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나비형 인간’ 고영의 기부인생

“내 것만을 위해 사는 게 올바른지 평생 질문해야”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0-06-01 14: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재능기부단체 SCG 이끄는 억대 연봉의 컨설턴트
    • 한때 연봉의 80%까지 기부, 기부보험 들고 유산까지 기부 약정
    • 마이너스통장 만들어 연해주 고려인들 돕고, 재소자 학비 대기도
    • ‘IMF 사태’ 이후 출세지향 인생에서 기부인생으로 전환
    • 쓰레기 줍기와 선거참여운동으로 탈이념 대학문화 주도
    • M&A 기법으로 새로운 틀의 남북통일방안 제시하겠다
    ‘나비형 인간’ 고영의 기부인생
    그가 매일같이 묵상을 한다는 얘기는 나의 뇌를 쿡 찔렀다. 묵상(默想). 오랫동안 잊고 지낸 단어다. 그를 흉내 내 회사로 향하는 출근버스 안에서 묵상을 해보았다. 나의 인생은 무엇이고, 나의 미래는 무엇이고, 아이들이 누릴 세상은 어떤 것이고, 지구의 미래는 어떤 것이고…. 그리고 오늘 그를 만나면 어떤 질문을 어떤 순서로 던질까. 갈피가 잡히지 않는 생각의 조각들이 봄날 꽃가루처럼 흩날린다.

    이 종잡을 수 없고 조금은 고통스럽기까지 한 상념의 난무가 그친 것은 어느 순간 나비처럼 날아와 내 옆자리에 앉은 청초한 이미지의 단발머리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뿜는 벚꽃과 철쭉을 합쳐놓은 듯한 강렬한 향기에 나의 묵상은 마비됐다. 그녀는 몇 정거장을 지나 하차했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삶의 역동성과 부질없음에 가볍게 신음했다. 그 사이 세계에 대한 나의 묵상은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기부 청년’(일단은 이렇게 불러두자) 고영씨와의 인터뷰는 오늘 오후 3시에 잡혀 있다. 그가 기부 운동가라는 사실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점심식사 후 청계천을 거닐다가 불우 어린이 돕기 캠페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데는 분명 그 점이 작용했을 터다. 몇 백원짜리에서부터 1만원짜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상품이 있는데, 수익금이 지구촌 불우 어린이들에게 돌아간다고 했다. 내가 덥석 1만원짜리 티셔츠를 고르자 행사 관계자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불우한 어린이들의 처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진정 마음이 아파서 한 행위는 아니었다. 끽해야 자기과시거나 허영심이리라.

    매일 30분씩 묵상

    찻집이면서 문화공간으로 유명한 카페 민들레영토 홍익대지점에는 젊음의 활기가 넘쳤다. 이윽고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이가 나타났다. 30대 중반에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컨설팅의 귀재,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기부하고 유산(遺産)까지 기부한 사람, 공익봉사활동인 재능기부운동의 선구자…. 고영(高暎·34). 지금까지 ‘Face to Face’에 등장한 사람 중 가장 젊지만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고 강력하다. 아니, 신선하다.



    “많이 바쁘죠?”라는 질문에 “바쁜 척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시원스럽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는 최근 3년간 매년 한 권씩 책을 펴냈다. ‘아고라에 선 리더십’(2008년),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2009년), ‘나비형 인간’(2010년)이 그것이다. 그는 4월 출간된 ‘나비형 인간’을 주제로 몇몇 대학에서 강연도 했다. 나비형 인간은 자신의 재능으로 누군가를 도와 성공시키는 것을 즐기는 사람을 뜻한다.

    그가 소속된 회사는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그전엔 헤이그룹(Hay Group)이라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녔다. 그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SCG(Social Consulting Group)라는 단체다. 2007년 그가 만든 이 단체는 프로보노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프로보노는 라틴어 ‘Pro Bono Publico’의 약자로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서비스를 공익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매일같이 30분가량 묵상을 한다. 시간과 장소는 정해져 있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샤워할 때도 하고 전철 안에서도 하고 길거리를 걸을 때도 한다. 묵상과 기도는 어떻게 다른가.

    “기도할 때 주제가 있는 건 소원을 빌기 때문이죠. 제가 하는 묵상은 하루를 시작할 때 마음을 다잡거나 하루의 활동을 되돌아보는 겁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어떤 만남을 갖고 어떤 얘기를 해야 하나 깊이 생각하는 거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깨끗하다. 호소력을 지닌 큰 눈은 아니지만 눈빛이 맑다. 진분홍색 바탕에 작은 점이 총총히 박혀 있는 넥타이가 희멀건 얼굴과 흰색 와이셔츠에 잘 어울린다. 이런 귀공자형의 언행은 자칫 잘난 체하는 걸로 비치거나 위화감을 주기 쉽다. 그런데 그의 표정과 말투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럽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나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욕망에 기초한 행동을 반추하면서 올바른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아침에 책 한 권 더 읽거나 노하우나 스킬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내가 왜 인생을 사는지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묵상이라는 말에서 조금 짐작은 했지만, 종교를 묻자 기독교인이라며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죄와 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소원을 많이 얘기하는데, 그런 식의 고민에서 더 나아가 본질적인 주제, 본질적인 물음을 늘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잊어버리고 살거든요.”

