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거시지표 믿지 말고 재벌 엄살에 속지 말라”

  • 이형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1 0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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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경부 장관 물망에 올랐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번에도 ‘낙점’을 받지 못했다. 장관감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선명한 개혁성’ 때문이었고, 결국 입각하지 못한 것은 ‘지나친 개혁성’ 때문이었다는 평가다. 그의 한국경제 진단과 개혁논리를 들어봤다.
    아 이러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김종인(金鍾仁·60)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이름 석 자를 비추는 빛이자 어둠을 드리우는 그림자다.

    김 전수석은 지난해 5월과 올해 1월 단행된 개각을 앞두고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 1순위로 꼽혔다. 지난 8·7 개각 직전에도 진념(陳) 장관과 함께 재경부 장관 물망에 올랐다. 개각 때마다 경제정책의 수장감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그의 선명한 개혁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90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으면서 토지공개념을 도입,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조치로 대표되는 강력한 부동산 투기 방지책을 몰아붙였고, 주력업종 선정 및 여신규제 정책 등으로 재벌의 고삐를 죄려 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극동그룹 녹지해제, 삼성그룹 상용차사업 승인 같은 사안에 대해 특혜시비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당시 한 재벌총수는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8·7 개각을 앞두고 김 전수석의 이름이 다시 거론된 것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경제개혁에 힘을 실어 대미를 장식하는 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시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 차례 개각에서 모두 ‘물’을 먹었다. 낙점을 받지 못한 이유 또한 그의 개혁성향에 있다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개혁성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우려 때문에 고배를 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8·7 개각 직전은 현대그룹이 계열분리안을 놓고 정부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시점이라 재벌개혁론자인 김 전수석이 입각해 소신껏 ‘칼’을 휘두를 경우 퇴로가 막힌 현대측이 이판사판의 저항을 불사하리라는 얘기도 있었다. 증권가에는 재벌그룹들이 그의 입각을 막기 위해 정치권 실세에게 총력 로비를 폈다는 정보지도 나돌았다.

    비현실적 개혁엔 반대

    이 대목에서 그의 개혁관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개혁논리를 갖고 있기에 그렇듯 상반된 반응을 얻는 것일까. 그는 한국경제의 실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경제개혁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경제학자 출신인 그의 ‘처방전’은 또 어떤 내용일까.

    이러저러한 용건으로 만나 보고 싶다고 했더니 수화기에선 “난 뭐, 할 말도 없는데”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인터뷰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오겠다면 막지는 않겠다는 뜻 같았다. 그래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아 갔다.

    ─이번에는 입각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만….

    “허, 참. 본인은 뜻이 없는데 주변에서 왜들 그렇게 말을 만들어내는지…. 내가 그런 자리에 가야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스스로도 개혁성향이 지나치다고 보십니까? 재경부 장관 기용설이 나돌자 대기업들이 바짝 긴장했다고 하더군요.

    “경제에 문제가 있고, 개혁으로 그 근본 원인이 제거된다면 개혁을 하는 수밖에요. 하지만 내가 아무리 개혁성향이 강하다 해도 현실에 맞지 않는 개혁엔 찬성하지 않아요. 내가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좀 강도높은 정책을 추진했다고 너무 개혁적이라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90년에 금융실명제를 유보시킨 사람도 나예요.

    나는 세금 공부를 누구보다 많이 한 사람인데,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실시하면 금융실명제는 저절로 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왜 금융소득종합과세는 놔두고 굳이 시장에 충격을 주면서까지 금융실명제를 도입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 ‘반개혁적’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반대했던 겁니다. 경제정책에도 전략과 전술이 있어요. 전략적 목표는 같아도 전술은 주변 여건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기본원칙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재벌들과는 별로 좋은 사이가 못되셨죠?

    “경제수석 시절 재벌더러 ‘비업무용 부동산 팔아라’ ‘핵심사업 빼놓고는 다 정리해라’고 했으니 그 사람들은 땅 뺏고 집 허무는 걸로 알았겠죠. 재벌들이 자동차, 정유 등 이미 시설과잉 상태인 분야에 또 진출하겠다고 덤벼들기에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자유시장경제에서 왜 마음대로 못하게 하느냐, 당신 공산주의자 아니냐’고 반발하더군요.

