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아메리카대륙의 ‘개미 허리’ 파나마

미국과 대결 끝에 파나마 운하 돌려받은 작지만 당찬 나라

  • 만화가 조주청

    입력2005-04-08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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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카대륙의 ‘개미 허리’ 파나마

    대서양 쪽에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화물선들.

    16세기 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의 열강들은 황금과 향료를 찾아 앞다퉈 신비한 미지의 땅, 동양으로 향했다.

    목선에 돛을 올리고 남십자성을 좌표로 삼아 대서양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남미대륙 끝과 남극대륙 사이, 즉 풍랑이 미친 듯이 날뛴다는 드레이크 해협을 건너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려다 수많은 사람이 고깃밥이 되기도 했다.

    1520년 남미대륙의 뾰족한 끝 부분에 있는, 강처럼 가느다란 해협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이었다. 풍랑 없고 안전한 마젤란 해협은 이후 세계사를 바꿨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후 항해자들은 마젤란 해협의 안전한 뱃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빠른 지름길을 찾았다. 북미대륙과 남미대륙을 잇는 잘룩한 끈, 파나마의 땅을 뚫어 수로를 만드는 아이디어가 제기됐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1880년 프랑스인 레셉스가 7년 내에 운하를 완공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듬해에 양대양 주식회사를 설립,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했다.



    레셉스는 11년 전 수에즈 운하를 완공했다는 자신감으로 덤벼들었지만 이곳 지형은 수에즈와는 달랐다. 수에즈 운하는 수평식으로 모래땅을 파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한 것이지만, 파나마는 가로막은 땅이 너무 높고 지질은 암반투성이였던 것.

    운하를 계단으로 만들어 배가 산 위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가는 갑문식으로 설계를 바꾸었으나, 자금 부족에다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려 건설공사 중 많은 노무자가 죽어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9년 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레셉스를 믿고 양대양 주식회사에 투자한 프랑스의 수많은 갑부들은 파산하고 말았다.

    레셉스가 손을 들고 난 후에도 아메리카 대륙의 잘룩한 허리에 운하를 뚫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만 하면 떼부자가 되리라는 망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니카라과가 자국 땅에 운하를 건설하려 했지만 몇 달 못 가 제정신을 차리고 공사를 중단했다.

    아메리카대륙의 ‘개미 허리’ 파나마
    19세기 중엽 멕시코로부터 방대한 땅을 빼앗은 미국은 중남미를 지배하던 스페인과 일전을 벌여 압승했다. 신대륙의 패권을 한손에 거머쥔 미국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운하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03년 미국은 파산한 레셉스의 운하 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들였다.

    그때까지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한 주였다. 미국은 운하 건설과 건설 후의 운하 운영권을 단독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지역의 치외법권을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사들이려 했으나 콜롬비아 상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미국은 세력이 미약했던 파나마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해 콜롬비아로부터 분리독립 투쟁을 하도록 사주했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인해 콜롬비아는 결국 손을 들고 파나마는 독립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와 황열병을 막는 대대적 방제사업에 증기삽, 준설선이라는 새로운 건설장비가 등장했다. 또 유럽에서 1만2000명, 서인도 제도에서 3만1000명의 노동력을 투입해 지상 최대의 대역사는 1914년 8월15일 마침내 끝날 수 있었다. 8만1237t급 퀸 엘리자베스호가 최초로 이 운하를 통과했다.

    남한 땅의 4분의 3에 불과한 작은 땅덩어리에다 인구 260만 명의 이 가난한 나라는, 자기 나라 한복판에 있는 파나마 운하로 수많은 배가 들락거리며 통행료로 던져주는 달러 보따리를 냉큼냉큼 받아먹는 미국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운하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야심과 지원에 따라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떨어져 나왔으니, 당시 미국과 파나마가 맺은 운하에 관한 협정은 일방적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작성되었던 것이다. 운하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이 미국인과 미국 군대가 주둔하는 미국 땅이 된 것이다.

    1968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토리호스 장군은 1977년 미국과 담판을 벌여 1999년 12월31일에 파나마 운하를 돌려받기로 약속을 받았다. 그 날짜가 코앞에 닥치자 미국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파나마 운하 관할권과 운하 지역 내에서 미군 주둔을 연장하려 했다. 그러나 파나마는 노(No)로 일관했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독립일은 바로 파나마 운하의 관할권이 우리에게 돌아온 2000년 1월1일이 되는 겁니다.”

    파나마 국민에게 새 밀레니엄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새 천년의 장엄한 문이 열리면서 파나마 운하는 드디어 파나마 국민에게 돌아왔다. 파나마 운하 반환식에 중남미 6개국 정상이 참석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아메리카대륙의 ‘개미 허리’ 파나마
    ▶여행안내

    파나마는 중미 지역에서 코스타리카 다음으로 잘사는, 안정된 나라다. 파나마에 가면 파나마 운하를 건너는 크루즈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운하를 관통하는 관광 크루즈가 많지 않다. 파나마시티의 에코투어 여행사가 12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매주 토·일요일 두 차례 운하 관통 크루즈를 하고 있다. 운하를 따라 이어진 도로로 택시를 빌려 관광할 수도 있다.

    대서양 쪽 운하 입구이자 파나마 제2의 도시 콜롱은 위험한 도시다. 대낮에도 이방인은 혼자 거리를 걸어다닐 수 없을 정도다. 파나마 운하를 구경한 후엔 초코 나 엠베라, 엘바예 등 스페인 정복자를 피해 오지로 달아났던 인디오 마을을 방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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