    ‘통장 잔고 때문에 인생을 사나’

    ‘나비형 인간’ 고영의 기부인생

    2009년 6월17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SCG 인턴들과 기념촬영한 고영 대표(왼쪽 첫 번째).

    그가 부디 종교인의 상투적인 어법을 쓰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가 말한 ‘본질적인 주제’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그는 일화로 답변을 대신했다.

    어느 날 밤 11시에 아는 후배한테 연락이 왔다. 후배의 아버지가 백혈병 말기인데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독하다는 거였다. 그런데 생활보호대상자일 정도로 집안이 어려워 치료비가 없었다. 친척들도 안 도와준다고 했다. 후배의 얘기를 듣고 그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가. 내 통장의 잔고는 누굴 위한 건가. 지금 후배 아버님을 돕지 않으면 돌아가실 텐데 그 집안에 남겨질 상처는 어떻게 할 건가. 나는 통장 잔고 때문에 인생을 사는가.

    그는 “소유의 문제, 소유를 축적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하다 다음날 후배한테 1000만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묵상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당장 쥐고 있는 것에 대한 아까움 때문에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큰 자비가 아니라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태도가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14평 방에 9명이 우글거려

    그의 선행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작은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후배 친척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5000만원이 모였고 후배의 아버지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치료를 받을 때 후배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나중에 꼭 돈을 갚겠다”고 말했다. 그는 “생활형편이 나아지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분들을 도우면 좋겠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후배의 아버지는 석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남을 도우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몰랐던 세계를 알게 돼요. 거기에 오묘한 진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마음으로 다가오는 울림이나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중요하죠.”

    그가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줬다. 교회 후배 얘기라며 “정말 억울한 경우”라고 했다.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던 그의 후배는 국제구호활동에 참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거기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다가 자기가 병에 걸렸다. 급성신부전증에 합병증까지 생겼다. 귀국해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는데, 일주일에 100만원씩 되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교회 광고시간에 목사님이 그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기도도 좋지만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동안 마음속에 울림이 있더라고요. 목사님한테 계좌번호를 받아 치료비를 입금했습니다. 당시 제 통장에 600만원인가 잔고가 있었는데 500만원밖에 못했습니다. 다 드렸어야 했는데. 그게 조금은 도움이 됐을 겁니다. 후배는 그 뒤 얼마 못 버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한 건 그 친구의 부모님이 제게 감사의 표시로 기도를 해주시고 결혼할 때도 찾아와 축복해주신 겁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반응함으로써 귀한 인연을 맺고 그것이 더 큰 관계 속에서 발전하는 것, 그런 게 하나의 진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컨설턴트가 된 지 2~3년 됐을 때의 일이란다. 그는 지난해 12월에 결혼했다. 결혼 얘기가 나오자 꺽꺽거리며 즐거워했다. 결혼한 다음에도 예전처럼 기부를 할까.

    “예전처럼 (연봉의) 80%까지는 못하고 있어요. 정해놓고 한 건 아니었지만. 현재 여러 조그만 단체를 돕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아내도 결혼 전 컴패션(Compassion)이라는 단체를 통해 해외에 있는 두세 명의 어린이에게 도움을 줬더라고요. 아내는 기부활동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기부에 대한 기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컴패션은 탤런트 차인표·신애라씨 부부가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어린이 구호단체다. 그는 자신의 기부행위에 대해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주변사람들에게 은혜를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 관계와 소통의 중요성 말인가요?

    “그보다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 그런 경지에 올랐습니까.

    “계속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주제에 대해 27세 이후 늘 고민해왔다”며 ‘양날의 칼’이라는 표현을 썼다.

    “자꾸 드러날수록 위험하죠. 그게 영향력이 되고 권력이 되니까. 그게 자본이 되거든요. 브랜드가 캐피털을 만들어요. 거기서 탐욕이 생길 수 있죠.”

    ▼ 이번의 경우 조금 지나치긴 하지만, 앞으로 이런 비판이 자주 제기되는 게 좋겠군요.

    “좋을 뿐 아니라 평생 안고 가야 할 주제입니다. 저는 특히 대표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온전치 못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언제든 잘못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시점이 있습니다. 탐욕 때문입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처럼. 절제할 줄 알아야죠. 그래서 묵상이 필요한 겁니다.”

    ▼ 말씀하는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탐욕을 완전히 떨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요?