    아니, 그러는 자기들은 ‘자유시장경제’라서 그렇게 몸집을 키울 수 있었습니까? 과거 우리가 자본이 부족한 후진국이었을 때 정부가 투자효율을 높이기 위해 재벌에 계획경제체제 식으로 자본을 배분하고 시장진입을 자유롭지 못하게 해서 그들에게 독점적 지위를 준 것 아닙니까.

    그처럼 비정상적인 경제구조에서 안주했기에 재벌은 어느 업종에서라도 영원히 시장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이윤과는 무관하게, 오직 시장에서 자기 영역을 넓힐 목적으로 무턱대고 과잉투자를 계속했어요. 97년에 외환위기가 왜 왔습니까. 이런 과잉시설, 과잉부채 때문에 온 것 아닙니까.

    그들은 그런 논리로 기업을 경영해온 탓에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시장의 룰도 무시합니다. 룰을 지키라고 하면 다들 싫어해요. 룰 밖에서 룰과 무관하게 행동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국가권력이 그것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죠. 정부는 심판입니다. 축구경기에서 라인 밖으로 뛰쳐나가 골을 집어넣는 선수를 심판이 그대로 둔다면 관중은 무슨 재미로 경기를 봅니까. 룰만 철저하게 지키면 간섭하지 말자는 게 내 주장이에요.”

    화제가 재벌개혁으로 옮겨지자 톤이 점점 높아졌다. 학자답게 미국 경제사까지 ‘실증사례’로 끌어들였다.

    “미국이 자본주의체제의 본산이라고 해서 자본가들이 멋대로 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물론 건국 초기에는 다들 자유롭게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경제세력이란 게 형성되고, 이것이 국가경제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자 T.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F.루스벨트 대통령 시절까지 독점규제 같은 룰이 매우 타이트하게 짜였어요. 그래서 기업들이 엄청나게 반발했지만, 정부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니까 나중엔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결국 옳다는 사회적 인식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스탠더드 오일이나 AT·T 같은 초거대 기업의 독점이 해체된 것 보세요. 마이크로소프트는 또 어떻습니까. 빌 게이츠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신성 불가침의 국가적 영웅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룰에 안 맞으니까 저렇게 제재를 하잖아요. 자유경제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이 정도 제약은 감내해야 됩니다. 이런 것도 못 참아내면 자유경제 질서가 무너져요.”

    외환위기는 극복,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재벌들이 이젠 좀 정신 차리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나가는 것 같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가령 기업지배구조를 통제하기 위해 너도나도 사외이사제를 도입했지만, 과연 사외이사들이 대주주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있습니까? 사외이사가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제도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지난 2년 반 동안 정부와 경제주체들이 나름대로 개혁 드라이브를 지속한 덕분에 비교적 빨리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사실이에요. 외환보유고가 900억 달러나 된다니까 97년 말처럼 국제금융시장에서 구제금융을 애걸할 일은 이제 없겠죠. 이건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은 외환위기를 가져온 근본 원인이 제거됐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데도 우리의 금융여건은 외환위기 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금이 순환되지 않고 있고, 그때 부실했던 금융기관들은 지금도 부실해요. 공적자금이니 워크아웃이니 해서 100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는데도 금융기관들이 정상화될 기미가 없잖아요. 이런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금융기관들의 주가예요. IMF체제로 들어가면서 폭락한 주가가 아직도 그대로거든요.

    금융기관의 부실은 결국 실물경제 사이드의 부실에서 온 것인데, 이 부문도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했기는 마찬가집니다. 이것도 주가를 보면 알아요. 몇몇 블루칩을 빼놓고는 상장기업 가운데 주가가 외환위기 때보다 오히려 떨어진 곳이 많아요.”

    경제개혁의 핵심인 구조조정이 실속없이 겉돌았다는 얘기다. 김 전수석의 진단은 이렇다. 우리는 후진국 상태에서 경제개발을 본격화했기 때문에 일정 기간은 계획경제체제가 효율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75년 3차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이 끝난 뒤로는 우리 경제가 더 이상 이런 시스템으로는 운영될 수 없다는 게 누차 입증됐다. 당연히 경제정책의 기조도 변해야 했다. 자원집중 상태를 해소하고 군살을 빼 효율을 높여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해본 경험이 없다. 정부가 어정쩡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사이에 재벌은 계속 확장했고, 금융기관은 돈을 ‘수집’하기만 했지, 들어온 돈을 운용해 수익을 내는 본업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었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돈을 정책적으로 임의 배분하는 관치금융 메커니즘이 잔존했기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구조조정이란 말은 봇물을 이뤘지만, 대개는 엇비슷한 업종끼리 적당히 뭉뚱그린 뒤 이것저것 떼내 한 회사에다 덜렁 붙여주는 식이었다는 것.

