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호

‘믿거나 말거나’ 신종플루 음모론

제약사 자작극? 미군의 생물무기? ‘세계정부’의 인구 조절책?

  • 석유선│ 의학전문 프리랜서 sukiza@naver.com │

    입력2009-07-30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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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모론의 바다는 생각보다 넓고 깊다. 세상이 관심을 가질 만한 모든 사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음모론이 얽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전세계의 음모론 마니아들을 흥분시키는 이슈는 단연 신종플루. 전세계적 전염병 창궐의 위협 앞에서, 날줄과 씨줄이 그럴듯하게 엮인 갖가지 이론(異論)은 불신과 소외감을 날개 삼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인도네시아 현직 보건장관이 힘을 싣고 미국의 전직 국방장관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음모론의 바다에 잠시 빠져보자.
    ‘믿거나 말거나’ 신종플루 음모론
    멕시코에서 출현했다는 신종 독감(인플루엔자)으로 온 세계가 계속 떠들썩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확인된 바이러스다 보니 그 이름도 돼지독감에서 SI(Swine Influenza), MI(Mexico Influenza)까지 변신을 거듭하다 결국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신종 인플루엔자 A(이하 신종플루)’로 명명됐다.

    특기할 점은 신종플루의 발생원인과 발원지에 대해 그 이름만큼이나 다채로운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겨냥한 생물학적 공격이라는 등 괴담 수준에 불과한 황당무계한 것들도 있지만, 곰곰 읽다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느껴지는 주장도 제법 있다. 전세계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제약사 자작극이나 미군의 생물학무기 실험 같은 몇몇 음모론을 정설로 믿는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다.

    이들 음모론은 크게 두 가지를 따져 묻는다. 우선 신종플루가 과연 자연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다음은 신종플루의 발원지가 과연 멕시코인지, 아니면 미국인지다.

    신종플루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음모론은 이 바이러스가 지금까지 보고되지 않은 신종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전문가들은 신종플루를 돼지, 조류, 사람 인플루엔자 각각의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형태로 추정하고 있다. 통상의 경우처럼 한두 가지 유전자에서 변이가 일어난 게 아니라 세 가지 유전자가 결합하는 자연적으로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이 바이러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신종플루 발생지가 멕시코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주장도 신종플루의 인위적 발생론을 뒷받침한다. 호세 코르도바 멕시코 보건장관은 신종플루 환자 발병 당시 기자회견에서 감염환자가 멕시코가 아닌 미국에서 먼저 나왔다는 점을 언급하며 “멕시코가 신종플루 발원지가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실제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멕시코에서 첫 감염환자가 보고된 것보다 앞선 4월28일 캘리포니아 남부와 텍사스에서 감염자가 처음 발견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WHO의 그레고리 하틀 대변인도 “지금까지 첫 발병지가 멕시코라고 알려졌지만 북미와 영국 등 유럽에서의 감염사례 중 그 경로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발표해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누가 이익을 보는가’

    신종플루 발원지로 알려진 멕시코 동부 베라크루스 주 라글로리아 마을에서도 주민들 사이에 ‘근본적인 원흉은 미국’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 마을 근처에는 미국 버지니아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양돈업체 스미스필드의 공장이 있는데, 이 회사는 분뇨를 공장 근처 강에 불법으로 무단 배출한 사실이 적발돼 2000년 미 대법원에서 1260만달러의 벌금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이 “인근 돼지 공장에서 나오는 배설물과 파리떼가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는 것. 낯선 변종 바이러스가 그 발원지마저 불분명하다는 이유 때문에 혹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음모론이 그러하듯 신종플루를 둘러싼 음모론도 ‘누가 이익을 보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바이러스가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면 신종플루 창궐에 따른 최대 수혜자는 선진국 제약사들이다. 이들이 약을 팔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는 음모론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인도네시아 고위 관료의 입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기도 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시티 파딜라 수파리 인도네시아 보건장관은 4월28일 기자회견에서 “100% 확신할 순 없지만 신종플루가 (선진국 제약회사들의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세계 최대의 제약사인 박스터(Baxter)와 WHO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박스터가 신종플루 대유행을 마치 예상하기라도 한 듯 신종플루가 창궐하자마자 바로 WHO로부터 백신에 대한 독점 개발권을 따냈다는 점도 의구심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당시 박스터는 빠르면 7월부터 신종플루 예방 백신의 대량생산이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박스터는 5월초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로부터 신종플루 바이러스 샘플을 제공받은 후에야 백신 개발에 착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박스터는 백신 개발을 확신하고 이미 여러 국가와 대유행(Pandemic) 관련 계약을 체결했으며, 때맞춰 WHO의 대유행 선포로 백신을 주문할 수 있게 된 국가들에 대해 수량을 차등화해 판매할 계획이다. 박스터는 이와 함께 WHO에도 백신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종플루 창궐-WHO의 대유행 선언-박스터의 백신 개발이 시나리오처럼 딱 들어맞는다는 추론이 나올 법한 정황이다.

