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한·중·일 차세대 지도자 포럼

충돌하며 뜨거워진 교류 열기… FTA, 금융·에너지 공동체가 ‘윈-윈’ 활로

  • 최형두 문화일보 정치부 차장대우 choihd@munhwa.com

    입력2005-09-29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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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중국, 일본은 모두 한자문화권이다. 그런데 3개국의 ‘공통어’는 영어다. 세 나라 관계자가 참석하는 웬만한 행사는 영어로 진행된다. 3개국간 경제의존도는 절대적이다. 그러면서도 독도와 센카쿠 열도,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 민감한 정치적 현안 앞에선 철저히 ‘적’으로 돌아선다. 지리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오랜 갈등의 역사 속에 만들어진 뒤틀린 관계. 3개국의 차세대 리더들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한·중·일 차세대 지도자 포럼

    포럼 참석자들이 일본 기후현 르네상스 호텔에서 3국의 현안과 협력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한국,중국, 일본의 청장년 세대가 열흘 동안 함께 지내며 토론하고 여행한다면 어떤 얘기를 나눌까. 그들은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한일·중일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역사 문제, 영토 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 같은 틈새는 얼마나 메워질 수 있을까.

    올들어 한일관계는 ‘한일우호의 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경색됐다. 중국에선 연일 반일폭력시위가 벌어지면서 두 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그 틈바구니에서 한·중·일 3국의 40대 안팎 정치인, 학자, 공무원, 기업인, 언론인 등 각국에서 5명씩 모두 15명이 세 나라를 오가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3국 갈등 속에 특별한 ‘동거’가 이뤄진 셈이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일본국제교류기금(Japan Foundation), 중화전국청년연합회가 합동으로 7월17일부터 26일까지 연 ‘제3회 한·중·일 차세대 지도자 포럼’이 계기가 됐다. 참석자들은 10박11일간 중국 베이징(北京), 일본 중서부의 기후(岐阜)현, 그리고 한국의 광주와 서울을 돌며 3국간의 현안과 미래 협력 방안을 토론했다. 올해로 세 번째인 이 행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3국간 상호 이해에 토대를 둔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

    행사 참석자들은 처음 만났을 때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처럼 들떠 있었다. 각자의 일터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다 특별한 여행기회를 얻은 설렘 때문일 수도 있고, 마음 한켠에는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3국간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하는 의구심, 오해도 뒤섞여 있을 터였다. 중일간의 무역액이 2000억달러를 넘어서고 한중간도 1000억달러(올해 전망)를 훌쩍 넘어서는 최대 교역국일 만큼 상호 경제의존도가 절대적인데도 세 나라 사이는 여전히 낯설어 보였다. 지리적으로는 이웃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침략-피침략 혹은 지배-피지배 관계였던 이중성 때문일까.

    일본 기후현에서 열린 한·중·일 포럼 첫 번째 토론. 일본 참의원의 다무라 구오타로(田村耕太郞·재선) 의원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여론조사 자료로 비교해가며 “뭔가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최근 3국 국민의 상호인식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일본인에 대해 지니고 있는 호감도가 일본인의 한·중 사람들에 대한 호감도보다 훨씬 낮은 점, 그리고 한국인과 중국인이 일본을 군사적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뜨거운 감자’ 야스쿠니 신사 참배

    3국간의 역사적 배경을 떼놓는다면 다무라 의원의 지적은 형식·논리적으로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당신들을 좋아하는데 왜 당신들은 우리를 미워하는가’. 이런 문제제기는 식민 침략과 전쟁의 경험 없이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시대를 살아온 일본의 세대가 가지는 일반적 의문 같았다.

    ‘요미우리신문’의 이다 다쓰히토(飯田達人) 기자는 “한일간, 한중간에 역사교과서 문제 등을 둘러싸고 긴장이 조성되고 있어 매우 서글프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현재 일본의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더는 일본을 과거 같은 군사적 위협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일본에는 징병제도 없을뿐더러 지난 60년간 아주 평화적인 나라였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중국의 신세대조차 이런 현실을 잘 모른 채 과거 인식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것.