    “저도 탐욕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거든요. 컨설턴트이기 때문에. 연봉협상 할 때 대충 안 합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늘 강조하는 말이 ‘겸손’이라며 “비판이 제기되면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인터뷰를 끝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게 진정한 행복은 뭐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행복은 찾거나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행복이라는 감정을 좇지 말라. 그게 얽매임이 된다’라는 얘기가 있어요. 저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행복이라고 봅니다. 나의 삶을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요. 그게 깨지면 불행이고. 남과 비교하는 순간 행복은 사라집니다. 가진 게 없다고 여기는 순간 행복은 없어집니다. 저와 연봉이 비슷한 컨설턴트들이 스포츠카 타고 아르마니 정장 입고 다니는 게 전혀 안 부러워요. 미안하지만 불쌍해 보여요. 그런 것에 도취해 사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신의 모습에 감사할 줄 아는 게 참된 행복이죠. 버트란트 러셀의 말이 맞다고 봐요. 인생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도 없다고.”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의 얘기는 빈틈이 없고 그의 자세는 반듯하다. 잘난 척한다는 느낌도 안 준다. 그런데 나 같은 속물도 나비형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핑계는 역시 가족이다. 나비형 인간이 된다고 가정의 행복이 깨지는 것도 아닐 텐데.

    “저는 그게 잘 훈련됐던 것 같아요. 일찍이 가족 중심 사고를 벗어났던 게 도움이 됐죠. ‘공부의 신’ 강성태군에게 초기부터 경영자문을 해줬습니다. 성태가 말하기를, 선배가 애를 낳으면 자기가 잘 키워주겠다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대화를 하고 어떤 자극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저에겐 성태 같은 친구가 많아요. 사람 네트워크죠. 그들이 제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면 제가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이 자식들한테 전달되겠죠. 세대를 이어가면서 대물림되는 거죠. 그러면서 사회가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흐름을 알면 두려움이 없어지는 거죠.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 저도 나름 당당하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두려움이 있어요. 미래와 노후에 대한 불안감, 가족의 행복을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저도 두려움 있죠. 너무 빨리 승진해서…(웃음). 뭐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나는 그의 웃음을 보면서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는 게 좋을지, 퇴직 후 아이들 대학 학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따위의 걱정이 멀리 달아난 건 아니지만.

    ‘나비형 인간’ 고영의 기부인생
    그의 고향은 전남 나주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이른바 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했다. 하루 14시간씩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였다. 시골집에서 하숙비가 3개월째 올라오지 않더니, 4개월째 어머니가 말했다. “미안하다. 군대 가야겠다.” 그길로 고향에 내려가 보니 집이 없어졌고 가족은 흩어져 있었다.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가 사업실패와 빚보증으로 20억원의 빚을 졌던 것이다. 그는 친구 집에 얹혀 지내야 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죠.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꿈을 접어야 하나. 하나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교회 수련회에 참석해 엄청 울었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분들이 간증을 하는데, 다 제 이야기 같았습니다. 비참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은 태어나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다 군에 끌려갔죠. 제대한 후에도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이문동에 있는 합숙촌으로 들어갔다. 14평의 좁은 방에 9명의 남학생이 우글거렸다. 곧바로 복학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는 이참에 부모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맘먹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고 유리창을 닦고 전단지를 돌리고 과외를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등록금을 마련했다. 그가 복학한 것은 2000년, 3학년 2학기 때였다.

    “14평에 9명이 사는데 아침과 밤이 지옥이었습니다. 아침에는 화장실 문제로 조금만 늦게 일어나도 수업에 늦었습니다. 저녁엔 늦게 들어가면 현관 옆에서 자야 했는데, 그 발냄새… 하하, 그 많은 신발에서 풍기는 발냄새를 맡으면서 잠이 잘 오겠습니까. 하루는 잠을 자다가 냄새가 너무 지독해 깼습니다. 참고 자는 애들을 깨워서 살펴보니 천장에서 노란 물이 벽을 타고 줄줄 내려오는 겁니다. 위층에 중국음식점이 있었는데 화장실이 터져 오물이 샜던 겁니다. 그거 고치는 데 두 달 걸렸습니다. 그런 집에서 사는 동안 교회와 학교 선배들, 교수님들이 십시일반으로 저를 도와주고 챙겨줬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죠.”

    “마동팔 검사가 되고 싶었다”

    천안함 사건이 의식을 짓누르고 있어서일까. 특별히 의심을 한 건 아닌데, 이 대목에서 나는 그의 얘기를 잠깐 끊고 군복무에 대해 물어봤다.

    ▼ 군대는 정상적으로 갔다 왔나요?

    “육군 23사단에서 근무했습니다.”

    ▼ 23사단이 어디에 있죠?

    “강원도 강릉에 있습니다.”

    그가 57연대 1대대라고 덧붙이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군에 있을 때도 사법시험 공부를 계속 했다고 한다.

    ▼ 정외과 학생이 왜 사시 공부를 했습니까.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였죠. 유교적 사고에 젖어 빨리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1학년 때 학생운동을 했는데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자본론과 국부론을 읽었는데 맞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안 맞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자본론은 충분히 이해되지도 않았고. 저한테는 오히려 막스 베버가 맞더라고요.”