    거시지표의 실체

    ─첫 술에 배부를 수야 있겠습니까. 아무튼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2년 여 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빠른 회복세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거시경제지표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거시경제지표는 단기적으로는 얼마든지 좋을 수도, 또 좋게 만들 수도 있어요. 외환위기 얼마 전까지도 거시지표는 좋았고, 그래서 ‘펀더멘털에는 이상없다’고들 한 것 아닙니까.

    은행에서 계속 돈을 끌어와서 투자를 많이 하면 성장률도 높아지고 고용문제도 개선돼 거시지표가 좋아집니다. 부채는 거시지표에 잡히지 않으니까. 우리가 99년 이후 두자리수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지만, 성장률 대비시점인 98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을 감안하면 큰 의미가 없어요. 게다가 그간 벤처니 뭐니해서 잔뜩 투자를 해댔으니 성장률은 오르게 돼 있어요. 명심해야 될 것은 과잉부채, 과잉시설 구조에선 아무리 거시지표가 좋아도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수출도 마찬가집니다. 수익은 생각 않고 무작정 수출만 늘린다면 국제수지야 좋아지겠지만, ‘수익없는 수출’로 뚫린 구멍은 결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메우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구조를 탄탄하게 하면서 거시지표를 유지하는 데 신경써야 해요.”

    외환위기가 없어도 경제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은 외환위기를 겪은 적이 없지만, 10년 가까이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91년부터 지난해까지 1조2000억 달러를 투입해 수요를 창출하려고 애썼지만, 그 기간의 연평균 성장률은 1.4%에 불과했다. 구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경기 부양으로만 경제를 정상화하려다 보니 비용효과가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도 일본은 경기부양책을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이라도 있었지만, 우리 형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 2/4분기부터 GDP 성장률이 한 풀 꺾이자 1/4분기에 경기가 정점을 지난 게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만일 경기가 정말 정점을 쳤고 거시지표가 믿을 게 못된다면 우리 경제가 연착륙할 것이라고 장담할 상황도 못된다는 뜻입니까?

    “지금의 거시지표가 안정된 기반 위에서 좋아진 것이냐, 아니면 불안정한 구조 속의 일시적인 호전이냐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죠.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경제를 연착륙시킬 수 있는 정책도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경제를 연착륙시키려면 과잉투자, 과잉소비를 못하게 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세금을 많이 걷거나 금리를 올려야 합니다. 미국은 경기 과열을 막고 경제를 연착륙으로 끌고 가기 위해 지난해 6월 이후 일곱 차례에 걸쳐 금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업 부실이 워낙 많은데다 구조조정까지 앞두고 있어 금리를 올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자동차가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는데도 브레이크가 없어 속도조절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구조가 불안정한 상황에 소프트 랜딩으로 이끌 툴(tool)도 없고, 행여 요즘 외신에서 자꾸 떠들어대는 것처럼 하드 랜딩으로 갈 경우 이를 쳐올릴 수 있는 툴도 없다면 정책결정자로선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어요.”

    ─만일 김 전수석께 권한이 주어졌다면 당장 어디부터 손을 대겠습니까.

    “그런 가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다만 상식선에서 ‘경제는 속이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시장경제에서는 감출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더구나 IMF체제 이후 우리 경제는 대외적으로 완전히 개방됐기 때문에 국제금융시장도 우리 경제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요.

    이런 현실에서 경제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모든 경제주체의 컨센서스를 이뤄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컨센서스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야 해요. 다 보여준 상태에서 함께 경제를 걱정해야죠. 그런 뒤에 ‘우리 경제 형편이 이러하니 더 확고하고 안정된 경제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앞으로 이런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천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질적인 해결책을 도출해낼 수 있어요.”

    ─지금까지 정부가 경제 실상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뭘 숨겼다기보다는 회피했다고 할까요. 경제정책을 담당한 사람들에겐 경제에 문제가 있을 때 거기에 달라붙어서 문제를 풀어가는 책무가 있는데, 정작 문제를 향해 달려들진 않고, 멀찌감치 물러나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만 거듭하는 인상을 받았어요. 어떤 상황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호도하거나 회피하려고 들면 경제는 실패합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구소련의 와해과정이 그걸 잘 보여주잖아요.

