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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대체 불가능 아티스트’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대체 불가능 아티스트’ 영원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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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서 뒷문까지 고작 다섯 걸음 정도인 작은 집에서 자랐지만 아이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머니가 연주하는 아버지의 기타에 맞춰 노래를 배웠다. 아버지의 기타는 감히 손댈 수 없는 금기였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어머니의 묵인 아래 가끔씩 연주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곱 살 티토가 기타를 튕기며 놀다가 줄 하나를 끊고 말았다. 이를 안 조지프는 채찍을 들고 아이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티토는 “놀다가 기타 줄을 끊은 것이 아니고 연주하다가 끊은 것”이라고 항변했다. 아버지는 더욱 화가 나 “그 잘난 연주를 해볼 테면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티토가 기타를 치고 둘째 재키와 넷째 저메인이 노래를 부르자 분노로 이글거리던 아버지의 눈빛은 이내 놀라움과 흥분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의 연주 솜씨가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처음으로 인자하게 안아 줬다. 아이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조지프는 없는 살림이지만 적극 후원하기로 마음먹고 다음 날부터 아이들과 함께 맹훈련에 돌입했다.

형과 누나의 노래 소리를 듣고 자란 마이클이 네 살 때 부엌에서 흥얼거리던 소리는 너무나 청아하고 아름다워 마치 천사의 음성 같았다. 조지프는 큰 기대를 갖고 마이클을 그룹에 참여시켰고, ‘잭슨브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작은 동네 공연팀을 만들어 무대 훈련을 시켰다. 이후 잭슨가 아이들은 각종 지역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우승 트로피를 끌어모았다. 재키, 티토, 저메인, 말론 그리고 마이클의 그룹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애초에 잭슨브러더스의 리더는 열두살 장남 재키였다. 하지만 다섯 살 마이클은 에너지와 카리스마 넘치는 춤으로 탁월한 무대 장악력을 보여줬다. 그가 부르는 애잔하고도 서정적인 노래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 열광에 팀의 리더는 만장일치로 막내 마이클이 맡게 됐다. 개리의 클럽에서 고작 7달러를 받으며 시작했지만 이들은 이내 다른 도시까지 진출하며 팀의 이름을 ‘잭슨파이브’로 개명했다.

대박 터뜨린 ‘잭슨파이브’



잭슨파이브는 1968년 시카고 리갈 극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콘테스트에서 3주 연속 우승했고, 그 여세를 몰아 꿈의 무대인 뉴욕 아폴로극장에 오르게 된다. 아홉 살 마이클의 신들린 노래 솜씨에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고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가 소속된 레코드사 모타운의 러브콜까지 받게 된다.

모타운 최고경영자(CEO) 베리 고티는 음반사 직원에서 시작, 작곡가를 거쳐 제작자로 변모한 산전수전 다 겪은 장사꾼이었다. 조지프는 계약서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서명을 했고, 이 불공정계약 탓에 그들은 모타운에 안겨준 수익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을 받게 됐다. 음반사의 이런 횡포가 당시엔 관행이었다. 마이클은 앨범 1장당 2센트, 싱글 곡은 고작 1.5페니 정도를 손에 쥐었다.

1969년 잭슨파이브의 ‘아이 원트 유 백(I want you back)’이 발매되자 전 세계가 열광했다. 그해 미국에서만 206만711장, 해외에서는 400만 장이 팔렸다. 가족들은 로스앤젤레스의 큰 집으로 옮겨 갔다. 뒤이어 나온 4곡 모두 빌보드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앨범 취입 이후 첫 콘서트인 1970년 5월 2일 필라델피아 컨벤션센터 공연에서 그들은 공항에 운집한 3500여 명의 팬이 지르는 환호성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흑인들뿐 아니라 백인 10대도 많았다. 1972년 10월 30일 시작된 유럽 투어 때도 잭슨 형제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이 런던에서 타고 다니던 리무진은 극성 팬이 몰려드는 바람에 파손돼 1만2000달러의 수리비 견적이 나왔다.

조지프는 모타운을 떠나 미국 최대 음반사로 꼽히던 에픽에서 새 둥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전의 불공정계약 탓에 잭슨파이브라는 명칭은 모타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그룹명을 ‘더 잭즌스’로 바꿔야 했다. 차남 저메인은 모타운 CEO 베리 고티의 외동딸 헤이즐과 결혼한 터라 모타운에 그대로 남았다.

아버지의 그늘

에픽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으로 마이클은 더욱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프로듀서계의 미다스 손 퀸시 존스를 만나면서 화려한 무대 감각까지 익히게 된다. 하지만 그 무렵만 해도 마이클 잭슨은 더 잭슨스의 싱어이자 막내일 뿐이었다.

에픽의 제안으로 마이클은 1979년 더 잭슨스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디스코풍 독집 앨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을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다. 잭슨 형제들은 1984년까지 그룹 활동을 계속했지만, 이 앨범은 마이클의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가족들은 서운함을 넘어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마이클은 잭슨이라는 이름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아티스트의 영역을 구축할 때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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