    ▼ 그 사람, 온건하잖아요?

    “예. 저한테는 온건한 게 맞는 것 같아요. 그 후 공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사법시험을 보자고.”

    ▼ 왜 사법시험이었죠?

    “검사를 빨리 하려고요.”

    ▼ 권력에 대한 욕망, 출세욕이 강했군요.

    “강한 출세욕이 있었던 거죠. 당시 봤던 영화 ‘넘버 쓰리’에 나오는 마동팔 검사(최민식 분)처럼 자기 하고 싶은 얘기 다하면서 소신껏 일하는 검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내가 “아주 감동적인 영화”라고 맞장구를 치자 그가 헉헉거리며 웃었다.

    “일종의 로망이었죠. 그런데 도저히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구조적인 환경 때문에 꺾인 겁니다. 군에서 키케로와 ‘자유론’과 ‘의무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을 접하면서 그간 너무 생각 없이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제대 후 크리스천 리더십 교육을 받았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배우면서 내가 정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반성했습니다. 나만을 위한 출세가 결국 남기는 게 뭔가. 최종 결과물이 불행한 거예요. 여러 차례 토론을 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정리가 돼갔지요.”

    그가 느닷없이 내게 물었다. “CEO로 성공합니다. 그런데 CEO 끝나면 뭐가 남죠?” 나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뭐 가정의 소소한 행복을 챙기거나 돈이 있으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돈이 남겠죠. 골프도 치고. 그런데 그걸 위해 사느냐는 거죠. 그 많은 시간을.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지 않겠나, 고민한 거죠. 그러면서 동양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사는 고장을 변화시켜야 하고 고장을 변화시키려면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을 변화시켜야 하고 집단을 변화시키려면 나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화장실 앞에서 만난 총장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꾸기로 작정한 그는 복학 후 작은 일부터 실천했다. 첫 번째가 쓰레기 줍기 운동이었다. 먼저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수업준비를 착실히 하고 강의시간에 맨 앞에 앉아 열성적으로 질문하는 모범학생의 이미지를 쌓았다. 그런 다음 학생들 앞에 나아가 동참을 호소했다. 연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매년 벌이는 연고전 행사 때 쓰레기를 줍자는 제안이었다. 처음엔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세 번쯤 제안하자 한두 명이 모이더니 점차 수가 늘었다. 그는 단체를 만들어 단체의 에너지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려대와 연세대의 기독학생연합회를 찾아가 호소했다. 그 결과 500여 명의 학생이 동참의사를 나타냈다.

    그해 가을 연고전 행사가 열렸다. 1만여 명의 학생이 몰린 잠실야구장에는 담배꽁초, 김밥, 김치, 화장지, 가래침이 넘쳐났다. 역부족을 느낀 그는 쓰레기 줍기 캠페인에 참가한 학생들의 대표들을 본부석 앞으로 모이게 한 후 “총장님!”을 외치게 했다. 총장은 화장실 앞에서 학생 대표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총장에게 캠페인 취지를 설명한 후 전광판을 통해 전체 학생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8회말이 끝나자 전광판에 쓰레기를 줍자는 문구가 나타났다.

    “그때의 희열을 잊을 수 없습니다. 높은 직책에 있는 의사결정권자가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준 것에 대한. 경기가 끝난 후 많은 학생이 우리를 따라서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아,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구나 싶었죠.”

    이후 쓰레기 줍기는 연고전의 익숙한 풍경이 됐고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나중에는 쓰레기봉투가 응원도구로까지 등장했다. 그는 “이런 일에도 원칙이 있다”고 얘기를 이어갔다.

    “아무리 뜻이 좋더라도 대중의 눈높이와 맞지 않으면 허무맹랑한 게 된다는 거죠. 예컨대 어떤 학생이 공부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너무 큰 얘기를 하거나 사회책임을 거론하면 ‘수업도 안 들어오는 너의 얘기를 왜 우리가 들어야 하지’라는 반박에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제가 고민한 건 올바른 대학생상(像)이었습니다. 대학에 왜 들어왔는지, 뭘 배우고 나가야 하는지, 진정한 내공은 뭔지. 그때부터 묵상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속해 있는 단체에서 정말 올바른 나의 모습은 뭔가.”