    소련은 50년대 중반에 이미 중앙계획경제의 통제방식이 비효율적이란 걸 깨달았어요. 57년 20차 소련공산당대회 연설문에 벌써 ‘자본주의 경제운영 방법의 일부를 도입하지 않으면 소련경제의 장래가 어둡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흐루시초프가 이걸 시도했는데, 기득권을 잃을까봐 우려한 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견제로 실각했죠. 그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기존 경제체제를 답습했고, 그렇게 20년을 끌다가 저렇게 무너진 것 아닙니까. 변화된 경제상황을 인정하고, 공개하고, 그것에 적응했다면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었을 텐데,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나라가 흔들린 거죠.”

    실상을 일부러 숨기지 않았다면 회피했거나 몰랐다는 얘기다. 96년에 국제수지가 처음으로 230억 달러 적자로 돌아섰는데도 경제당국은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외환위기의 신호가 감지됐는데도 무시했다는 것이다. 막상 외환위기가 닥친 후에도 노동법이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금융감독 관련법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게 원인이라는, 본질을 벗어난 어설픈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와 금융기관은 구조조정에 착수한 시점에도 정확한 부실규모를 공개하지 않거나 축소함으로써 효과적인 구조조정을 더디게 했다. 국민이 받게 될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이 또한 실상을 은폐해 컨센서스를 회피한 행위였다.

    원기 회복했을 때 수술해야

    “옛날 이야기 더 해볼까요? 85년에 외환사정이 좀 불안해지자 당국은 당장에 원화를 평가절하했어요. 그 해 9월에 플라자협정으로 엔화며 유럽화며 대만화까지 다 절상했는데, 우리는 절상은커녕 1달러에 890원선까지 절하했어요. 그 덕분에 86년부터 89년까지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하자 경제기획원에선 ‘이제 영원한 흑자국으로 전환한다’ ‘흑자국으로 돌입했다’고 떠들었어요. 그래놓고는 89년 11월 들어 분위기가 싹 바뀌자 ‘경제위기가 온다’며 꼬리를 내렸어요.

    90년에는 ‘외환이 넘쳐 통화운영에 문제가 있다’며 통화안정채를 발행하고, 해외 부동산 매입 자유화, 해외여행경비 자유화 같은 정책을 내놨다가 1년도 못가 뒤엎었죠.

    경제를 이런 식으로 운영해선 안 돼요. 우선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정책담당자들은 무엇보다 말을 아껴야 해요.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공연히 놀라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당장 핸들링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돼요.”

    ─개혁에는 다소간의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 또한 서로 다를테니 컨센서스를 끌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습니다.

    “사실은 IMF체제로 들어간 직후가 국민적 컨센서스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고 봅니다. 약간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우리 경제가 정상화해서 민생을 편안케 할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그냥 주저앉을 것이냐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긴장이 많이 풀렸어요. IMF체제에서 벗어났다는 정부 발표도 있었고,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성장률이 계속 두자리수였다고 하니 ‘이제 뭐 걱정할 게 있겠나’ 하는 분위기로 변했어요. 그러니 지금 강도높은 개혁을 하자고 하면 ‘그 어렵던 시절에도 안 한 것을 왜 지금처럼 좋은 시점에 하자는 말이냐’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당시엔 수술을 하고 싶어도 몸이 워낙 허약해서 칼을 댔다간 생명을 잃을 것 같아 수술을 미뤘지만, 이제는 웬만큼 원기가 회복됐으니 지금이야말로 과감하게 수술해서 병의 원인을 도려내야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대통령 임기 후반에 들어서면 정책집행의 강도가 약해지게 마련이에요. 이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입했는데도 구조조정이 왜 지지부진하다고 보십니까.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죠. 한국 금융기관이 국제금융시장에서 독자 생존하려면 금융기관과 기업의 관계가 금융기관의 잣대에 따라 좌우돼야 합니다. 금융기관도 기업입니다. 이윤을 극대화해서 주가를 올려야 해요. 금융기관이 주주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부실기업에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돈을 대주진 않아요. 상대가 재벌이든 중소기업이든 판단은 금융기관 스스로 내리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하는 건 정부 몫이지, 은행더러 알아서 하라고 할 일이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기업부실 처리과정을 보면 항상 은행에 모든 걸 떠안겼어요. 그래서 은행들이 이꼴이 된 것 아닙니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가면 금융기관 정상화는 요원해요.

