calpulli)와 도시국가들로 구성돼 있었다. 칼풀리는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활동을 영위했고 정치적으로는 반독립적인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소수 이방민족이던 메쉬카족은 멕시코 중앙 고원 지역 주변 칼풀리와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제국을 건설했다. 아즈텍은 20만㎢ 면적에 인구가 수백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으나 아즈텍을 움직이는 메쉬카족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했다. 절대 소수의 메쉬카족이 언어와 문화가 다른데다 정치적으로도 자치권을 갖고 있는 속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공물을 제때 보내지 않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아즈텍의 대응은 무자비하고 가혹했다. 반란 주동자는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관련된 인물은 모두 산 채로 잡아들여 태양의 신전에서 심장을 도려냈다. 인신공양은 처형의 차원을 뛰어넘어 제례와 축제 형식으로 승화됐다. 주변 속국의 왕이나 귀족을 모두 불러 모아 반역자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했다. 반역을 도모하면 이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소수 민족이 거대 제국을 유지하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인신공양을 활용한 것이다. 속국들이 행여 딴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위험인물을 가려내 숙청함으로써 범죄예방(?)의 효과를 거두었다. 아즈텍이 번성했을 당시 인신공양을 겸한 축제를 1년 365일 가운데 200일 넘게 열었다는 사실에서도 인신공양이 제국을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에서 최악의 범죄는 단연코 ‘반역’이었다. ‘왕’이 곧 국가이던 시절이다. 왕에 대한 반항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반역을 막으려고 갖은 방안이 만들어졌고 온갖 수단이 동원됐다. ‘왕권신수설’과 같은 종교와 이념의 활용은 기본이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빠른 기간 내에 널리 확산되고 국교로까지 공인된 데는 이들 종교가 기존 왕권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왕권에 대한 도전은 곧 신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당연히 처벌 강도 또한 가장 셌다. 이른바 3족을 멸하거나 심하면 9족을 멸하는 연좌는 대부분 ‘반역죄’와 관련한 처벌이었다.

    이렇듯 참혹하고, 야만스러운 사건의 배경엔 왕권을 비롯한 기득권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 있는 경우가 많다. 훗날 무자비한 학살과 문화파괴로 비판받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역시 마찬가지다.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뒤에도 크고 작은 분란이 계속됐다. 옛 왕조를 되살리려는 시도 또한 적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법질서를 세워야 했다. 또 새로운 질서를 거스르는 세력을 쓸어버리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과정이 요구됐다. 그러려면 빌미가 필요했다.

    진시황 34년(기원전 213년)에 드디어 사건이 벌어진다. 진시황이 수도 함양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신하들이 진시황에게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 가운데 주청신이 진시황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했다.

    분서갱유 목적은?

    “폐하의 성스러움에 힘입어 우리 진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 오랑캐를 내쫓으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게 됐습니다. 새로운 제도를 빨리 뿌리내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청신의 아부가 역겨웠던 순우월이란 신하가 마음먹고 진시황에게 쓴 소리를 했다.

    “어떤 일이든 옛날을 본받지 않고 오래갔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옛 제도를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진시황이 승상 이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답변했다.

    “이제 폐하의 예지로 천하가 통일되고 군현으로 나라가 편성됐습니다. 정복지에 다시 제후를 세우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진시황은 이사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천하가 전쟁에 끊임없이 시달린 것은 제후 왕들이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는 것은 전쟁의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고 종지부를 찍었다.

    승상 이사는 내친김에 더욱 강력한 건의를 했다.

    “학자들은 지금 필요한 것을 배우지 않고 옛날 것만 배워 현재를 비난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금하지 않으면 위로는 군주의 권위가 실추되고 아래로는 당파가 형성되니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진(秦)의 책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고, 두 사람 이상이 만나 감히 ‘시’와 ‘서’를 거론하면 공개 처형하고 옛것을 들먹여서 현재를 비방하는 자는 멸족에 처하십시오. 의약, 복서(卜筮), 농업과 관련한 책을 제외한 모든 책을 30일 내에 불태우고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묵형에 처하고 성 쌓는 노역을 시키십시오.”