    그는 무감독시험운동을 벌이고 고려대의 남성우월주의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 여성리더십 강연회도 추진했다. 비록 유명 인사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아 무산되긴 했지만 강연회를 준비하면서 조직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통합

    대학원에 들어가선 대학생을 비롯한 20대의 선거참여운동과 선거연령 낮추기 운동을 기획했다. 우선 필요한 일이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통합이었다. 그는 평소 가장 믿고 따르던 선배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 선배는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통합은 무모해 보인다”며 “차라리 대학원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충고했다.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변화를 꿈꿀 때 가장 중요한 건 부정적 인식에 맞서는 겁니다. 두려워하고 훈련이 안 돼 있으면 부정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인생에는 2차 함수가 있어요. 그걸 아는 게 지혜죠. 많은 사람이 y=ax+b라는 1차 함수의 인생을 삽니다. 여기서 a는 직장에서의 성공 노하우 같은 겁니다. 모범생처럼 a를 키우기만 하고 다른 삶은 생각을 못하죠. b는 유산이에요. 그런데 인생이 과연 그것뿐인가. 2차 함수는 y=ax2+bx+c입니다. 여기서는 c가 유산입니다. b는 고통, a는 비전입니다. 큰 비전을 갖고 고통을 이겨내면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오바마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을 보면 어김없이 고통을 이겨낸 지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고통을 피하고 안전한 길로만 가려 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리스크를 이겨내면 2차 함수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1차 함수보다 훨씬 더 큰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죠.”

    5명으로 시작한 선거참여운동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질적인 성격의 단체들을 끌어 모으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 그가 보기에 대학가의 이념논쟁은 소모적인 것이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 하나가 쓸데없는 이념논쟁이에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결국 자기만 옳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되는 겁니다.”

    몇 달간 고생고생해서 25개 단체를 끌어 모으자 그때부터는 참가단체 수가 빠르게 늘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194개 단체가 하나로 뭉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들은 선거참여운동과 함께 선거연령 낮추기 캠페인도 전개했다. 그들의 노력은 2004년 총선에서 결실을 거뒀다. 20대 유권자의 투표율이 11%나 올랐던 것이다. 2006년에는 선거연령이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낮춰졌다.

    “그때 저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단어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리더를 만드는 건 지식이나 학벌이나 돈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사실을.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면서 생각의 깊이가 달라지고 주변사람들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조직을 만들고 조직 간 연대를 성사시키면서 그는 컨설턴트 인생을 설계했다.

    “총학생회장 선거에도 나가보고 전국대학신문의 칼럼니스트도 해봤어요. 26세부터 특강을 다녔습니다.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 사회에 구조적 공백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정책 만드는 것만 해도 다양한 전문가가 모여 머리를 맞대는 게 아니라 행정관료들과 시민사회단체 몇 사람, 정치학 박사 몇 사람이 졸속으로 해버리더라고요. 그리고 사회 곳곳에 사각지대가 있더군요. 재활여성, 노숙자, 재소자, 소년소녀 가장들에게는 원천적으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새롭게 성장하고 싶어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해 발전하지 못하고요. 이런 문제들을 인식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직설계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 겁니다. 대학 시절 내가 만든 조직이 공신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성장할 수 있었는데. (대학원 시절) 각기 따로 노는 조직들이 뭉칠 경우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걸 경험했죠. 이처럼 수많은 단체를 하나로 엮어내고 브리지 노릇을 하는 직업이 뭘까 생각하니 딱 컨설턴트인 거예요. 정부, 기업, 연구소, 재단,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대학, 병원 다 경험하거든요. 그래서 컨설턴트가 되기로 한 거죠.”

    연방제로는 통일 곤란

    대학원 2학기 때부터 1년간 교수 밑에서 컨설턴트 경험을 쌓은 그는 4학기를 맞은 2004년 하반기 헤이그룹에 취업함으로써 정식 컨설턴트가 됐다. 입사 첫해에 4억원짜리 프로젝트를 따올 정도로 그의 실력은 출중했다. 성과평가 때는 모든 항목에서 최고등급을 받았다. 3년 후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이라는 회사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솔직히 나는 그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컨설턴트가 그토록 많은 일에 관여하는 줄 몰랐다. 전략 수립과 지배구조 개선, M·A(인수합병), 신사업 개발, 해외 진출, 각종 제도 설계, 조직 혁신, 영업력 강화, 인사제도 개선….

    ▼ 컨설턴트 수입이 괜찮습니까.

    “(웃음) 능력에 따라 차이가 크죠. 같은 직급이라도 성과에 따라 연봉이 수천만원에서 억대까지 다양합니다. 프로야구선수와 똑같아요. 1군도 갔다가 2군도 갔다가. 고객 만족도가 높고, 8년차에 할 일을 1, 2년차에 해내면 연봉이 올라갈 수밖에 없죠. 컨설턴트의 실력은 파트너인 기업의 대표들이 금방 압니다.”

    그는 현재 부장인데 조만간 이사대우로 승진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 너무 빨리 가도 안 좋은 것 아닌가요? 나중을 생각하면.

    “저는 장기적으로 다른 고민을 하고 있어요. 남북한 M·A를 할 생각이거든요. 통일한국에 대한 설계죠. 새로운 틀의 남북한 통일방식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기존의 정치적 접근법에서 벗어나. 학부 때 연방제를 공부했는데 정치적인 통합은 이해관계가 복잡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조직끼리 연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죠.”