    한국 효성그룹의 조현상(趙顯相) 상무는 최근 한·중·일 사이의 관광객과 교역량이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를 소개했다. 이른바 ‘정냉경렬(政冷經熱)’. 세 나라 국민의 그 같은 인식 충돌 속에서도 현실적인 교류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일본 총리나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도 제기됐다. 일본측 참석자들은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 14명이 합사(合絲祀)될 때는 가만있다가 한참 뒤인 1980년대 중반부터야 문제 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오히려 중국과 한국이 신사참배 문제를 내부의 민족감정을 일으키는 데 동원하고 일본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아니냐”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한국과 중국의 참석자들은 이런 ‘뜻밖의 문제 제기’에 대해 즉답을 내놓지 못했다. 실제 한·중 양국 정부나 여론이 A급 전범 합사 당시에 이 문제를 왜 제대로 지적하지 않았는지 미리 따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측 참석자는 “처음에 이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며 “지금도 중국인의 10%만이 TV를 시청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중국인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중국 내에 대중매체 보급이 부족해 이런 문제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크게 불붙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일본측은 지난 60년간 평화를 지켜왔으며 일본인은 여전히 평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나섰다. 일부 참석자는 중국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 중에는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지나치게 과장되게 묘사해 젊은이들의 대일(對日)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측 참석자들도 총리나 지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총리의 참배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이나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태도였다. ‘당신들도 국립묘지가 있듯이 우리도 어찌 됐든 나라를 위해 숨져간 사람에 대해 추모해야 할 것 아니냐’는 반론이었다.

    가토 전 간사장의 야스쿠니 해법

    한국과 중국측 참석자들은 이에 대해 “일본 내에서 과거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의 대일 경계심리가 높다”는 반론을 폈다. 하지만 양측의 주장과 반론은 서로에게 스며들지 못한 채 겉돌기만 했다. 한·중 참석자들은 일본측이 본질을 피해가는 얘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참석자들은 한·중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역사적인 선입견은 그만큼 견고했다.

    일본측 정계의 또 다른 참석자인 중의원의 스에마쓰 요시노리(末松義規·민주당 3선) 의원은 3국 갈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편 일본 내의 극단적 경향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와 다른 별도의 장소에 전쟁 희생자만을 위한 추모시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야스쿠니 참배 문제는 일본 자민당 중진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 간사장과의 대화에서 3국의 참석자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인식에 이를 수 있었다. 가토 의원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나오기 전 총리 후보 물망에 올랐던 인물이다. 도쿄대 법대와 미국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합리적 성향의 정치인이다. 그는 두 시간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포럼 참석자들이 머물고 있던 기후현으로 왔다. 그의 영어는 유창하진 않았지만 짧은 문장에 분명한 어휘를 구사해서인지 간결하고도 힘이 있었다.

    가토 의원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해왔지만 한국과 중국의 뜨거운 반일여론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와 단둘이 만나 나눈 대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고이즈미 총리에게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종전(終戰) 협정인 샌프란시스코협정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만일 이 문제가 일한, 일중 간에 큰 문제가 되고 국제적인 이슈가 된다면 미국도 종국에는 일본의 행동이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어긋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반대로 고이즈미 총리의 입장에 대한 이해도 구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평화를 사랑하며 절대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야스쿠니에서 전쟁 중 소년 비행사들이 가미카제 자살 공격에 나서기 전날 부모에게 쓴 편지를 읽고 난 뒤부터 방문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유서나 마찬가지인 편지는 이런 내용이다. ‘어머니, 내일 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부디 먼저 떠나가는 저를 용서하세요. 어머니는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부디 가족들을 잘 보살펴주세요…’.”

    가토 의원은 일행을 만나기 전날 일본 언론계 실력자인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요미우리신문’ 회장에게서 “편집국에 과거사의 잘못된 부분을 취재토록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해 일본 여론도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전했다. 가토 의원이 말한 일본 내의 여론 변화는 지난 8월15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음으로써 입증됐다.

    쟁점마다 평행선

    일본의 야당인 민주당은 대체적으로 집권 자민당보다 합리적인 정책성향을 띤다. 이번 포럼에 참석한 민주당의 스에마쓰 의원은 이라크전쟁에 반대했다. 그는 한·중·일 관계 전반에 걸쳐 온건하고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말씨도 아주 정중했다. 때로는 웃으면서 “체면을 구겼다(l lost my face)”며 수줍어할 정도로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석에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북한 지도자를 이해할 수 없다”며 정색하고 비판했다. 1977년 열세 살 때 북한에 납치돼 결국 북한에서 목을 매 자살한 일본 여성 요코타 메구미의 사연은 온건한 민주당 의원조차 격분시켰다. 실제로 민주당은 야스쿠니 문제와 과거사에 대해선 합리적인 입장이지만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하다.