    진시황은 곧 ‘분서(焚書)’를 명했다. 중국 전역의 책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모든 서적을 불태운 것은 아니었다. 분서의 대상은 유가(儒家) 관련 책들이었다. 병서(兵書), 형법, 천문, 의학, 농경과 관련한 책은 제외됐다. 또 황실 도서관에 유가를 포함한 백가의 모든 경전을 보존했고, 다른 나라의 역사서도 놔두었다. 진시황이 제자백가(諸子百家) 서적과 역사서를 불태운 것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일부 세력이 반기를 들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왕조가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려면 사상적 통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분서 때 특히 강조한 게 전국시대 육국(六國)의 역사기록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각국이 역사기록을 통해 진(秦)을 비방했기 때문이었다. 통일이 됐는데도 진나라에 대한 나쁜 내용을 담은 서적을 그대로 방치하면 과거 다른 나라에 속한 지역의 백성이 증오심과 복수심을 불태울 수 있고, 결국 진나라의 정치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승상 이사는 “학자들은 서로 다른 논리를 내세우는 것을 고상하게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결국 당파를 조직해 다투기만 한다”며 사학(私學)의 금지를 주장했다. 전쟁에 져서 나라를 빼앗긴 구세력이 호심탐탐 기회를 엿보는 마당에 여론을 호도할 수 있는 이론가의 입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이다.

    진시황의 분서는 사상을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비단 진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뒤 고대 문명의 집결지였으며 보고(寶庫)였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살랐다. 이슬람 교리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찬란한 인류 고대문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유럽에서도 이단으로 판정된 교파의 서적은 모두 태워버렸다.

    “질서를 흔들지 마라”

    책을 태운 분서보다 더 끔찍한 건 학자를 산 채로 묻은 갱유(坑儒)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영생(永生)을 꿈꾸면서 먹으면 죽지 않는 불사약을 구했다. 물론 진시황 이전에도 불사약을 구하는 사람은 많았다. 제나라 위왕과 선왕, 연나라 소왕 등은 사람을 곳곳에 보내 불사약을 구하고자 했다. ‘신선술’ ‘불사술’ 등은 일찍이 있었고 이런 것으로 부귀를 누리는 술사(術士)도 많았다. 진시황도 술사들의 현란한 말재주에 넘어갔다. 서복, 후생, 노생 등 술사는 진시황을 속여 막대한 재물을 갈취하고 백성을 괴롭혔다. 이들은 개인의 부귀를 위해 신선설과 도참 예언을 날조하고 정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10여 년간 대규모로 불사약을 찾는 바람에 진나라의 국력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성한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마다 비문을 세우고 제단을 쌓았다. 신선을 찾고자 3만 호에 달하는 백성을 낭야대라는 곳으로 이주시키고 대신 12년간 요역을 면제해줬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불사약은 어디에도 없었다. 불사약을 찾으러 떠난 노생 등이 그대로 돌아가면 죽음밖에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자 이들은 “주상이 형벌과 살육으로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잘못에 관해서는 들으려 하지 않고 갈수록 교만해진다. 권세를 탐하기 때문에 선약(仙藥)을 구해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핑계라고도 할 수 없는 변명만 늘어놓고 도망쳤다.

    뒤늦게 노생 등이 불사약을 구하지 못하고 도망친 사실을 알고 진시황은 격노했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중 ‘진시황본기’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전에 천하의 서적을 거두어 쓸 데 없는 것은 모두 없앴지만 많은 학자와 방사(方士)를 불러 모은 것은 태평을 구현하고 방사들이 선약을 구해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을 구하기는커녕 부정하게 이득만 취하고 있다는 보고만 매일 들린다. 또 노생 등을 대단히 후하게 대접했는데 그들은 나를 비방하고 내가 부덕하다고 떠벌렸다. 사람을 시켜 함양에 있는 유생들을 사찰해보니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자가 있다고 한다.”

    기득권 지키려 ‘公共의 적’ 만들었다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갱



    이단 응징한 마녀사냥

    진시황은 유생과 술사를 잡아들여 심문했다. 그리고 법을 어긴 자 460여 명을 산 채로 파묻어 죽였다. 술사의 꼬임에 속아 넘어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것은 분명 진시황의 과오일 수밖에 없지만, 그가 학문을 말살하고자 무고한 유학자 등을 집단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군주를 기만하고 유언비어로 백성을 현혹시켜 왕권을 약화시킨 이들을 일벌백계로 처벌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권에 저항하고 질서를 흔드는 것은 가장 심각한 범죄였다.

    한때 유럽을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마녀사냥도 비슷하다. 마녀사냥 또는 마녀재판은 15세기부터 18세기 사이 유럽에서 광풍처럼 몰아쳤다. 수백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고 알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과장된 숫자고 수십만 명이 처형된 것으로 학계의 의견이 모아진다.

