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과 구름의 모양이 아름답게 새겨진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청자향로 중에는 뚜껑이 사자나 기린, 오리 모양인 경우가 있는데 그 뚜껑의 짐승 몸통이 비어 있어서 그 동물 입으로 향의 연기가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그대로 위로 올라가서 기린의 턱을 때리게 됩니다. 턱을 때린 연기는 그 반동으로 입 쪽으로 나가면서도 위로 뻗어가는 그 성질을 갖고 있어서 아주 환상적인 모양을 만들게 됩니다.
백제에서 그렇게 멋있는 것을 만들 수 있었는데 왜 이 시대에는 저런 것이 없어졌는가. 백제시대에는 장인을 어마어마하게 대접했습니다. 무령왕릉 왕비의 팔뚝에서 나온 은팔찌를 볼까요. 용이 세 마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대부인을 위해서 다리(多利)라고 하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서명이 새겨져 있어요. 왕비의 팔찌에 자필 서명을 할 정도로 장인에 대해서 존경을 보냈던 것이지요. 백제는 장인을 대접해서 경학에 밝으면 경학박사라고 했듯이 기와를 잘 구워내면 와박사(瓦博士)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예가 발전했습니다.
백제의 공예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있는 8세기 유물창고에는 의자왕이 일본 왕에게 보낸, 자단목으로 만든 나전바둑판하고 상아로 만든 바둑돌이 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왕이 있기 때문에 이 헌납유물을 문화재로 다루지 않고 신성시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부터 해마다 10월이 되면 주로 국립나라박물관에서 몇 십 점씩 전시해오고 있어요. 그런데 2000년 전시에서 이 바둑판과 바둑돌을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받았다고 헌납보물대장에 나와 있었어요. 이게 어찌나 멋진지 몰라요. 한 5년 전에도 다시 전시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출처에 대한 설명이 도록에서 빠져 있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백제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낙화암, 의자왕, 삼천궁녀, 계백장군 등으로 멸망 시기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여군수가 세계 역사도시 회의에 갔을 때 백제의 왕도(王都) 부여에서 왔다고 하자 “아, 그 멸망한 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더래요. 그래서 이분이 화가 나서 “멸망하지 않은 고대국가가 어딨습니까?”라고 말했답니다.(웃음) 그런데 왜 사람들이 백제에 대해서 그 문화가 아름답고 융성했을 때를 기억하려 하지 않고 망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얘기를 기억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익산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사리호를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높이 17㎝밖에 안 되는 굉장히 작은 건데 어디 한구석 허투루 만든 부분이 없습니다. 이 바닥에는 어자무늬라고 물고기알 문양이 빽빽하게 들어 있습니다. 명작의 경우 ‘디테일’이 아름다워서 중요한 특징은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더 멋있습니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그림은 작은 편화로 그린 것도 10배를 확대해 봐도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이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은 확대하면 데생이 정확하지 않아서 멀쩡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것 같고 집이 막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리함이라고 하면 공예품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사리함은 당시 백제 사람들이 가진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공력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리호나 사리함이 나오기 전에 당시 최고의 공예 기술이 발현된 것은 금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500년 무렵이 되면 불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고대국가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서 남에게 위세를 부릴 필요가 없어져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이때가 되면 왕을 위해 금관을 만들던 그 정성으로 지상의 사찰을 만들 때 절대자의 분신을 모시는 사리함을 만들었습니다. 공예로 보면 금관의 시대에서 사리함의 시대로 옮겨간 겁니다.
2007년에는 백마강변 왕흥사에서 금은동 한 세트의 사리함이 나왔어요. 여기에는‘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서 사찰을 세우고 사리를 봉헌했다’고 쓰여 있어요. 뚜껑을 열면 순서대로 동 은 금으로 만들어진 함이 나옵니다. 통형, 항아리형, 구기자 같은 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저는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눌와) 책을 쓰면서 이것은 현대 고급 향수병처럼 생겼다고 했지요.(웃음) 이 세 가지 형태가 다 다르면서도 한 세트라는 느낌을 준 것은 뚜껑 꼭지의 디자인입니다. 이것도 각 함의 모양에 맞게 뚱뚱하고, 볼록하며, 삐죽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들이 세트라는 느낌을 갖는데 이는 바로 디자인의 힘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백제본기 온조왕 15년조, BC 4년조에 ‘신작궁실’이라고 네 글자를 썼어요.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표현해놓으면 사실 김부식은 역사의 사실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제 할 일을 다한 겁니다. 그런데 그는 그 미감(美感)을 여덟 글자로 덧붙였어요. ‘검소하되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 이것이 한국인이 가질 수 있는 미감의 압권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시대 장인들이 미적 목표로서 삼을 만한 그런 모토(motto)입니다. ‘모토’는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해 끝까지 검증케 하는 힘이 있지요.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통일신라시대 감은사탑에서 나온 사리함은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모양을 보여줍니다. 역시 디테일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상여와 가마 형태에다 사리를 장치하고 그것을 호위병들이 지키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