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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충북 보은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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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속리산 문장대.

충북 보은 땅에 들어가려면 예전에는 청주를 지나 피반령 높은 고개를 타넘어야 했지만, 이제는 청원상주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그런 수고로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회인(懷仁) 고을에 갓 부임하는 사또마다 피반령 고갯마루에서 첩첩산중의 제 고을을 내려다보며 관원살이가 아니라 귀양살이를 하러 왔구나 하며 눈물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그들이 오늘의 회인나들목을 본다면 어떤 감회에 젖을까.

톨게이트를 나와 처음 만나는 물줄기가 회인천이고 들판 너머의 마을이 눌곡리다. 마을에 이르기 전, 길가에 우람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와 그 뒤편의 고풍스러운 기와채를 보곤 나그네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되는데, 이곳이 풍림정사다. 140년 전, 성리학의 명맥을 되살리는 일이 곧 국운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여겨 이 마을 출신 유학 박문호가 지은 서당이다. 이이, 송시열을 배향하며 공자의 가르침을 뜻하는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박문호의 후손들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는 까닭에 옛집도 정갈하게 정비돼 있다. 경전을 읽는 학동들의 낭랑한 목소리조차 오래전에 그친 옛집 뜰에는 매미 소리만 가득하다.

“귀양살이 하러 왔구나”

마을에서 회인 면소재지는 지척이다. 나그네가 보은 땅에 와서 굳이 회인부터 들른 이유는 두 가지다. 보존 상태가 좋다 는 회인 인산객사를 둘러보고 시인 오장환의 생가터를 구경하기 위해서다. 초행임에도 파출소와 주유소를 지나면 잇달아 식당이며 가게들이 나타나는 면소재지의 거리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다. 지나치는 사람들 또한 금세 악수를 나눠도 무방할 듯싶은 친근한 얼굴들이다. 교회가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편으로 꺾어들자 객사의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오락가락하는 장맛비 때문인가. 정당(正堂)을 마주하고 선 마당에도 인적이 없다. 키 작은 집들이 들어선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크고 널찍한 객사(客舍) 건물은 제법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대개의 객사들이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속 건물을 두고 앞쪽에 중문과 대문, 행랑을 배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엔 정당과 대문만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설치됐던 객사는 주로 지방 나들이하는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었지만 지방 관장의 거처로 사용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곳 객사는 일제 강점기 초등학교 교사로, 또 면사무소로도 사용됐고 광복 후에는 농촌지도소로 이용됐다는 안내글이 있다. 훌쩍 떠난 시간과 함께 옛사람의 족적이 사라지고 덩그렇게 건물만 남은 곳에서 다시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도리밖에 없다.

객사를 나와 면사무소 쪽으로 가다보면 이내 시인 오장환의 생가 터와 그의 문학관을 만난다. 근래 곳곳에 복원 조성된 생가 및 기념문학관들처럼 주변이 깨끗이 정비돼 있고 건물들 또한 규모가 있다. 이 또한 좋은 시대를 만난 문학인들의 복일 테지만 주변과 어우러져 살던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홀로 도드라져 있는 모양새는 어색하기도 하다.

1918년 이곳 태생이니 아직 살아 있다 치면 시인은 올해 95세가 되지만, 그는 오래전 6·25전쟁 중에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넷. 이 산골 작은 마을에서 자란 그가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휘문학교를 다녔으니 시쳇말로 개천에서 용 난 셈이다. 휘문에서 정지용에게 배움을 입고 열다섯 어린 나이에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문재도 빼어났던 모양이다.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좇으며 작품 활동을 한 그는 주로 서정적인 시를 썼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는 급격한 사상적 변모를 보였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계급의식을 담은 시를 쓰는가 하면, 좌익 계통의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월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보은 읍소재지를 빠져나와 속리산으로 가다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산허리를 두르고 있는 산성이 눈에 잡힌다. 수년 전 복원 작업까지 마친 삼년산성이다. 삼국시대 때만 해도 보은의 지명이 삼년군이었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에 이런 이름이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신라는 이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유리한 거점을 얻을 수 있었다.

성문 앞에 차를 두고 산책 삼아 성벽을 따라 걸어보는 일이 썩 괜찮다. 산길이 완만하고 주위가 고즈넉해서 더욱 그렇다. 성 쌓기에 얽힌 비극적 전설은 이곳에도 있다. 장사로 태어난 오누이가 서로 힘자랑을 하고 결국 어머니가 아들 편을 들어 누이를 죽게 한다는 이야기다. 오빠보다 먼저 성을 쌓은 누이가 엄마의 해코지로 죽임을 당한다는 이 전설에는 ‘딸아이 버리기’의 뿌리 깊은 습속이 배어 있다.

단절의 땅에 귀 대면 들린다, 외로운 발소리가

속리산 만수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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