    중세 이후 유럽은 기독교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성경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선악과를 통해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는 인식 탓에 중세 기독교에서는 여성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강했다.

    흔히 마녀사냥 혹은 마녀재판이라고 하면 중세 유럽에서 이단을 심판하는 종교재판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톨릭교회가 마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후다. 물론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전해져온 마녀의 존재에 대한 믿음 등이 마녀사냥을 가능하게 한 바탕이기는 하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 이후 중세 유럽 세계는 크게 변했다.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종교개혁 움직임이 움트는 등 교회의 권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중세 사회의 몰락이 시작됐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마녀사냥이 등장한다.

    마녀재판의 기원은 1428년 스위스 발레 주의 이단 심문소가 마녀 사건을 다루면서 시작됐다고 알려진다. 1435년에는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에서 마녀로 지목된 8명을 상대로 마녀재판이 열렸다. 이단자에 대한 처벌을 합리화하는 측면에서 이단자의 이상한 행동을 과장해 묘사했다. 공격의 대상이 된 것 중 하나가 사바트(Sabbat)라고 부르는 야간 집회였다. 악마에 대한 숭배와 유아 살해, 인육 먹기, 악마와의 집단 성교, 광적인 춤 등이 이 집회에서 이뤄진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마녀들이 전문적으로 영아나 유아를 살해한다는 풍문은 공포감을 더욱 높였다. 1617년 한 마녀재판에서 마녀로 지목된 콜레트 뒤 몽은 마녀와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동묘지 근처에서 열리는 사바트 장소에 도착했더니 개, 고양이와 산토끼 형상을 한 악마들과 함께 있는 15명 정도의 마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마녀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어둡게 치장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마녀들이 악마들을 숭배한 다음 개 형상의 악마와 집단 성교를 했다. 또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사바트를 떠날 때 악마는 검은 가루를 주면서 다른 사람과 가축에게 뿌리라고 명령했다.”

    마녀사냥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결부되면서 증오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 마녀들은 전형적인 유대인 여자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마녀들의 야간집회를 유대인의 안식일인 사바트로 부르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녀 재판에서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의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사바트 참가 여부였다는 점에서 유대인에 대한 핍박의 근거로 마녀사냥이 활용된 측면도 강하다.

    돈 많은 과부가 주된 타깃

    마녀재판은 대부분 가혹한 시련(ordeal)이라고 불리는 시험을 거쳐 유죄 여부를 결정했다. 우선 눈물 시험 방법이란 게 있다. 마녀는 사악하기 때문에 눈물이 없으므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둘째는 바늘 시험이다. 악마들은 지울 수 없는 표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관찰하면 마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래서 발가벗겨놓고 치밀하게 흔적을 관찰했다. 만약 몸에 점이나 부스럼 등이 있으면 바늘로 찔러 피가 흐르는지 시험했다. 마녀는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고난 시험은 불로 지지는 방식이다. 불에 달군 쇠로 마녀로 지목된 사람의 살을 지지면 다치는지를 시험했다. 마녀라면 악마가 도움을 줘서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네 번째는 물에 빠뜨리는 시험 방식이다. 마녀 혐의를 받은 사람을 꽁꽁 묶어 깊은 물에 던져 물위로 뜨는지를 시험했다. 마녀라면 악마가 도와서 물위로 뜨게 한다고 생각해서 떠오르면 마녀로 간주해 화형에 처했다. 떠오르지 않으면? 당연히 물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많은 사람 특히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한 것을 미개한 문화 탓, 혹은 집단 광기 탓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당시 상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녀사냥이 무조건적으로 미친 짓이고 무지와 미개의 산물로 내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흑사병이 14세기 유럽을 휩쓸면서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 유럽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신적 기반인 기독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금이 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뜩이나 십자군 원정과 르네상스, 종교개혁의 태동 등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중세 봉건 질서는 크게 요동쳤다. 중세 봉건 질서를 지탱하는 계급관계가 무너졌고 사회경제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국가와 교회에 대한 외경심을 환기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충격적이고, 또한 공분(公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 필요했다.

    마녀사냥을 여성에 대한 전쟁으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다. 마녀사냥은 여성을 비하하고 악마화하며 여성의 사회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였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에는 재물에 대한 욕망도 엿보인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유죄 여부를 가리는 동안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고문 도구 대여료, 고문기술자 급여, 재판에 참여하는 판사 인건비, 마녀를 체포할 때 소요된 모든 시간과 비용, 마녀로 확정될 경우 화형을 집행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 및 관 값, 교황에게 내야 하는 마녀세 등을 마녀로 지목된 사람이 지불해야 했다. 마녀로 판정돼 화형에 처해지면 갖고 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마녀 누명을 쓰고 모진 고난을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재산마저 빼앗기는 최악의 인권 침해가 벌어진 것이다. 마녀로 지목된 이들은 주로 돈이 많은 과부들이었다. 특히 부유하면서 가족이 없는 여자가 주된 대상이 됐다.