    ▼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습니까.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취약계층에게 담보 없이 소액을 빌려줘 자활하도록 돕는 제도) 아시죠? 호주에 ‘Opportunity International’이라는 재단이 있어요. 데이비드 부소가 회장인데, 마이크로크레딧으로 전세계에서 3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김정일을 설득해 북한에도 이미 2004년에 마이크로크레딧이 들어갔습니다. 북한도 점차 대안경제가 발전하고 사회적 기업이 늘어날 걸로 예상됩니다. 중국처럼 공기업이 늘면서 사회체제가 바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육 문화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연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내는 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양쪽의 이질적인 의식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죠. 제가 도움을 준 탈북자들과 대화해보니 가능하겠더라고요. 개성공단이나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처럼 엄청난 돈을 들이는 사업도 좋지만, 저는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다져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기업이나 클러스터(Cluster), 혹은 스페인의 몬드라곤과 같은 조합 형태 말입니다.”

    몬드라곤은 호세 마리아 신부가 설립한 경제공동체로, 노동과 소유가 일치하는 생활협동조합 형태의 기업이다.

    천안함 유족 돕기 제안

    ▼ 책 얘기를 해볼까요. 나비형 인간은 고영 대표께서 처음 만들어낸 개념인가요?

    “그렇죠.”

    ▼ 어떤 의미인가요?

    “나비는 꽃가루를 묻히고 다니면서 꽃을 피우게 하잖아요.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기도 하고요. 자신의 재능으로 어떤 사람을 도와 그 사람이 더 성장하는 걸 즐기는 사람을 나비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능 기부를 편하게 생각하고 즐기는 사람들.”

    ▼ 고 대표도 거기에 해당된다는 거죠?

    “해당돼가고 있고, 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비형 인간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를 바랍니다. 재능 기부라 하면 좀 거리감이 있거든요. 호기심도 안 생기고.”

    ▼ 봉사하는 삶과는 어떻게 다른 거죠? 개념이 일치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봉사가 훨씬 큰 개념이죠. 나비형 인간은 창의적 재능 기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나비형 인간’ 고영의 기부인생

    2009년 5월24일 ‘아름다운 가게’에서 사회적 기업 인력양성 워크숍이 열렸다.

    ▼ 나비형 인간의 개념은 어떻게 생각해낸 건가요?

    “대학 시절 제가 교내에서 쓰레기를 주우니까 다른 학생들이 따라서 했습니다. 지금은 쓰레기 줍기가 연고대의 전통이 됐어요. 세 명의 전문인으로 시작한 재능기부 단체가 지금은 120명의 전문가와 대학생 인턴 190명이 참여하는 큰 기구로 발전했습니다. 2년 반 만에 이룬 성과입니다. 30개 이상의 사회적 기업과 국제기구에 무료 컨설팅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중 10여 개를 성공시켰습니다. 한 사람의 작은 재능기부 활동이 계속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아, 이게 가능하구나.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나비형 인간의 DNA를 일깨워주기만 하면 된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 물질적인 기부도 해당되는 거죠?

    “당연하죠. 자신의 기부로 누군가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또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고. 행복의 통로가 되는 거죠.”

    그는 이번에 책을 쓰면서 나비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나비가 되기 위해선 알-애벌레-번데기를 거쳐야 합니다. 200개의 알 중에서 나비가 되는 건 2개뿐입니다. 애벌레로 남으면 삶의 시야가 나뭇잎에 가려지잖아요. 20일간의 힘든 번데기 생활을 거쳐 나비가 되면 100㎞를 날게 됩니다. 엄청난 차이죠. 제가 만약 통장 잔고를 아까워하고 빨리 집 살 생각에 많은 사람을 돕지 않았다면, 주말에 재능 기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애벌레로 남았을 겁니다. 통장이 인생의 전부가 됐겠죠. 남을 도우면서 누리는 기쁨을 몰랐겠죠. 2년 전 일주일간 휴가를 내 전국에서 올라온 할아버지들과 아저씨들에게 무료 상담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도우면서 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업하는 분들에게 무료 컨설팅을 해주면 확장효과가 나타납니다. 주변사람들에게 알리고 소개하기 때문이죠.”

    그는 최근 천안함 유가족 돕기에도 나섰다. SCG에 소속된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디자이너, 실내장식가, 홍보 전문가, 마케터 등이 총동원돼 유족의 자활을 돕겠다는 계획이다.

    “저 혼자라면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하지만 나비형 인간들이 모여 있으니 도울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분들한테 많은 성금이 전달되고 정부도 지원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돈으로 자영업이나 중소기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봅니다.”

    그가 대표인 SCG에 등록된 전문직 종사자 중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은 100명 안팎. 평소엔 각자 본업에 충실하다 밤 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해 자신이 맡은 사회적 기업들을 무료로 상담해준다. 머지않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와 국경없는 의사회도 지원 대상이 될 전망이다.