    한·중·일 차세대 지도자 포럼

    중국 외교부를 방문해 취 톈카이 아주국장을 면담하고 나온 제3차 한중일 차세대지도자포럼 참석자 전원.

    스에마쓰 의원은 중국의 군사력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는 “중국이 200기가 넘는 핵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더욱 정교한 대량살상무기를 급속히 개발하고 있다”며 “이런 무기가 일본을 향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크게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국측 참석자인 사회과학연구원의 천신(陳昕) 박사는 “중국의 무기는 미국과 러시아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며 “일본과 싸운 기억은 중국 사람에게 오래 전의 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인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대만 문제”라며 “중국은 지난 100여 년 동안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나 대만 문제만이 유일하게 미해결 상태여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참석자들의 일본에 대한 관점은 최근 중·일 관계에서 나타난 반목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천 박사의 말에서는 미국과 일본을 떼놓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의 발언 중 일부다.

    “일본은 대만 문제에 대한 중국의 처지를 깊이 이해해줘야 한다. 중국은 냉전이후 서방에 대해 개방정책으로 돌아섰지만 미국만이 우리를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는 일본이 유엔에서 보다 큰 몫을 담당하려는 생각을 지지한다. 다만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역할을 추구하는 한에서 그렇다. 미국의 그림자 없이 말이다.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무척 많다. 일본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교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독립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국의 아시아 전략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토론 때마다 3국 참석자들의 생각은 평행선을 그었다. 역사적인 경험의 차이와 오랜 민족감정 탓인지 각자의 생각만 드러낼 뿐 서로에게 파고드는 논리나 증거는 약해 보였다. 오히려 식민지 경험 등으로 교류가 많던 전세대보다 대화의 폭이나 깊이가 더 약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지난 봄 ‘요미우리신문’ 주최 토론회에서 김종필 전 총리는 일본의 우경화를 일본 자체의 기록과 문헌, 역사적 사실을 들어 공박했는데, 오랜 경험과 축적된 지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번 포럼 참석자들의 경우 식민지배-피지배, 침략-피침략의 경험과 심리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각자의 주장을 내세웠지만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한 채 서로의 처지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맴돌았다. 향후 세 나라 사람들이 보다 깊은 의사소통을 하려면 자료에 근거한 풍부한 화제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특히 한국은 중·일 사이의 교량역할, 혹은 지렛대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현실에 정통할 필요가 있다.

    中 실리추구와 ‘도광양회(韜光養晦)’

    토론은 장소를 중국 베이징으로 옮겨서 이어졌다. 베이징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열린 토론에서 중국측은 일본의 해외개발원조(ODA)가 빈곤한 중국 농민의 식수 공급 등 중국 최저생활 계층을 위해 사용됐는데, 이것이 갑작스레 중단된 사실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 참석자들은 “중국이 (일본의 ODA를 받으면서도) 아프리카 국가에 ODA를 할 만큼 여유가 있기 때문에 더는 ODA가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며 “만일 진정 어렵다면 다시 요청하라”고 반박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중국은 우리가 도와줘도 감사하다는 표시에 인색하다”며 “우리도 인간인데 왜 우리에게 고맙다는 쪽을 지원하지, 도와줘봐야 생색도 안 나는 곳에, 더욱이 자기 돈은 딴 곳에 쓰는 나라에 ODA를 지원하겠느냐”는 것. 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는 기습적인 발언이었다.