    남성 엘리트 중심의 기독교가 유럽 사회의 문화적 지배를 유지하고자 마녀사냥을 이용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한 시기가 바로 종교개혁의 열풍이 몰아닥치던 때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기존의 가톨릭교회가 마녀재판을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장치로 활용했다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마녀사냥과 재판은 중세와 근대가 한판 크게 붙은 전쟁이었다.

    희생양 만들기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도 비슷하게 전개됐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유럽에서처럼 마녀는 법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돼 있는 중대한 범죄였다. 세일럼에 살고 있던 티투바라는 이름의 흑인 여자 노예와 친하게 지냈던 백인 소녀 몇 명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하는가 하면 개처럼 짓기도 했다. 곧 세일럼에 사는 다른 소녀들도 마법에 걸린 양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체가 계속 때리고 찔렀다고 증언했다. 어떤 때는 들리지도 않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목구멍이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세일럼 일대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고, 티투바, 사라 굿, 사라 오스본이 마녀로 기소됐다. 거의 히스테리적인 지역 분위기에서 특정인을 마녀로 지목하고 자백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단 마녀 꼬리표를 단 여자가 다른 여자를 마녀라고 지목하면 그 여자 역시 마녀 혐의를 받고 재판에 회부됐다.

    마녀 폭풍이 세일럼을 넘어 뉴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번지자 총독이 마녀 문제를 다룰 특별재판소를 구성했고 부총독이 재판장에 임명됐다. 일반 사건과는 판이한 성격으로 인해 형사 절차 및 증거 효력 검증의 상당 부분이 무시되거나 완화됐다. 대신 몸에 특별한 흔적이나 표시가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한편 지역 주민이 목격한 환영(幻影) 같은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이 증거로 채택됐다.

    데이비드 코닉을 비롯한 다수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마녀로 지목돼 실제로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은 대부분 그 지역에서 반항적이고 평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재판 과정에 협조적이고 평판이 좋았던 사람들은 마녀 판정을 받았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마녀사냥에서 여자들만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가일즈 코리라는 백인 남자도 마녀로 지목됐다. 그는 끝까지 마녀임을 부인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자백할 때까지 돌을 가슴 위에 올려놓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총독 부인도 마녀 지목

    맨 처음 마녀로 지목된 흑인 노예 티투바는 부두교 신자였다. 부두교는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海)의 아이티로 팔려온 흑인들이 주로 믿던 종교로 북 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를 통해 주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17세기 말 뉴잉글랜드에 카리브해 출신 흑인 노예가 유입되면서 부두교도 들어왔다. 철저한 청교도 정신으로 뭉친 뉴잉글랜드에서 부두교와 같은 이단 종교의 유입과 전파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였다.

    게다가 부두교 신자들이 마약을 태우거나 흡입하면서(당시에는 마약이 불법이 아니었다) 환각 상태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주술적 행위를 일삼았다는 점에서 티투바가 백인소녀들과 함께 환각제를 복용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당연히 헛것이 보였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마녀사냥 역시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탓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인 이주민에게 미국은 종교와 정치적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건너와 힘들게 개척한 터전이 아니던가. 부두교와 같은 이질적 요소가 청교도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마녀사냥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가치를 더욱 강화하고 유대의 끈을 조이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한 마녀로 지목돼 처형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여자였고 특히 행실이나 평판이 좋지 않은 이들이었다는 점 역시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녀사냥을 통해 남성 우월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측면도 존재한 것 같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마녀사냥이 마무리된 것은 초기에 마녀로 지목된 소녀 중 한 명이 급기야 총독 부인을 마녀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자칫 더 이상 끌다가는 부메랑 효과로 자신들이 당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서둘러 마녀재판을 끝내게 한 동기로 작용했다.

    특정 범죄를 일시적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데는 정치적 목적과 이유가 있다. 쿠데타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경우 조직폭력배 일제 단속을 벌여 강력하게 처벌하곤 한다. 국민의 환심을 사고자 누구도 변호하기 어려운 대상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마녀사냥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범죄에 대한 대응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어떤 방식을 취하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이뤄진다는 점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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