    “너무 감사해요. 이런 분들을 모르고 살 수도 있었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친구나 선배나 직장상사를 데리고 찾아옵니다. 새로운 꽃가루가 막 생기는 거죠.”

    5월16일엔 ‘나비형 인간 컨퍼런스’가 열린다. SCG를 비롯한 7개의 재능기부단체가 참여해 재능 기부와 나비형 인간에 대해 토론할 예정이다. 장소는 SKT에서 협찬했다.

    나비형 인간 대회

    그는 지난해 5월 혼자서 나비형 인간 대회를 열었다. KBS TV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도움을 요청해온 30여 명을 대상으로 무료 컨설팅을 한 것이다. 순번을 정해 카페에서 만났다. 회사에는 하루 휴가를 냈다. 대상자 중에는 치과원장, 목사도 있었다. 그는 앞으로 언론매체와 손잡고 잠실스타디움에서 나비형 인간 대회를 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SCG는 청와대가 기획한 사회적 기업 활성화포럼의 운영위원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보노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자치단체들과도 연대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경우 조례를 바꾸는 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마포구에서 성과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강서구에서도 연락이 와 곧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 저같이 평범한 사람이 나비형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죠?

    “선천적인 나비형 인간은 많지 않아요. 내 꿈과 남의 꿈을 일치시켜보려는 노력, 무엇보다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거기서 길이 열려요. 훈련이고 습관이죠. 내가 가진 작은 재능을 남을 위해 쓸 때 그것이 더 커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 많은 사람이 ‘나’에 갇혀 있잖아요. 나의 인생, 나의 가정, 나의 세계…. 한마디로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라는 얘기죠?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면 관심을 가지라는 거죠.”

    ▼ 실천이 쉽지 않지요. 다들 자기 먹고살기 바쁘니까.

    “그래서 묵상이 중요하죠. 그런데 한 번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아요. 진짜로 내가 그렇게 바쁜지.”

    대출 받아 전셋집 마련

    ▼ 남을 도우려면 내가 일단 먹고살 만하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친구가 되어주면 됩니다. 미용사들과 대화하면서 아이디어를 주니까 도움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어도 도움이 되는구나, 저분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려면 내가 더 공부를 해야지, 그러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것만을 위해 사는 게 과연 올바른지 죽을 때까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게 적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해요. 시간도 있고 체력도 있고 먼저 경험한 것도 있고. 누군가를 조금씩이라도 도우면서 시간을 이겨내는 겁니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 당위성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치관이 형성돼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경험입니다. 작은 한 번의 경험. 한 번 기부하면 계속 하게 됩니다. 저도 (연봉의) 80%까지 한 게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한 건 아니거든요.”

    ▼ 지금도 80%를 기부하나요?

    “그렇게 못합니다. 요즘은 포트폴리오를 짜서 합니다. 큰돈은 못하고 있죠. 마이너스 기부도 안하고. 지난해까지는 했는데.”

    ▼ 연봉의 절반쯤 합니까.

    “한 20%. 결혼 전에는 돈이 없어도 기부를 했는데, 결혼하니 달라지네요. 전세자금도 필요하고…(웃음) 대출 받은 것 갚아나가려니…. 전셋집도 대출 받아 마련했거든요. 그간 기부한 돈을 모았다면 아마 집을 한 채 샀을 겁니다. 1억9000만원 가까이 되니까.”

    ▼ 주로 어떤 사람들한테 기부했습니까.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에게 가장 많이 기부했습니다. 5000만원 가까이. 재소자에게 1000만원을 몇 번으로 나눠 지원한 적도 있습니다. 학사시험에 합격해 졸업할 때까지 돈을 댔지요. 그는 복지상담사 자격증을 땄어요.”

    고려인 지원은 동북아평화연대의 고려인 돕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계기였다. 4박5일 동안 연해주를 둘러보고 고려인들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그는 그들의 자립을 돕고자 농장을 만들 땅과 말 2필을 기증했다. 하지만 뜻한 대로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재단이 자금운용 계획을 잘못 세운 탓에 콩농사에 필요한 종자 살 돈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된 것이다. 종자 대금을 입금해야 할 시기가 닥치자 동북아평화연대에서 그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수중에 돈이 없던 그는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2500만원을 마련했다. 며칠 뒤 추가로 1800만원을 송금했다.

    ‘나비형 인간’ 고영의 기부인생

    서 있는 사람이 고영 대표.

    ▼ 현재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없죠. (웃음) 다 빚인데. 집도 없고 차도 없어요. 지금 입고 있는 양복은 15만원이 안 됩니다. 와이셔츠도 1만원짜리입니다. 가난합니다. (웃음)”

    9년간 여자가 없었던 이유

    그는 요즘 보험방식의 기부를 한다. 이른바 기부보험이다. 세 단체를 대상으로 기부보험을 넣고 있는데 10년 후엔 한 단체에 6000만원씩, 모두 1억8000만원이 적립된다고 한다. 그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전혀 없다.