    의구심의 근거는 또 있다. 박스터는 앞서 또 다른 변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유포할 뻔했다는 의혹을 받은 적 있다. 자연치유요법으로 유명한 미국 일리노이주의 조지프 머콜라 박사에 따르면 2008년 12월 박스터는 통상적으로 개발했던 인간 인플루엔자(H3N2) 예방 백신에 완벽하게 살아있는 조류 인플루엔자(H5N1) 병원체를 섞어 오스트리아 지사로 하여금 무려 18개국에 발송케 했다.

    문제는 이를 가장 먼저 받아본 체코 정부기관이 이 백신을 실험실의 흰족제비들에게 주사하자 이들이 한꺼번에 몰살했다는 사실. 이 내용이 공개되면서 박스터의 안전관리 능력은 곧바로 도마에 올랐다. 흰족제비는 보통의 인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는 사망하지 않지만, 조류 인플루엔자가 섞이면서 죽어버린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신종플루 음모론

    신종플루가 거대 제약회사와 미국의 결탁으로 만들어진 부산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도네시아의 보건장관 시티 파딜라 수파리.

    박스터는 이에 대해 “실험실 내에서 감염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아마도 두 개의 인플루엔자가 실수로 혼합돼 벌어진 일 같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바이러스가 우연히 혼합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반박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 굴지의 제약사인 박스터의 연구소는 생물안전3등급인 밀폐연구설비를 자랑하는 최첨단시설이다. 이런 시설에서 일하는 숙련된 과학자들이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믿기는 쉽지 않다. 결국 백신을 팔기 위해 일부러 병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으며, 이에 대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만에 하나 이 혼합 바이러스가 외부에 유출됐다면 사건은 더욱 무시무시해진다. 조류 인플루엔자는 사람 간에는 전염되지 않지만 인간 인플루엔자는 전염되기 때문에, 만일 인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혼합된 형태의 새로운 바이러스가 퍼지면 2차 감염이 발생할 확률도 매우 높아진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제3세계의 분노

    앞서 등장했던 인도네시아 수파리 장관이 인플루엔자와 관련해 제약사 음모론을 주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월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 샘플 공유와 백신 개발 뒤에 WHO와 강대국의 음모가 숨어있다며 ‘세계가 바뀌어야 할 때: AI 뒤의 신의 손’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펴낸 적이 있다. 그는 이 책의 출판기념 토론회에서 “내 경험을 토대로 책을 썼고 증거가 분명히 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파리 장관의 책은 선진국 제약사와 WHO의 결탁으로 세계 여러 나라가 백신 확보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결국 부를 축적하려는 제약사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WHO는 서방국가의 제약회사들에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샘플을 제공하고 있고, 백신을 독점 개발한 회사들과 수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파리 장관은 “선진국들은 백신 판매로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있다. 이들만이 백신을 개발할 수 있고 또 이를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WHO가 인체에 치명적인 조류 인플루엔자의 H5N1형 바이러스 샘플(균주)을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에서 공짜로 가져다가, 이를 미국 등 선진국의 제약사에 공급해 백신을 개발한 뒤 조류 인플루엔자 발병 국가에 비싸게 되팔고 있다”는 비난이다.

    인도네시아는 전세계 조류 인플루엔자 사망자 중 절반가량인 104명의 환자가 희생된 나라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조류 인플루엔자 사망자 샘플을 공유하도록 WHO가 지정한 국가에서 제외돼 있다. 인도네시아가 “선진국이 빈곤국으로부터 바이러스 샘플을 받아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비싸게 되파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며 2006년부터 WHO에 샘플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선진국 제약회사들의 백신 연구과정에서도 인도네시아는 결국 배제된 상태다.

    반면 수파리 장관은 이러한 상황이 선진국 제약회사와 WHO의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6년 호주 정부를 고소한 적이 있다. 호주가 인도네시아의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샘플을 훔쳐다가 백신을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이때의 일 때문에 백신의 독점권을 원하는 선진국 제약회사와 WHO가 인도네시아를 ‘왕따’시키고 있다는 게 수파리 장관의 주장이다.