    중국측은 “우리가 아프리카 지역을 지원하는 것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오랜 미덕 때문이지, 여유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또 “ODA 중 무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지원에 충분한 감사표시를 할 용의가 있다. 중국은 일본의 ODA가 정말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중국 참석자들과 학자들은 “중국이 아시아와 세계에 새로운 위협이 될 것이라는 서방의 우려는 사실이 아니다”라며 “중국은 경제성장을 이루고는 있지만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처지와 같다”고 외부의 경계감이 지나치다는 점을 강조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이 자리에서 중국 참석자들은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이득의 대부분은 해외투자기업들이 얻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의 재계 참석자들은 “중국에서 돈을 번 외자기업은 돈을 해외로 송금하지 못하고 모두 중국 내에 재투자해야 한다”며 중국측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중국사회과학원 토론 이후 오찬에는 과학원 박사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그들은 북핵 문제를 협의하는 6자회담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하나는 핵 비확산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동북아 국제정세(중국 견제) 관리다. 그동안 전자만 생각하고 후자는 잘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실은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 북한이 수십개의 핵탄두, 그리고 괌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핵탄두 미사일을 갖지 않는 한 미국에 전략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이 정도의 위협을 느끼면 금방 협상하려 할 것이지만 지금은 북핵 문제 자체가 미국에 진짜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동북아 지역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일 것이다. 예컨대 중국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고 중국과 한반도 관계를 한층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서는 더 중요한 것 같다. 미국이 핵 확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벌써 해결했다. 후자 때문에 결론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과학원 박사들은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한·중간에 갈등을 빚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리는 얼마 전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정리했다.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강 유역의 땅인데 1860년대 러시아에 뺏긴 땅이다. 북한의 6배, 한국의 3배 넓이다. 그렇게 큰 땅도 중·러관계 안정을 위해 포기했다. 당초 타지키스탄 등 서쪽 변방 분쟁지역과 맞바꾸자는 내부 제안도 있었다. 그리고 왜 영토를 쉽게 포기하느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에겐 안정이 더 중요하다. 동북공정이 북한 급변시 북한 지역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함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얘기다. 우리는 북한 땅보다 6배나 더 큰 땅도 포기했다.

    동북공정은 수십개의 변방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의 일부다. 한국에서는 당연히 옛 고구려사가 한국역사라고 생각하겠지만 중국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중국역사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문제는 지금 당장 끝장을 보려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우리는 칭기즈 칸 이후 몽골족의 지배를 중국역사의 원(元)나라 시대로 정리하고 있지만 몽골은 그게 왜 중국역사냐고 얘기한다. 어느 쪽 말이 맞는가.”

    북한 급변과 관련된 얘기도 있었다.

    “만일 미국이 김정일 체제를 뒤집으면 북한에는 군부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북한 군부는 친중국이다. 친중(親中) 군부정권이 들어선다는 얘기다. 미국도 이런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북한을 정밀 공격하겠다는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반하는 것이다.”

    독도와 센카쿠 열도

    독도와 센카쿠(중국명 다오위다오·釣魚島) 열도 문제는 참석자들이 가장 언급을 꺼리는 주제였다. 자칫하면 모임을 깰 수도 있는 인화성 강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에 대해 가토 의원이 포럼 참석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측의 이해를 구했다. 그는 한국 참석자들을 배려해 꼬박꼬박 ‘독도’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그는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선언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과 관련, “한국에서는 일본 중앙정부의 사주나 방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마치 지난 봄 중국에서 반일 데모가 벌어졌을 때 일본 사람들이 그 배후에 중국 공산당이나 군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시마네현 의회의 활동에 일본 중앙정부가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한국측이 이해하기 바란다는 얘기다.

    가토 의원의 설명도 그렇지만 일본측 참석자들은 독도 문제가 왜 한국 사람에게 심각한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1905년 러일전쟁을 개전하자마자 일본이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하며 최초로 강탈한 영토가 독도였다는 사실을 지금 일본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그 역사적 사실에 둔감한 것 같았다.

    그로부터 꼭 100년 뒤인 올해 시마네현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한 것은 한국인에게 일본이 한반도 병합의 첫걸음으로 독도를 편입시킨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는 걸 일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러니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제기하면 할수록 한국인들은 가슴속에 묻어둔 불행했던 과거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는 점을 일본 참석자들에게 각인시켜야 했지만 필자는 당시 그런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앞으로 독도 문제에 관해서 일본측과 논쟁할 때는 1877년 메이지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와 일본 영토 외의 지역으로 표기했고, 일본의 관선 영토지도에도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돼 있다는 역사적 증거를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포럼을 통해 자주 느꼈지만, 세 나라의 전문가들도 3국관계에 관한 역사적 지식은 매우 파편적이었다. 필자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만 갖고 있지, 이미 한국 언론에서도 몇 차례 언급됐을 법한 독도영유권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놓치고 있었다. 내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세 나라 관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 부정확하거나 부분적인 지식과 사실만을 알고 있을 수 있고, 또는 전혀 모를 수도 있다.

