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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1>경북 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지조론’ 낳은 370년 명가의 저력

  • 조용헌·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지조론’ 낳은 370년 명가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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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문장을 보자. 주실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박사만 해도 14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궁벽진 산골 동네에서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는 동네다. 전북 임실군(任實郡)의 삼계면(三溪面)이라는 곳에서도 박사가 40여 명 나왔지만, 그것은 면 단위이고 여기는 일개 조그만 마을이다. 조그만 마을 하나에서 현재까지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더군다나 주실마을에서 나온 박사들은 시원찮은 나이롱들이 아니다. 한국 인문학의 대가(大家)들이다. 대표적인 3인방만 꼽자면 조동일(趙東一), 조동걸(趙東杰), 조동원(趙東元) 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 선생의 호적 이름이 조동탁(趙東卓)이니까 이들은 모두 동자 돌림의 같은 항렬이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조동일 교수는 ‘한국문학통사’(6권)로 유명한 학자다. 한국문학 전체를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통시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까지도 필독서로 꼽는다. 조동일 교수 특유의 직절(直切)한 필치로 문사철(文史哲)을 꿰뚫은 명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동일 교수는 93년에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 책 ‘우리 학문의 길’을 펴낸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교수의 팬이 됐는데, 그는 외국이론의 수입중개상 노릇이나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학문의 수입업자나 하청업자 노릇을 하면서 행세하려고 하지 말고, 요즈음 유행하는 문자로 국제 경쟁력을 가진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생각이 깨인 다른 모든 나라에서 함께 채택하고 있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노선이다.”

그는 그만 굽실거리고 이제는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조교수의 글에서는 ‘주체성’이 느껴진다. 지조와 자존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국민대 대학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는 조동걸(趙東杰) 교수는 고려대의 강만길 교수와 함께 근세사의 양대 고수로 꼽히는 학자다. 또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趙東元) 교수는 발로 뛰어다니면서 한국의 금석문(金石文) 탁본을 20년에 걸쳐 정리한 ‘학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7권)의 저자다. 남한 전지역의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현장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본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미술사, 역사, 불교 ,민속, 도교, 서예 전공자들에게 필수 장서임은 물론이다.

요즘에야 인문학이 파리 날리는 신세로 전락하여 겁없이 함부로 인문학을 전공했다간 자칫 쪽박차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그 민족의 혼과 정신은 역시 그 나라의 인문학에 들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문학이 죽으면 그 나라의 주체성도 죽는다. 이런 점에서 주실마을 태생의 인문학자 3인방을 경외(敬畏)의 염(念)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조지훈까지….

주실마을 조씨들의 항렬을 따져 보면 동자(東字) 윗대 항렬은 영자(泳字)가 된다. 항렬 정하는데도 법칙이 있다. 오행(五行)의 상생(相生) 법칙으로 볼 때 목(木)인 동 자를 생해주는 것은 수(水)인 영 자 항렬이다(水生木의 이치).

납북 한의학자 조헌영

영자(泳字) 항렬 가운데서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은영(趙銀泳, 1896∼1970년), 조헌영(趙憲泳, 1899∼1988년), 조준영(趙俊泳, 1903∼1962년), 조애영(趙愛泳, 1911년∼) 4남매가 그렇다. 은영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헌영은 일본 중앙대 출신의 유명한 한의학자이고, 준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초대 민선대구시장, 경북도 지사를 지냈으며, 애영은 여류 시조시인이다.

이중에서 조헌영이 바로 조지훈의 부친인데 한의학의 대가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납북된 뒤에도 한의학을 계속 연구하여 많은 한의학 제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상당수의 이북 한의학자들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

조헌영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한다. 영문학도인 그가 엉뚱하게도 한방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원래 조헌영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 머물며 허헌(許憲)이 회장으로 있던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다. 귀국한 후에도 신간회 총무 간사를 지냈는데, 신간회가 해산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는 방편으로 서울 명륜동과 성북동에 ‘동양의약사’라는 한의원 간판을 달고 의원 행세를 하며 광복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동양의학사’ ‘통속한의학원론’ 등 전문 한의학서를 여러 권 저술했는데, 한때 한의과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됐다. 이 책자에 대해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병운(金秉雲) 교수는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적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입문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의사 일 외에 조선어학회가 주관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심의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고향에서 한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민족 반역자를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했다. 2대 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연속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때 납북됐는데, 북한에서도 한의학 연구서를 내는 등 북한 한의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북한은 88년 5월 평양방송을 통해 ‘조헌영이 노환으로 작고했다’고 그의 별세를 보도했다(조선일보 ‘新名家’, 1995.6.12일자에서 인용).

