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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⑦

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이건창과 서재필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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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3대 문장가

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1947년 7월 귀국한 서재필(가운데)이 영접 나온 김규식(왼쪽), 여운형과 함께 승용차편으로 인천항에서 서울로 향하고 있다.

이건창은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다.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과 더불어 한말 3대 문장가로 꼽혔던 그는 이들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그의 절친한 벗인 김택영은 우리나라 역대 문장가 아홉 명을 선정한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서 이건창을 그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다. 김부식에서 이건창에 이르는 구대가의 선정에 이견이 없지는 않지만, 조선 말기 이건창의 문장이 독보적이었음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는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필자는 이건창의 유적지를 여러 번 가보았다. 강화도 초지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 선두포구를 지나, 쪽실수로에서 동막해수욕장 쪽으로 조금 더 가면 화도면 사기리가 나오는데, 이 마을에 이건창이 태어난 생가가 있다. 소박한 초가집이지만, 집 앞에는 서해 바다가 펼쳐 있고 뒤편에는 마니산 줄기가 이어져 있다. 그리고 양도면 건평리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그의 묘지가 쓸쓸히 놓여 있다.

개인적으로 이건창을 알게 된 것은 민영규 교수의 ‘강화학(江華學) 최후의 광경’을 통해서였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의 강화학자들, 다시 말해 양명학자들을 다루는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안겨줬다. 하곡 정제두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의 양명학은 이른바 ‘이단의 사상’이었다. 주자학만을 철저히 숭상한 조선 사회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은‘변방의 사상’이었다. 가학으로 양명학을 배운 이건창은 바로 이 점에서 ‘비주류의 사상가’라고 하겠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내 연구실이 있는 건물의 이름이 위당관이다. 위당 정인보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연희전문에서 가르치신 정인보 선생은 강화학파의 양명학을 계승하신 분이기도 하다. 건물 앞 한구석에는 선생의 흉상이 있고, 거기에는 제자 민영규 교수가 쓴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산이 그렇고, 성호가 그렇고, 그리고 하곡·원교·초원·담헌·석천 등이 역시 모두 그러해서, 수삼세기 동안 지하를 복류해야만 했던 선학들의 슬픈 사연을 몸으로 감당하시고 지표로 광복하신 이가 바로 선생 당신이시다.”

선학들의 슬픈 사연이란 다름 아닌 주자학의 나라에서 양명학을 연구해온 이들의 서글프지만 의연했던 삶을 뜻한다. 연구실을 오가면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밀린 원고 때문에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머무는 날이면 흉상 앞 본관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앉아 더러 휴식을 취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말의 의미를 음미해보곤 한다.

진리란 무엇이며, 지식인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당시 강화학자들이 소론계 양명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 현재적 관점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진리 탐구의 학문적 관점에서 당파라는 분류는 기실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 갖는 어느 한 측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속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신의 시대와 당당히 맞서서 진리 탐구에 고투(苦鬪)한 강화학자들의 용기다.

민족주의의 선구적 노선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세 가지 흐름이 존재했다. 서구의 물결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는데 전통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풍전등화의 현실 속에서 위정척사를 주도한 정통주자학의 길, 갑신정변을 주도한 문명개화의 길, 그리고 그 둘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론이 경합했다.

이건창이 선택한 길은 이러한 노선들과는 사뭇 달랐다. 사상가라기보다 문장가였던 그가 선택한 길은 강화학, 즉 양명학에 기반을 둔 일종의 개혁노선이었다. 이 노선은 전통을 쇄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전통의 개혁노선이자, 서구 열강 세력을 거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선구적 노선이기도 했다. 이건창과 양명학자들이 이러한 노선을 선택한 이유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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