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대통령의 부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가만히 청와대에 있으려면 좀이 쑤실 게고, 그렇다고 밖으로 나다니자니 국민의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선지 청와대의 안주인 권양숙(權良淑) 여사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취임 6개월을 맞은 요즘도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림자’ 내조에 주력하고 있다.
권양숙 여사가 청와대 관저에서 본관으로 출근하는 노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청와대 생활 6개월을 맞은 권여사는 주부와 어머니로서의 평범하고 소박했던 일상사를 그리워하는 듯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공식적인 것이 되는 생활이어서인지 약간은 답답해 한다는 느낌도 전해졌다.
“일요일 아침만큼은 직접 차려요”
권여사는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주저하지 않고 자녀문제를 꺼냈다. “1년도 안 돼 아이 둘 다 결혼을 했잖습니까. 결혼 전에는 내가 아이들을 계속 챙겨줬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사나 감독하고 싶고, 궁금한데 간섭이라고나 할까 그런 걸 못 해봅니다.”
한 기자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총리 재임시절 딸집에 가서 도배를해줘 호평을 받았다며 바깥 출입을 권유하자, 권여사는 “그렇지 않아도 꼭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며느리가 아이를 낳으면 핑계를 대고 한번 가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대통령 취임 직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와 결혼식을 올린 배정민씨는 현재 임신 4개월이다.
매주 일요일 아침식사를 하러 청와대에 들어오는 며느리와 딸에게 어머니로서 무엇을 당부하는지를 물었다. 권여사는 “잔소리 비슷한 것을 합니다. ‘부부는 신뢰해야 한다,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둘 다 신혼이어서 아마 지금 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자주 듣다보면 ‘부부는 믿는 거다’란 생각을 갖게 될 것 아니겠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권여사는 가족과 함께하는 일요일 아침식사에 각별한 의미를 뒀다. “일요일 아침만큼은 직접 지어먹습니다. 일하시는 분이 준비를 다 해놓으니까 힘들지는 않아요. 오전 8시든, 9시든 편한 시간에 편하게 입고 식사합니다. 굉장히 편안하고 좋습니다. 다른 날에는 정확하게 오전 7시면 밥을 먹습니다. 그런데 하루 세끼를 단정하게 입고 먹으니까 좀 섭섭합디다. 규칙이라는 게 편한 점도 있습니다만,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지금은 몸에 익었습니다만.”
권여사는 정확한 민심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도 안타까워했다. 노대통령이 후보 시절 청와대에 입성하면 여당 속의 야당으로, 대통령에게 정확한 민심을 전달하겠다고 다짐했던 권여사이기에 그 안타까움이 더한 듯했다.
“일반인 속에서 느끼는 민심과 언론보도를 보고 느끼는 민심은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사저에 있을 때 TV와 신문을 빼놓지 않고 봤는데, 그때는 시장도 가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했잖아요. (그걸 못해서인지) 여기에서는 조금 더딘 느낌입니다. 좀처럼 느낌이 가슴에,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청와대 밖으로 나가 다니고 싶은 생각은 많은데, 한번 나가는 게 쉽지 않네요. 아이들을 통해서나, 가끔 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듣습니다만 부족하죠.”
아울러 권여사는 청와대 생활이 상당히 긴장감 있게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요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큰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청와대) 와서는 뉴스를 보더라도 마음 졸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안 되는데,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안 될 텐데…. 긴장이 됩니다.”
남편인 노대통령에 대한 염려도 상당했다. 측은해 한다고 할까. 권여사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에선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편이 본래 밖에서는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집에 와서는 얘기를 잘 안하는 편입니다. 바깥일을 집에서 시시콜콜하게 얘기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겠죠. 그게 아내로서는 불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해가 갑니다. 워낙 긴장해서 일을 하다보니까 집에 오면 쉬고 싶겠죠.”
작년 가을 후보 부인 토론회 때 권여사가 남편에게 몇 점을 주고 싶으냐는 질문에 “70점”이라고 했던 게 생각난 듯 한 기자가 “지금은 몇 점을 주고 싶으냐”고 물었다. 권여사는 “지금은 좀더 줘야죠”라고 답했다. 대통령이 힘들고, 어렵게 일하고 있다는 점을 대변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권여사는 “대통령이 눈에 다래끼가 나서 오늘 공식일정을 취소했어요. 여름 휴가 때 얻은 것인데 지방샘 구멍이 막혔다고 하더군요. 인상이 너무 나쁘게 (언론에) 나와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권여사의 건강관리와 휴식법으로 옮겨졌다.