    한·중·일 언론에서 다뤄졌다 해도 세 나라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들의 행동과 판단은 상당히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나라 전문가나 학자들, 유사한 집단간의 교류와 토론이 필요한 까닭도 이런 공백을 메워서 3국간의 의사소통을 보다 심도 깊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

    3국 FTA 파급효과

    한일 양국의 지도자나 여론의 인식은 근거 없는 오해로 인해 냉각될 수 있다. 예컨대 가토 고이치 전 간사장은 포럼 참석자와의 대화에서 한류 열풍을 언급하며 한국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일본에 한류 열풍이 있듯이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오래 전부터 일본 노래나 일본 문화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내 아내를 비롯해 일본의 주부들은 ‘후유소나(겨울연가)’를 보느라고 밤을 새고 그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일본 남자는 아침밥을 얻어먹지 못한다. 일본 내 한류 열풍은 이렇게 뜨거운데 한국 사람들은 지난 2월 독도영유권 문제 이후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 같다.”

    우선 그는 독도 문제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는 점을 충분히 알지 못했디.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독도 문제 이후에도 일본 노래라든가 문화, 영화를 여전히 좋아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가토 의원에게 전날 밤 일본 NHK 위성채널에서 한국 젊은 세대에 불고 있는 일본 J팝 열풍을 서울발 기사로 소개한 일을 전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사랑하듯 한국 사람도 일본 문화를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토론 참석자들은 중국사회과학원 박사들과 경제협력문제에 대해서도 집중토론을 벌였다. 과학원 박사들은 ‘한·중·일 FTA’에 대한 한국와 일본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판했다.

    과학원 소속이자 포럼 참석자인 천신 박사는 “중국이 만약 현재의 선진국가처럼 산업화를 이루면 전세계 에너지 수요량은 공급량의 두 배를 넘어설 것”이라며 “중국은 과거 선진국과는 다른 길로 가야 한다”고 역설해 주목을 받았다. 천 박사는 “만일 중국이 서구와 같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발전유형을 따라간다면 세계 에너지 수요는 공급을 230% 초과할 것”이라며 “따라서 새로운 발전의 길, 에너지 절약적인 발전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천 박사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이런 특수성 때문에 중국의 정치·경제를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개념으로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중국의 인권이나 제도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차단하려는 논리 같지만 서구식 발전이 초래할 에너지 위기론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이에 대해 한·일 참석자들은 3개국의 여유 외환보유고를 활용한 아시아금융기금(AMF) 혹은 아시아본드마켓(채권시장) 창설 가능성과 3국 에너지 협력의 긴급성을 제기했다. 특히 3국의 풍부한 달러 보유고를 바탕으로 헤지펀드 공격으로 인한 지역 내 환율급변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협력체제, 3국의 채권시장 형성을 통한 지역 내 자금공급, 그리고 프로젝트 파이낸싱 활성화에 대해 크게 공감했다.

    에너지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요약하자면 석유자원 거대 수입국인 한·중·일이 중동 원유를 공동 구매한다면 구매력의 우위를 통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 대체 에너지와 에너지 절약기술 개발도 공동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반면 FTA(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3국간의 복잡한 관계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경제학자는 “동아시아 전체 경제에서 10%도 차지하지 못하는 아세안 10개국과 중국이 FTA를 시작했다”며 “만일 동아시아 경제의 90%를 차지하는 한·중·일 3국이 FTA를 맺는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라며 소극적인 한·일 양국의 태도를 지적했다.

    한자 쓰면서 영어로 대화

    아이러니하게도 한·중·일의 공통 언어는 영어다. 3국이 모두 한자(漢字)를 쓰고 있으면서도 포럼의 모든 행사일정 안내와 공식토론 언어도 영어요, 일상적인 대화도 영어로 이뤄졌다. 한·중·일 관계의 중요성이 날로 커져가지만 대다수 참석자는 상대방의 언어를 몰랐다. 영어를 잘못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제대로 교육 받은’ 각국의 전문가들조차 가까운 이웃 나라, 그것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이웃국가의 언어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3국의 경제규모를 합칠 경우 장차 미국을 앞지르고 세계 최대의 경제권으로 성장할 것이 확실한데도 말이다.

