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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④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다”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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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졸업한 뒤 나폴레옹은 포병소위로 임관, 지방연대에 부임했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코르시카로 귀향한다. 코르시카에 머무는 동안 나폴레옹은 왕당파, 혁명파, 코르시카 국민군 사이의 복잡한 싸움에서 코르시카 국민군의 지도자 파올리(Pasquale Paoli·1725~1807)를 도왔다. 이때 프랑스 육군은 나폴레옹에 대해 무단이탈과 2중 군적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파리로 가서 상부를 설득해 오히려 대위로 진급한다.

왕당파 봉기 진압 수훈…군사령관 임명

1792년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 다시 돌아가게 되나 프랑스와의 결별을 결정한 파올리와 균열이 생기면서 179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한다. 나폴레옹은 1793년 툴롱 공략 작전에서 부상해가며 왕당파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이 때문에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일약 장군이 되고 곧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의 포병 책임자가 된다.

1794년 당시의 실권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milien Robespierre·1758~1794)가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년 7월27일 국민공회 내 온건파가 일으킨 쿠데타로 공포정치를 시행한 혁명정부를 무너뜨림으로써 프랑스혁명 과정이 보수화됐다) 쿠데타로 실각하자 그의 동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2주 만에 풀려난 그는 우여곡절 끝에 1795년 반동 쿠테타 군의 지도자 중 하나인 파울 바라스(Paul Barras·1755~1829)에 의해 발탁돼 10월 파리에서 일어난 국민공회(國民公會)에 대한 왕당파의 봉기를 포병을 이용해 진압하는 수훈을 세운다. 이 전공으로 부와 명성과 권력을 한꺼번에 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파견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796년 3월9일 바라스의 옛 정부이자 당시 사교계의 꽃이었던 조제핀(Josephine de Beauharnais)과 결혼한다.

결혼한 지 불과 이틀 후 이탈리아로 떠난 나폴레옹은 1797년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면서 프랑스의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한층 더 높아져 일부에서는 독재자의 출현 가능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출병했다. 그의 목적은 이집트를 장악함으로써 당시 프랑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인도 루트를 차단하는 것. 또 이를 통해 인도 무슬림군과 연합해 영국을 협공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영국 해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전투는 여의치 않았고, 프랑스 본국의 정세도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곧이어 쿠데타를 일으켜 3명의 통령(consul)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자신은 원로원으로부터 임기 10년의 제1통령으로 임명된다. 3명의 통령이 있다고 하나 실제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돼 그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다.

권력의 정상에 선 나폴레옹은 내정을 개혁하는 한편 1800년에는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당시 이탈리아는 그가 이집트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다시 오스트리아군의 지배를 받았다. 일부에서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작전 계획에 우려를 표명했으나 앞서 말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명언대로, 결국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화려한 업적과 나날이 치솟는 인기를 바탕으로 1802년 종신 통령을 거쳐 1804년 12월2일에는 마침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해 나폴레옹 1세가 됐다. 조제핀은 자연히 황비가 되었다. 이때 평소 나폴레옹 예찬자였던 베토벤이 그의 즉위 소식을 듣고 ‘영웅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804년 황제 즉위 후 ‘나폴레옹 세상’

이듬해인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결성한 제3차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치른다. 비록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 패배해 제해권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그로부터 6주 후인 12월에는 유명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두 황제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프랑스 육군의 위상을 유럽에 떨쳤다. 나폴레옹은 곧 샤를마뉴 대제에서부터 거의 1000년간 이어져온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해체시키고, 이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이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과 결성한 제4차 대프랑스 동맹도 격파했다. 1807년에는 폴란드에 진격하고, 이어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스페인 통치권도 확보했다.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역시 성공적으로 방어한 나폴레옹은 1810년 오랜 연인이었던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혼인했다. 이 일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관계였던 교회와 거리가 더욱 멀어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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