역사학자 조동걸이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기술한 ‘주실이야기’를 보면 1930년대에 조헌영이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서 동네 초동(樵童)들을 데리고 경북 영양 일월산을 누볐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조지훈의 부친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영, 헌영, 준영, 애영 4남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바로 조인석(趙寅錫, 1879∼1950년)이다. 영자 위 항렬은 금(金)인 석자(錫字)이다(金生水의 이치). 조인석은 1900년 경 서울에 올라가 개화가 대세임을 목격하고, 동네에 돌아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종가이자 자신의 집인 호은종택에 설치한다. 그는 ‘초경독본(初經讀本)’이라는 청소년용 교육 책자를 저술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셈이다.

조인석은 자식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했지만 그 자신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기에는 6·25 전쟁의 비극이 개입돼 있다. 당시 그의 3남인 준영이 경북도경국장을 지내고 있었기에 아버지인 조인석은 좌익 청년들에게 매일 시달렸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집에 들어와 “이 영감! 아들 어디에 있어? 아들 찾아내?” 하면서 칠십노인에게 반말로 모욕을 가하자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처 방죽으로 가서 투신 자살하였던 것이다.

나는 조인석의 자살도 주실 조씨들의 전통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심과 목숨 중에서 자존심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칠십 나이가 되면 어지간한 수모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 마련인데, ‘삼불차’의 지조를 중시하였던 선비 조인석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로부터 이런 치욕을 받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조인석은 조지훈의 직계 조부다. 1950년 당시 30세였던 조지훈은 칠십 조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왕 족보 조사한 김에 조인석의 부친도 알아보자. 석자 위 항렬은 토(土)로 기자(基字)다. 조인석의 부친 조승기(趙承基, 1836∼1913년)는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하였다. 조승기 역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실 조씨들은 학자도 많고, 그 학자들도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 백면서생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날릴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실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됐음은 물론이다.

지리적 안목으로 분석

경북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처럼 지조와 학문을 갖춘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재인문(財人文)의 삼불차를 4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방이 있었다면 그 비방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방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그것이다. 이판이란 눈에 안 보이는 데이터(in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사판이란 눈에 보이는 데이터(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다분히 신비적인 파악이라면, 후자는 요즘 말로 합리적인 파악이다. 사판이 드러난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이판은 배후에 잠재하는 부분에 대한 분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판과 사판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입장이다. 한쪽만 보아서는 미급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을 모두 통과해야 실수가 적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란 말이 나왔다. 이걸로 보나 저걸로 보나 답은 하나로 나왔으니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판사판이다.

불교의 화엄철학에서는 이 경지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고 표현한다. 이(理)와 사(事)에 모두 걸림이 없는 경지다.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사(國師)나 왕사(王師) 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정도의 경륜은 이사무애의 경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요즘 공식적인 국사 제도는 사라졌지만 가톨릭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어느 정도 국사 노릇을 한 듯하다. 최근 20년간 대통령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김추기경 하고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사판적(事判的) 분석(分析)이야 세상사에 밝은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제쳐두고, 주로 이판적 입장에서 주실마을의 인물배출 배경을 뜯어보자.

이판의 입장이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삼재(三才)의 안목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천문이란 시간, 즉 타이밍을 가리킨다. 지리란 넒은 의미로는 환경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명당이다. 인사는 넒은 의미로는 천문과 지리를 매개하는 존재인 사람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인간의 몸에 대한 식견을 지칭한다.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일이 성취된다.

대만 총통의 국사를 역임한 남회근(南懷瑾, 1918∼) 선생은 그의 역저 ‘역경계전별강(易經繫傳別講, 국내에서는 ‘주역강의’로 번역돼 있음)에서 이를 명리(命理), 지리(地理), 의리(醫理)로 요약한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에 따르면 식자라면 반드시 이 삼리(三理)를 공부해야 한다.

자기 운명의 이치인 명리(命理)를 알아야 천시(天時)가 언제 오고 가는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따른 진퇴를 결정할 수 있다. 지리(地理)를 알아야 살아 있을 때의 양택(陽宅)과 죽은 후의 음택(陰宅)을 제대로 잡을 수 있고, 의리(醫理)를 알아야 병의 원인을 파악해서 몸을 건강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삼리 중에서 의리는 70년대 초반 한의학이라는 제도권 학문에 들어가 학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리와 명리는 여전히 제도권 밖에서 ‘학문적 시민권’도 없이 서성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이긴 하지만 지리도 학문적 영역으로 조금씩 진입하는 분위기다. 서울대 최창조 교수가 한국사회의 식자층에 지리를 소개하면서 인식이 약간 개선된 것 같다. 미신 잡술이라는 종래의 인식에서 약간 벗어나 풍수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제일 천대받는 것이 명리다. 명리는 아직도 미아리 골목에서 잠자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새버렸지만 다시 주실마을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 주실마을은 삼리 가운데서도 지리적 안목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문화현상은 한국의 토양에서 우러난 문법으로 해석해야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나는 그 문법이 바로 지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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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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