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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22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주식회사 대한민국 일군 내조의 여왕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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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로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탄생 100주년이 됐다. 호암과 삼성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이 한창이다. 거대 기업을 일궈낸 호암은 거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자식을 둔 아버지였다. 누구보다 꼼꼼하고 정확했던 호암을 너그럽게 감싸고 슬하의 자식들을 모나지 않게 키워낸 박두을 여사를 조명해봐야 할 때다.
박두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

1986년 2월 77세 생일을 맞아 축하케이크를 자르는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

2월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을 맞아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렸다. 생전 호암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은 최근 기념 특강에서 “큰 산속에 있으면 그 크기나 깊이를 잘 알 수 없듯이 이 회장도 가까이 있을 땐 크기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떨어져 보니 정말 거인(巨人)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했다.

최 전 소장 말대로 호암이 50여 년간 기업을 일구어낸 역사는 한국의 산업사요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미소와 양조장 무역상에서 시작해 마지막엔 첨단산업인 반도체까지 씨를 뿌리고 성장시켰으니 말이다. 호암이 펼친 사업 범위는 제당 제분 모직 화학 제지 화섬 건설 조선 항공 엔지니어링 은행 보험 증권 부동산 리조트 광고 백화점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있다. 일찍이 업종별로 산업이 발전한 구미(歐美)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들고 뒤늦게 자본주의가 시작된 일본에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이 회장 자신도 생전에 펴낸 자서전 ‘호암자전’ 서문에서 이 일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삼성을 축으로 하는 사업 전개에 몰두하였다. 물론 그 도정은 역사의 파동과 무관할 수는 없었다. 어떤 때는 사업만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고 또한 어떤 때는 심혈이 맺힌 기업이나 자본을 단장의 심정으로 내놓아야 하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사회의 곡해는 한 개인에게는 때로 과중하였다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르다.’ 이러한 생각을 되새기면서 분노와 비애를 내일에의 용기로 바꾸려고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몇 밤이었다.”

좌절이나 추락 경험이 없었을 것 같은 호암의 내면도 실로 이렇게 복잡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위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라 한다면 ‘빛과 그림자가 뚜렷한 삶’이라고 하고 싶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록펠러조차 ‘무자비(無慈悲)’와 ‘자선(慈善)’이라는 심성이 한 몸에 녹아 있는 복잡한 인간이라는 것을 최근 나온 그의 평전을 읽으며 느꼈다. 위인의 성격은 때로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렇게 매정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고 잔인하다. 성취가 많다보니 실패도 많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갑부의 안방마님이 되겠소”



그렇기에 위인의 진면목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동반자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결정과 선택의 순간이 반복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는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고 버틸 힘을 제공했던 배우자, 특히 아내야말로 철녀(鐵女)가 아닐까.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아내 박두을 여사를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호암은 1910년 2월12일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해 8월22일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됐으니 호암은 민족과 국가가 최대 수난을 겪은 해에 태어난 것이다. 가정 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이었다. 호암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22년에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후 서울수송공립보통학교, 서울 중동중학교,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정경과에서 수학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호암은 부친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혼담이 이루어져 12월5일(음력)에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귀가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혼(早婚)이 관행이었다. 호암은 부친의 뜻에 따라 사모관대를 갖춘 대군복(大君服)차림으로 구식 혼례를 올렸다. 18세 되던 해 겨울이었다. 얼굴 한번 보지 않고 부모가 정해준 대로 혼인을 했으니 지금 세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갖게 된다.

신부는 호암보다 세 살 연상의 박두을. 1907년 11월8일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 산골마을에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아버지와 어머니 손씨의 4녀로 태어났다. 묘동마을은 순천 박씨 토착촌이었다. 박팽년의 후손답게 선비였던 아버지 박씨와 ‘교동댁’으로 불렸던 어머니 손에서 박 여사는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에 얼굴도 곱고 마음씨도 좋아 ‘두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십오륙 세 되던 무렵 어느 날, 절에서 시주를 나온 한 스님으로부터 “처녀는 앞으로 왕비가 아니면 일국의 왕 못지않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그 안방마님이 되겠소”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스님의 예견이 적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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