    ▼ 자신을 위한 보험은요?

    “상해보험 하나요. 하하. 아내가 들으라고 해서.”

    ▼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것 같네.

    “와하하하. 아내한테 미안하니까.”

    ▼ 웬만한 여자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그래서 9년간 여자가 없었지요.”

    ▼ 결혼이 늦어진 원인 중 하나인가요?

    “중요한 원인이었죠. 비전과 가치관이 맞아야 하니.”

    이성적이라고 해야 할지,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나로선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결혼 조건이다.

    그는 유산도 기부했다.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에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약정을 하고 공증까지 했다고 한다. 유산이 100억원이든 1000억원이든 무조건 기부한다는 것이다. 자식 키우는 비용과 노후에 대한 걱정 따위는 그의 사전에 없는 걸까.

    “저는 자신감 있고 두렵지 않습니다. 할 일이 넘쳐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컨설턴트가 정말 좋은 게 경영에 대한 노하우를 업종별로 꿰면 누구든 도울 수 있습니다.”

    나는 컨설턴트가 못 된 자신을 원망하며 부러움 섞인 질문을 던졌다.

    ▼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죠. 제 파트너들이 세 기업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데 합해서 1000만원을 받더라고요. 50대 중반, 후반들인데. 그 나이에 저도 경제활동을 하겠죠. 그래서 오히려 지금 더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이밍을 놓쳐선 안 되죠. 지금 도와주지 않으면 나락에 빠질 사람이 많은데. 그럼에도 가장으로서의 책임은 다해야겠죠.”

    기부 안하면 죄책감 들어

    ▼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갈 유산은 전혀 없나요?

    “없죠. 결혼 전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고 동의를 받았기에 결혼한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 했을 겁니다.”

    ▼ 부인께서 혹시 결혼한 걸 후회하지는 않던가요?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결혼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그런 얘길 하시면.(웃음) 내가 뭐 빚보증을 선 것도 아니고. 허투로 돈 쓰는 것도 아니고. 술 담배도 안 하고 레저도 안 합니다.”

    ▼ 기부하면 마음이 즐겁습니까.

    “도움을 받는 분들이 있으니.”

    ▼ 일종의 중독인가요? 기부를 안 하면 불안한가요?

    “중독은 아니고요. 불안이라기보다는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늘 질문하는 거죠. 아니, 중독증도 없지 않은 것 같네요. 기부를 안 하면 죄책감이 드니.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기에 그만큼 나도 도움을 줘야 한다는 책임감, 또는 원죄의식 같은 게 있습니다.”

    ▼ 기부는 이기적인 행위인가요, 이타적인 행위인가요?

    “둘 다라고 봅니다. 제가 무슨 휴머니즘이나 인권 차원에서 기부하는 게 아니거든요. 저를 위해 쓰면 아까워요. 사치 같고. 청바지도 안 사 입어요.”

    ▼ 그 모든 게 IMF 사태 영향이라는 거죠?

    “그게 가장 컸죠. 기부로 삶의 의미를 찾는 거지. 그 점에선 이기적이죠.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 걸 아니까.”

    ▼ 긍정적 이기주의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당당해지고 자부심도 생기고. 생각한 대로 사는 거니.”

    ▼ 이런 생활방식에 갈등이나 회의를 느낀 적은 없나요?

    “몸이 힘들 때요. 재능기부 하면서 주말에 쉬지 못하니. 체력이 고갈될 때마다 너무 힘듭니다. 이러다 다 소모되는 게 아닌가 싶고. 그럴 때마다 잠을 푹 잡니다. 잠이 보약이죠. 대표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큽니다. 다른 사람들의 본이 돼야 하니.”

    인터넷 검색창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5월3일에 있었던 그의 서강대 강연내용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 블로그를 접할 수 있다. “성취에 경도돼 있어 자신의 성취 외 다른 사람의 인생에 별 관심이 없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날 강의 제목은 ‘전략형 사고와 나비형 인간’이었다. 이 비판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친구의 기준이나 선입관으로는 적절한 비판인지도 모르지요. 제 직업이 컨설턴트이기 때문에 성취지향적이라는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 성취 자체가 나쁜 건 아니잖습니까.

    “경도되면 문제가 되겠죠. 제게 그런 점이 있다면 고민하고 고쳐야겠죠. 그래서 제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답글을 달았습니다.”

    한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 이런 구절도 있더군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실로 행복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한 가지 도구로 다른 사람들을 취급한다.”

    “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제가 만일 그랬다면 이런 조직이 안 만들어졌겠죠.”

    ▼ 사실 여부를 떠나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인 것 같습니다.

    “어머님이 늘 경계하라고 강조한 말씀이 있어요. 큰 이야기 할 때 빠지는 게 한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한 사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걸 고민하라’고 하셨죠. 그런 차원의 지적이라면 받아들여야죠.”



    Face to Face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