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에 가까운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이 가겠지만 그중에서 대표작 하나만을 남기고 모든 필름을 버려야 한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고 싶습니까. 신문 인터뷰에 보니까 ‘서편제’는 나의 얼굴이라는 얘기를 했던데요.
“나의 얼굴 운운은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기자가 그렇게 표현한 거지요. 기자들이 대표작 하나만 꼽아보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감독 입장에서 보면 흠 잡을 데가 없이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는 영화는 없습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드러난 성과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서편제’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선 흥행면에서도 한국영화 사상 최고 관객 동원 기록을 깼죠. 젊은 세대로부터 멀어져가는 판소리가 가치 있는 우리의 음악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서편제’를 계기로 전반적으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서편제’는 왜 그렇게 흥행에 성공했다고 봅니까.
“이태원 사장에게도 이 영화는 절대 흥행이 안될 거라고 김 빠지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사장도 동의하더군요. 단지 판소리의 맛을 영상에다가 끌어 담아 관객한테 전달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필름에 대해 그렇게 엄청난 반향이 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감독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가 워낙 먹고사는 데 급급한 세월을 살다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와 ‘서편제’의 제작이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춘향뎐’은 상영 기간이 짧아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이번 인터뷰를 위해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춘향뎐’은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너무 잘 아는 소재를 다루어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지 못했어요. ‘춘향전’은 14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지요. 누구나 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소재를 영화로 해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세계 시장에 배급돼 해외 교포들이 많이 봤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만 4개월을 상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할리우드 아류의 한국영화와는 달리 평가가 썩 좋았습니다. LA타임스와 뉴욕타임스가 극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으로서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고, 세계 속에서도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영화사로서는 출혈이 컸지만 크게 봐서는 소중한 것을 얻었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의 고향은 전남 장성이다. 판소리 발원지가 호남지방이다보니 성장기에 판소리를 들을 기회가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서편제’ 찍기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을 보다가 판소리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릴 만큼 관심이 적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판소리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습니까.
“해방 직후에 임방울 선생 공연을 본적이 있지만 판소리를 좋아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이청준씨의 ‘서편제’를 읽고 나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긴 몇 가지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판소리인데 소멸돼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서편제’를 찍을 당시에도 판소리에 대해서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습니다. 아마 감독이 소리의 깊은 세계에 빠져 있었으면 ‘서편제’ 같은 영화는 못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소리의 깊은 맛을 살려내려면 ‘서편제’와는 빛깔이 다른 영화가 나와야 했을 겁니다. ‘서편제’가 감독의 아마추어적인 수준을 영화에 담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웠을 거라고 생각하죠. 깊은 소리의 세계를 담다보면 관객이 부담스러워집니다.
‘서편제’를 할 무렵에 조상현씨의 춘향전을 듣게 됐어요. 조상현씨의 소리를 짤막짤막하게 들어봤지만 5시간 넘게 이어지는 완창을 들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누가 완창을 들어보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고 해서 조상현씨의 춘향전 완창을 들어보고 그 소리가 주는 감동에 매우 놀랐습니다. 춘향전 줄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뻔한 내용을 판소리로 하면서 사람을 엄청난 감동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래서 ‘서편제’를 하면서 언젠가 내가 소리에 좀더 빠지면 소리와 영상이 만나는 영화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리와 영상의 조화로운 만남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춘향뎐’에서 방자가 춘향이 부르러 뛰어가는 장면을 봄 여름 초겨울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찍었지만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만큼 어렵습니다. ‘서편제’를 찍으면서 판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 ‘춘향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귀가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닙니다. 판소리는 내부 깊은 곳을 건드리는 감동이에요.”
―‘서편제’와 ‘춘향뎐’은 지금 국립극장장하는 김명곤씨가 각본을 썼죠.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을 영화화하려고 준비하는데 문화부에서 아직 이념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작사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도리 없었지요. 1년 후면 노태우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영삼씨와 김대중씨 중에서 누구든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리되면 형편이 풀릴 것으로 판단하고 한 1년 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서편제’ 생각이 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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