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프를 흔히 ‘멘털 스포츠’라고 한다. 정신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섬세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금세 무너지기 때문에 평정심이 최우선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이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있다. 부단한 연습을 통해 근육이 스윙 동작을 기억(muscle memory)하게 하면 정신력이니 전략이니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극단에 올라 있는 인물을 만났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주)익성의 이봉직(53) 대표이사다.
3월 7일 오전 경기 안성시 마에스트로 컨트리클럽(7250야드, 18홀)에서 이 회장과 라운드를 같이 했다. 개장 2년의 신생 골프장이지만 코스마다 울창한 수림과 계곡이 펼쳐지고, 운치가 있다. 페어웨이의 굴곡이 심하고 벙커가 깊은 데다 그린도 난도가 높아 공략하기가 만만치 않다. 플레이어가 14개 클럽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코스가 조성됐고, 홀마다 난이도 차이가 뚜렷하다. 빅토리안 스타일의 웅장한 클럽하우스도 인상적이고, 다음 홀로 이동할 때 카트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오게 하는 등 플레이어를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도 눈에 띈다.
이 대표는 한마디로 ‘스윙 머신’ 같았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면 채 3초를 세기도 전에 과감하게 스윙을 했다. 드라이브샷은 폭발력이 있으면서도 정확했다. 그린에 올라가서도 별로 재지 않고 곧바로 퍼팅했다. 그야말로 ‘무심타법’을 보는 듯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자는 수차 왜글링과 연습 스윙, 멀리건 받기, 트리플 퍼팅으로 느릿느릿 이 대표를 뒤따라갔다. 5번홀(파4)에서 이 회장은 세컨드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렸지만 기자가 세컨드샷한 공은 그린 에지에 떨어졌다. 허탈감에 빠져 페어웨이에 잠시 쪼그려 앉았더니 노란 잔디밭 군데군데 파릇파릇하게 색이 변하고 있는 잔디들이 보였다. 엄동설한을 이겨낸 잔디의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에 힘입었을까. 기자는 칩샷으로 짜릿한 버디를 잡았다. 반면 이 대표는 어려운 3단 그린을 극복하지 못하고 트리플 퍼팅으로 보기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이 대표는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연속 파를 이어갔고, 16번홀(파4)에서는 완벽한 버디를 낚았다. 이날 그의 기록은 76타. 생애 최고 기록인 68타보다는 저조하지만 겨우내 쉰 뒤 4개월 만의 라운드치고는 괜찮은 성적이었다.

그는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올랐을까. 그는 골프가 룰도 복잡하고 실력도 잘 늘지 않는 스포츠지만 시작할 때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1995년께 직장 상사의 권유로 골프 연습을 시작했어요. 남보다 좀 독하게 했지요. 회사 앞 골프연습장에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을 갔고, 하루에 2000개씩 공을 쳤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싱글 실력이 돼 있더군요. 프로로부터 교습도 받지 않았어요. 책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혼자 연구하고 연습했습니다.”
치핑이나 퍼팅 등 쇼트게임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 대표의 퍼팅 비법 가운데 하나는 그린 상황을 미리 짐작하는 것이다. 세컨드샷으로 공을 그린에 올리면 그린 쪽으로 걸어가며 어떻게 퍼팅할 것인지 머릿속에 그려보기 때문에 전광석화 같은 퍼팅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표의 구력은 18년이다. 그동안 홀인원 2회, 사이클 버디(파3, 4, 5홀 모두 버디 기록) 1회, 이글(2언더파) 70여 회, 한 라운드 버디 8개, 18홀 연속파 등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그는 알바트로스(albatross·3언더파)도 경험했다. 홀인원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는 게 알바트로스다.
“2003년 가평베네스트 버치코스 1번홀(파5)에서였어요. 220야드 정도 남은 상황에서 세컨드샷을 우드 3번으로 했어요. 그런데 공이 순간적으로 사라져서 처음엔 OB가 난 줄 알았어요. 그린 근처에서 공을 찾고 있는데, 캐디가 깃대를 빼면서 홀 안에 있는 공을 발견했어요. 그날 기분이 정말 좋아 함께 어울린 지인 20여 명에게 술을 거나하게 대접하느라 돈도 많이 썼지요.”
이 대표는 경상도(대구) 남자 아니랄까봐 좀 무뚝뚝해 보이지만 골프 철학은 뜻밖에 ‘즐기자!’란다. “골프가 스트레스 푸는 데 최고이고, 기업 경영하면서 사람 사귀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다. 그간 골프에 집 한 채 값을 쏟아 붓고도 후회가 되지 않는다”며 웃었다.
이 대표 같은 실력자를 흔히 ‘싱글 골퍼(Single-digit handicapper at golf)’라고 한다. 핸디캡이 한 자리 숫자(9 이하)인 싱글은 주말 골퍼가 좀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이 회장은 싱글 실력이 되려면 에티켓과 품위에서도 싱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윙과 삶을 다스리는 마음골프’를 쓴 김헌 씨도 ‘골프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공간임을 알게 되고, 남의 얘기를 들어줄 귀가 열리고, 골프를 하는 것이 서로의 고통을 감싸고 희망을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쯤이 싱글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