    작년에 독일에 갔을 때 150년 역사의 독일 최대 건설업체가 부도 위기를 맞았어요. 채권은행인 도이체방크는 그런 기업조차 가차없이 부도를 내겠다고 엄포를 놓더군요. 그게 금융 논리죠. 그런데 한꺼번에 10만 명의 실업자가 생길 판이니 정부가 그냥 두고볼 수 없었는지 결국 총리가 도이체방크 본점이 있는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 정부가 부실의 일부를 떠맡기로 하고 부도를 면하게 합디다. 정치적 판단은 정치권에서 하되, 그 판단이 금융기관에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진 거죠. 그런 판단까지 금융기관에 맡기면 금융기관은 정부 눈치를 봐야 하고, 대규모 부실이 드러나면 금융기관에도 타격이 올 테니 계속 시간을 끌 수밖에요.”

    그는 금융기관에도 잘못이 많다고 지적했다. 부실기업에 무리하게 출자전환을 해준 것이 그 예. 워크아웃 기업에 대해선 과감한 감자가 선행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자전환을 하더라도 감자를 하면서 해야 경영권 문제도 잘 풀리고 매각하기도 쉬운데, 눈곱만큼 감자하는 시늉만 하다 보니 손실 정산도 신속하게 이뤄지지 못했다. 구조조정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융권 구조조정은 실물 부문, 즉 부실기업의 구조조정과 병행하지 않으면 비용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미봉책은 이제 그만

    투신권이 돈 흐름의 허리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돈이란 돈은 다 은행금고에 쌓여 단기자금으로 머물고 있다. 그러자 정부는 투신권으로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비과세 상품을 허용하는 등의 흡인책을 내놓았다. 김 전수석은 이런 대책이 한치 앞을 못 내다본 미봉책이라고 혹평했다.

    “난센스예요. IMF체제 이후 세제가 재분배 기능을 못해 빈부격차가 심해졌다고 하는데, 수십억, 수백억씩 가진 사람들이 그런 비과세 상품에 돈을 몰아넣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금융기관에 가는 돈에 대해선 과세하고, 투신으로 가는 돈에는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것도 형평에 맞지 않아요.

    또 자금 회전이 안 된다고 사채인수펀드 같은 걸 만든다는데, 그렇게 되면 금융기관들이 거기에 자금을 출연해야 돼요. 그렇게 사들인 사채가 나중에 현금화 될지 안 될지 누가 압니까. 이런 걸 사들이면 국제금융시장에서 또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일 거예요.

    돈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성과가 안 보이는 투신을 무슨 수로 회생시키겠다는 겁니까. 허리에 디스크가 생겼으면 디스크 수술을 해야지, 반창고 한 장 달랑 붙인다고 치료가 됩니까? 과거에는 돈이 국제거래 결제수단이었지만, 이제는 돈 자체가 하나의 상품입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돈의 규모가 몇 년 전에 비해 수십, 수백 배 늘었어요. 그처럼 국제금융시장 여건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 금융권을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질질 끌고 가겠다는 겁니까.”

    오늘날 미국에서 IT산업의 번창으로 상징되는 뉴 이코노미 시대가 화려하게 막을 올린 것도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지독한 구조조정을 실시해온 결실이라는 설명이다.

    김 전수석은 “새 경제팀이 관록있는 전문 경제관료들인데다,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테니 일을 잘 처리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기대했다. 다만 좀더 긴 안목으로 문제에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새 경제팀은 ▲내년 2월까지 기업·금융부문의 잠재부실 처리를 마무리하고 ▲내년 말까지 시장경제원리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관행을 개선하며 ▲2003년까지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 부문 선진화를 추진한다는 구체적인 개혁 일정표를 제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 전수석은 “이런 일정을 내놓은 것은 어디가 잘못됐는지 새 경제팀이 잘 알고 있다는 뜻이지만, 구조조정은 1∼2년 사이에 되는 게 아닌만큼 우선은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IMF체제를 성공적으로 졸업했다고 평가받는 영국경제도 구조조정을 거쳐 제자리를 찾기까지 10년이 걸렸다는 것. 우리의 경우도 산적해 있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려면 ‘어느 달까지 뭘 하고 언제까지 뭘 끝낸다’는 식으로 접근해선 어렵다는 것이다. 설령 개혁 완수의 ‘월계관’을 다음 정권에 물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정확한 방향 설정과 지속적인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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