    참석자들끼리 드문드문 한자를 섞은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부터 한자를 도입한 일본은 한자의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반면 본산인 중국은 간체자(簡體字)를 사용해 웬만한 지식인이 아니면 한자 원형에 낯설어한다는 점이다. 중국 방문 중 현지 사람들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보내는 것을 봤는데, 그들은 현대 중국어의 발음 표기인 영어 알파벳을 주로 이용했다. 마치 우리가 한글 문자를 보낼 때 자음과 모음을 따로 찍어서 한 음절을 완성하듯이 그들은 한자 한 음절을 발음에 따라 알파벳 몇 자로 나눠서 구성했다. 이러다간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필담조차 불가능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한·중·일 차세대 지도자 포럼

    중국사회과학원 건물. 20세기 초 세워져 쑨원(孫文) 정부 청사로 쓰이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육군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보다 친밀하면서도 가까운 국가가 되기 위해 상대국의 언어는 매우 중요하다. 이번 포럼 첫 상견례 때 한국측 참석자 김태효(金泰孝)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 조현상 효성그룹 상무와 일본의 다무라 구오타로 의원은 영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로도 간단한 인사말을 해 큰 박수를 받았다. 김 교수는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 박사로 미일 관계를 전공했다. 조 상무는 미 동부의 아이비리그 명문인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컨설팅 회사인 베인 앤 컴퍼니의 도쿄사무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다. 두 사람은 중국어도 인사말 정도는 자연스럽게 구사했다.

    다무라 의원은 일본의 상원격인 참의원 재선으로 와세다대 법대, 게이오대 경영학석사, 다시 미국 듀크대에서 법학석사, 예일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고 중국과 싱가포르의 유수 대학원에서도 공부했다. 국제적인 경험과 인맥을 두루 쌓으려는 열성파다. 그의 중국어와 한국어 솜씨는 처음 들으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뛰어나다. 그는 요즘 일본 신세대 정치인·전문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했다. 요즘 일본의 각계 전문가 상당수는 ‘해외 학위 수집가’로 불릴 만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유명 대학에서 공부한 이력을 갖고 있다. 스에마쓰 요시노리 의원도 프린스턴대 석사 출신이다.

    노래와 영화의 힘

    세 나라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역시 노래와 영화였다. 참석자 모두 다른 나라의 노래 한두 곡씩은 따라 부를 만큼 알고 있었다. 그동안의 문화교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토론이 영어로 진행된 탓에 인간적 교감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지만, 노래방에서 어울려 불렀던 ‘아침이슬’, 중국 노래 ‘웨량다이뱌오워더신(月亮代表我的心)’, 일본 노래 ‘간빠이(乾杯)’를 부를 때는 마치 서로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역시 노래는 무엇보다 강한 언어였다.

    포럼 기간 중 두어 차례 들른 노래방에서는 여러 명의 스타가 탄생했다. 다무라 의원은 한국 드라마 ‘올인’ 주제가를 한국말로 능숙하게 불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노래하는 동안에는 한국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한국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환호하자 “정말?”이라고 한국말로 되물어 또 한번 놀라게 했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문득 3국에서 모두 인기 높은 노래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각국에서 인기 있는 노래라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큰 감흥이 없어 그냥 분위기만 적당히 맞춰주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노래는 3국 참석자 모두에게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도대체 어떤 코드가 그런 공감대를 만들어낸 것일까.

    영화와 드라마도 세 나라 참석자들을 이어주는 주요 소재였다. 한국드라마 ‘겨울연가’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를 보았다고 얘기하자 일본 참석자들과 주최측 관계자들이 무척 반가워했다. 일본에서는 약어로 ‘세카주’라고 불렀다. 일본 영화배우 몇몇의 이름이라도 알았더라면 나와 일본측 참석자들과의 교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중국 영화도 중국 친구들과는 좋은 대화 소재였다. 그런데 중국 배우 이름을 죄다 한국 발음으로만 알고 있어 정작 중국 친구들은 한자로 이름을 써주기 전까지는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다. 중국과 일본 노래 한두 곡쯤 부를 줄 알고, 중국과 일본 영화 몇 편의 제목과 영화배우 이름을 그 나라 말로 얘기할 수 있다면 중국, 일본 친구들은 우리와 훨씬 더 가까워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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