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호

안정적 세력균형 물류·통상 중심국으로

2045년 통일한국 비전

  • 윤영관 |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前 외교통상부 장관

    입력2015-10-20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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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외교를 능란하게 구사해 정치적·제도적 통일이 이뤄졌다 해도 남북한의 ‘사람 통합’에 실패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논다면 그러한 통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1세기는 세계화와 상호의존의 시대이고 지구촌이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이 자리 잡은 동아시아는 아직도 국가들 간에 영토 및 역사 분쟁, 그리고 민족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더구나 분단된 한반도는 세계 최강국들이라 할 미·중·일·러 4국에 둘러싸였다.

    그래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아직도 중요하다. 19세기 말 청일전쟁, 20세기 초 러일전쟁으로 주변국들 간에 한반도 지배권 경쟁이 벌어지더니, 결국 일제 식민지 고난의 세월을 경험했다. 그 뒤 분단 70년 세월이 흐르기까지 한반도는 국제정치의 영향을 이처럼 압도적으로 받아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주변 4국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공식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속내는 통일보다는 분단이라는 현상유지를 선호한다. 여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통일된 한국이 행여나 자신들의 잠재적 적대 진영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차라리 분단이 지속되는 것보다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제정치 차원에서는 한반도 통일의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원심력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니라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장기 전략은 분명하다. 국제정치 차원에서 통일의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원심력을 약화시키는 외교를 펴고, 국내정치 차원에서는 통일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구심력을 강화시키는 대북정책을 펴는 것이다.

    ‘확고한 균형’ 위한 입지



    먼저 국제정치 차원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한반도 통일로 지역 국제질서가 크게 흔들린다면 통일에 대한 국제협력을 끌어내기 힘들 것이다. 지금 한반도 북쪽은 대륙세력인 중·러의 영향력이, 남쪽은 미·일의 영향력이 크게 작동하고 있어 일종의 세력균형이 이뤄져 있다. 통일된 이후에도 이런 균형상태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절묘한 입지 설정이 필요하다. 한국이 통일되더라도 자국이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각국에 심어줘야 통일에 협력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 외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미동맹의 유지·발전과 한일관계 개선을 통해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까지 한반도 통일에 대해 안심하고 지원하도록 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통일 한국이 대륙세력과 한 편이 되어 미국과 일본에 적대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따라서 역사 문제로 악화된 한일관계를 복원하고 원만한 협력관계를 유지해나가려 노력해야 한다.

    둘째, 이 같은 기반 위에서 중국의 협조를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30여 년간의 고속성장으로 자신감이 생긴 중국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목도한 이후 공세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외교로 자국 쪽으로 품어 안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가 해양세력과 연대해 자국을 포위할 가능성을 우려해왔다. 사실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한국이 그러한 중국 ‘포위전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국의 한반도 통일 지지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문제는 미중관계가 2010년경부터 협력보다는 경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미중 간 경쟁이 심화하면 한반도 통일에 상당한 부담이 걸릴 것이다. 한반도 문제를 놓고 미중 간에 협력하기가 그만큼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동북아 지역에 어떤 형태로든 다자안보협력을 위한 국제기구가 마련된다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주변국들 간에 한반도 통일을 놓고 의혹과 경쟁이 벌어지는 것을 완화할 완충장치 기능도 할 것이다. 독일 통일도 유럽 내 다자협력기구들로부터 도움 받은 바 크다. 한국 정부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기구의 창설에 적극 나서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넷째, 국제사회에서 통일을 지원해줄 우군을 평소에 확보해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 동남아, 인도, 그리고 중진국들에 대한 외교를 강화해 우리 외교의 자율적 공간을 넓히고 국제적 지지기반을 확충해나가야 한다.

    다섯째, 통일한국이 군사국가가 아니라 핵을 갖지 않는 평화지향국가, 네덜란드와 같은 통상·물류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국제사회에 제시하고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이제 국내정치 차원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남북 간 통합으로 통일을 향한 구심력을 강화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아무리 통일외교를 능란하게 구사해 정치적·제도적으로 통일이 이뤄졌다 해도 남북의 ‘사람 통합’에 실패해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논다면 그러한 통일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 간의 통합을 이루는 첩경은 경제협력이다. 북한은 이미 시장화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북한 당국은 19개의 경제개발구를 설치하고 부분적 개혁을 추진하는 등 경제에 중심을 두는 실질적인 선경(先經)정책을 펴고 있다. 따라서 대북정책의 기본 방향은 경제를 통해 남북 간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만들어가고, 의료보건, 환경, 농업, 교육 등 다른 분야에서도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 돼야 한다.

    ‘공정 시스템’으로 사회통합

    통일 이전에 남과 북이 이처럼 경제를 중심으로 엮이고 통합되어나가면, 통일 시점에서도 자연스럽게 북한 주민들은 남쪽과의 통일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 경우 국제사회와 주변국들은 민족자결주의 원칙 때문에라도 한반도 통일에 반대할 명분을 찾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경제우선 정책으로 남북 간 통합을 강화하고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인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전략이 대북정책, 통일정책의 기본이 돼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 통합의 구심력이 통일을 방해하는 원심력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 중심 대북정책은 통일 이후, 나아가 광복 100년을 맞는 2045년의 한반도가 동아시아 물류 및 통상의 중심국가가 되는 기반을 조성할 것이다. 그동안 막혀 있던 북한이 뚫림으로써 대륙을 향한 경제 진출 활로가 마련되고 한반도를 통해 해양과 대륙이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한국 경제의 체질을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도록 유연하게 만들면서 사회적 통합을 이뤄낼 수 있도록 공정한 시스템으로 끌어올려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정치권부터 지금처럼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싸움에 매달릴 게 아니라 실용주의 정신으로 무장해 세계 속에서 번영하는 한국을 만들 궁리에 여념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통일전략을 추진해가는 데 한 가지 중요한 고려사항이 있다. 남북한 간의 경제협력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비핵화에 대한 성의 있는 조치를 북으로부터 끌어낼지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북한 비핵화에 대한 노력 없이 남북경협만 추진한다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조를 구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이 북한의 이른바 병진(竝進)전략, 즉 핵개발과 경제발전 동시 추진을 도와주는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핵화와 대북협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진하려 한 선례도 있으니 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위성 발사로 실현되진 못했지만 2012년 북미 간 2·29 합의가 그것이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식량 지원을 받는 대신 핵 및 미사일 개발 활동의 동결을 약속했다.

    지친 미국, 의지 없는 중국

    이처럼 국제 차원의 통일외교나 국내 차원의 남북통합 추진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통일은 영원히 꿈으로만 그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가 북한 문제 해결에 대해 주도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 문제에 대해선 지쳐버린 상황이다. 중국도 북한 문제를 주도해나가려는 의지가 없다. 유일하게 남은 국가는 당사국인 한국뿐이다.

    국내 정치적으로도 진보정부 10년, 보수정부 7년 반을 겪어본 국민의 여론은 북한에 대해 원칙은 지켜나가되 관여정책을 펼쳐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북한 문제를 주도해나가기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현 정부는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이러한 통일전략을 추진할 비전과 의지를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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