    럼스펠드가 음모론에 오른 이유

    음모론 자체를 믿느냐 여부와는 상관없이, 신종 바이러스 질환의 창궐 과정에서 벌어진 선진국 제약회사의 ‘백신 장사’와 WHO 대응정책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WHO는 각국에 백신 준비와 항바이러스치료제를 구입하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대다수 국가는 그럴 기술도 돈도 없다는 것. 이 과정에서 치료제와 백신에 대해 특허를 갖고 있는 선진국 대기업들이 엄청난 이익을 올리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실제로 이번의 신종플루 사태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보고 있는 제약사로는 타미플루와 리렌자의 독점 판매회사인 로슈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조류 인플루엔자로도 이미 천문학적인 이익을 올린 바 있다. 2005년 미국의 ‘포천’지는 조류 인플루엔자의 공포에 휩싸인 상황에서 타미플루 생산자인 스위스 로슈사가 엄청난 이윤을 남기고 있다고 지목해 보도한 바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음모론은 새로운 물줄기를 만난다. 연결고리는 타미플루의 최초 개발자인 미국의 생명공학회사 길리드사이언시스(Gilead Sciences)다. 스위스 로슈가 타미플루 판매권을 유지하기 위해 2005년부터 3년 동안 이 회사에 지급한 로열티는 11조원이 넘는다. 흥미로운 것은 1997년부터 2001년 사이에 길리드사이언시스의 이사회 의장을 맡은 사람이 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 국방장관이라는 사실이다. 현재도 이 회사의 대주주 가운데 한 명으로 각종 혜택을 받고 있는 그는, 국방장관 재임시절에도 지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미 국방부가 전세계 미군에게 타미플루를 일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당시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어 조류 인플루엔자가 창궐해 타미플루 사재기가 일어나면서 수요는 전세계적으로 폭증했다. 로슈와 길리드사이언시스는 물론 럼스펠드 전 장관 본인도 돈벼락을 맞았다. 근래 들어 조류 인플루엔자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로슈와 길리드사이언시스의 이익이 2008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자, 이번에는 때마침 신종플루가 나타났다. 길리드사이언시스와 로슈의 주가가 다시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것은 불문가지. 인플루엔자를 둘러싼 제약사 음모론은 이런 얼개를 통해 구체화된 것이다.

    미 국방부 얘기가 나온 김에 신종플루에 관한 또 다른 음모론을 들여다보자. 미군이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신종플루가 만들어졌고 유출됐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바이러스 전염병 가운데 대다수는 자연발생적이었지만, 일부는 전쟁 상황의 전략전술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유포됐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세균전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현대에 들어서는 생물학전이라는 이름으로 바이러스가 무기화되었다.

    ‘믿거나 말거나’ 신종플루 음모론

    신종플루 항바이러스제인 리렌자(오른쪽)와 타미플루. 리렌자 생산업체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신종플루 발생이 확인된 지난 4월 “향후 3개월 생산량을 500만개로 늘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생물무기’의 원죄

    신종플루가 생물학 무기 개발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음모론에도 앞서 등장했던 수파리 장관이 다시 나온다. 인도네시아가 미 국방부 연구실에 보낸 바이러스 샘플이 백신 개발 외에 생물학 무기 개발 등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앞서의 책에서 그는 “미국과 WHO가 손을 잡고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바이러스 샘플을 백신 개발에 쓸 것인지, 생물학 무기 개발에 사용할 것인지는 순전히 미국 정부의 뜻에 달려 있다. 인류의 운명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에 WHO 측은 황당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WHO는 세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할 뿐 연구를 통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 WHO 측은 수파리 장관의 주장에 대해 “WHO의 시스템은 지극히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전세계 연구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결코 특정 국가와만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대응한 바 있다.

    WHO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인터넷을 달구는 음모론이 가시지 않는 것은 미군이 그동안 생물학전 대비와 관련해 바이러스를 활용했다는 의혹과 사례가 확인된 바 있기 때문이다. 1975년 민주당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가 주관했던 조사위원회가 입수한 중앙정보국(CIA) 비망록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비망록에 따르면 미군 생물학 무기실험시설인 데트릭 기지에서는 치명적인 화학 병원균과 독소들이 비축돼 있었다는 것.

    ‘믿거나 말거나’ 신종플루 음모론

    2001년 3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는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

    이러한 의혹을 다루는 저술도 심심찮게 발간된다. 2003년 미국에서 출간된 ‘바이오테러: 전쟁을 조작하는 미국의 방법’이라는 책은, 이러한 병원균들을 이용해 1960년대 초 콩고의 초대 총리인 루뭄바와 쿠바의 혁명지도자였던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사실이 있었음을 앞서 설명한 처치 위원회가 확인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종플루 바이러스와 유사한 병원균을 미국이 퍼뜨린 적이 있다는 주장도 음모론을 구성하는 한 축이다. 미국 서부지역의 유력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1977년 “반(反)카스트로 테러리스트들을 지지하는 CIA 요원들이 아프리카 돼지 인플루엔자를 쿠바에 퍼뜨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초 쿠바에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인플루엔자가 유행했고, 50만마리의 돼지가 도살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웨인 맥슨은, 대략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신종플루는 생물학 무기’라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 당사자다. 그는 익명의 유엔 고위 과학자의 말을 인용해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 바이러스와 HIV/AIDS 희생자를 검사한 유엔의 고위 과학자가 신종플루(H1N1)는 생물학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유전학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만한 특정한 전염 벡터(vectors)를 갖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고 주장한다.

    특히 맥슨은 “이 유엔 전문가는 에볼라와 HIV/AIDS, 지금 문제가 되는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모두 생물학 무기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물론 모든 음모론이 그러하듯, 현재까지 이를 입증할 결정적인 근거는 공개된 바 없다. 다만 4월 미국의 ‘프레드릭뉴스포스트’지가 “미군 사법당국이 생물학무기 실험시설인 데트릭 기지에서 병원균 샘플이 사라졌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 중”이라고 보도한 사실이 그의 음모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을 뿐이다.

    ‘세계정부’의 무능함?

    앞서의 두 음모론이 다국적기업의 제약 특허권 독점과 미국 군산복합체라는 사회적 맥락을 깔고 있다면, 마지막으로 소개할 음모론은 황당함 그 자체다. 4월말 미국의 인터넷매체 ‘프리즌플래닛’이 소개한 이른바 ‘인구조절론’이 그것이다. 역시 신종플루는 연구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 기사는 미세생물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마이크 애덤스라는 인물이 작성했다. 그는 기고를 통해 “인구 증가로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하면서 ‘세계정부’가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인플루엔자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종플루가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SF영화 소재로 어울릴 법한 그의 주장을 조금 더 들어보자. 그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심각한 기후변화에 봉착하자 각국 정부가 모여 싱크탱크를 조직했고, 여기서 가장 은밀하고 손쉽게 인구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바이러스 유포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서두에 등장한 미국의 제약회사 박스터는 이들 세계정부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 박스터는 이들을 위해 실험실에서 바이러스를 만들어 검역체계가 허술한 멕시코에 퍼뜨렸는데, 이는 이 인플루엔자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퍼지는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베타테스트’였다는 게 음모론의 요지다. 물론 그 최종목표는 세계의 인구를 줄이는 것이다.

    만약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래서 세계 인구를 줄이기 위해 신종플루를 만들었다면, 이 세계정부의 능력은 한심스럽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유감스럽게도(?) 신종플루는 현재 전염속도는 빠르지만 생각보다 치사율은 낮으며, 위험도도 일반 인플루엔자와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기 때문. 7월9일 기준으로 WHO와 보건당국이 집계한 국내 신종플루 감염자는 341명이며, 전세계적으로는 9만4512명이 감염됐다. 국내에서는 아직 사망자가 없지만 해외에서는 19개국에서 4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정도로는 ‘인구조절’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음모론의 숨은 의미

    물론 아직 불안감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최근 지구 남반구에서 기승을 부리는 신종플루가 다시 기온이 내려가는 10월 이후 북반구에 재유행하면 변종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고 있다. 더구나 덴마크, 일본, 브라질 등지에서는 유일한 치료제인 타미플루에 내성을 가진 신종 바이러스가 산발적으로나마 발견된 바 있다. 내성 바이러스가 확산될 경우 1918년 5000만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과 비슷한 양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바로 이 불안감이 신종플루를 둘러싸고 곳곳에서 난무하는 음모론의 ‘진짜 원인’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선사시대로부터 인류는 생존을 위협받는 순간에는 그 위협의 정체에 대해 어떻게든 나름의 설명을 붙이고 이를 신봉하는 대응패턴을 보여왔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과학으로 발전했고, 다른 한 가지는 종교로 발전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신종플루에 대한 음모론은 이 새로운 위협에 대한 나름의 대응패턴이다. 여기에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이나 국제기구, 다국적 거대기업에 대한 불신이 결합하면 그럴싸한 그림이 완성된다. 그 가운데 십중팔구는 주류 질서에서 배제된 이들의 소외감과 분노가 녹아 있다.

    럼스펠드 전 장관이 길리드사이언시스의 대주주가 아니었다면,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창궐하는 전염병 앞에서 특허권의 일부를 공탁하는 적극적인 대응책에 동참했다면, 그래서 세계가 맞닥뜨린 위협을 조기에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인류 전체가 공유할 수 있었다면, 과연 이러한 음모론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음모론을 그냥 웃어넘길 헛소리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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