먼저 골프 얘기가 나왔다. 청남대에서 보낸 첫 휴가 때나 6·15 남북정상회담 3주년 때 태릉CC에서 노대통령이 군장성들과 골프를 할 때 권여사가 함께 있었던 게 인상 깊었기 때문이리라. 한 기자가 골프를 잘 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자 권여사는 “실제보다 너무 좋은 성적을 거둬서 고맙죠, 뭐”라면서도 “초보 싱글”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골프와의 인연을 자세히 설명했다.
“1995년 지방선거 때 시작했어요. 하도 기가 죽어서(부산시장 선거 낙선) 올라와서는 둘(노대통령과 함께)이서 함께 골프연습장을 찾아갔습니다. 남편은 시간이 안나서 1주일 만에 그만뒀습니다. 나도 선거 때는 못하고, 선거 끝나면 하는 식으로 하다말다 했습니다. 여기(청와대) 들어와서는 휴가 때 네 번쯤 쳤습니다.”
그러면서 권여사는 “어떻습니까. 제가 골프를 치는 게”라며 의견을 구했다. 노대통령의 이미지가 서민 대통령이란 점에서 대통령 내외가 골프를 치는 데 대해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듯했다. 기자들이 “아무래도 시기가 중요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권여사는 골프를 해야 하는 당위성 같은 것을 열거했다.
“여기(청와대)는 워낙 입구가 넓고 잘 가꾸어져 있는데 안에서만 왔다갔다하니까 갇혀 있는 느낌이 듭니다. 업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휴식이 필요해요. 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조금씩 하려고 합니다. 일이 좀 몸에 익고 안정되면 (필드에) 나가려고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이 과정에서 권여사는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가 일반인에게 공개된 데 대한 아쉬움을 살짝 내비쳤다. 기자들이 부시 미 대통령이 크로포드 목장에서 재충전을 한다는 점을 들어 휴식을 어디에서 취하느냐고 묻자 권여사는 “우리는 괜찮지만, 후임자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쉴 데가 없어요. 대통령은 정말 머리를 풀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한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언론 없이 청와대 주인은 힘들었을 것
권여사는 어떤 화제가 던져져도 막힘없이, 노대통령과 비슷한 억양과 솔직한 화법으로 답했다. 그러나 노대통령과 언론과의 썩 좋지 않은 관계에 대한 질문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자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권여사는 “틀림없이 그 질문이 있을 거라 예상을 했습니다. 답변도 좀 생각하고 고민하고 왔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남편의 정책을 따라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피해가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조심하고 나왔습니다”라며 잠시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솔직한 성격의 권여사는 곧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빠른 속도로 토해냈다.
“얘기는 그렇게 해도 남편이 속상할 때는 아내도 속상하죠. 그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아내인 제가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겠습니다. 사실 언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없었겠죠. 대통령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언론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우리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청와대 주인 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권여사는 잠시 겸연쩍어하더니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참석자 대부분 현재 언론에 몸담고 있다는 점에서인지 그쯤으로 질문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권여사는 언론의 불만을 이해한다면서 이해를 구했다.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아 긴장을 좀 했습니다. 대통령은 뭔가 좀 해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됐습니다. 대통령 된 것부터가 큰 변화인데, 그 사람은 보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이 적응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정확한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 대통령은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못 가는 상황으로 (언론이) 몰아붙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고 보면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표현하는 과정에서 긴장관계가 강조된 것 같습니다. 대립각을 세워서 가자는 생각은 아닙니다. 잘 지켜봐 주세요. 잘하는 것이 있으면 칭찬해주세요. 매만 맞다보면 매만 때린다고 할 수 있으니, 열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하면 잘한다고 칭찬도 좀 해주세요. 감히 부탁을 드립니다.”
권여사는 상당히 난감한 주제의 질문이었는지 “제가 선거운동을 할 때에는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잘 못합니다. 하지만 퇴보해서가 아니라 조심스럽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바람직한 영부인상에 대해서도 권여사는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한 기자가 구체적으로 힐러리 클린턴과 로라 부시 중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를 물었다.
권여사는 “힐러리 클린턴이 쓴 책 1·2권(살아있는 역사)을 다 읽었습니다. 정말 나는 그렇게는 못 되겠습디다. 밑천도 부족하고요. 로라 부시는 어린이 책 읽어주기에 관심이 많고 그런 류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사정이고 나는 어느 부인을 흉내내고 싶다기보다는 노무현 대통령에 맞는 영부인이 되고 싶습니다. 제대로 못하고 5년을 마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됩니다(웃음). 대통령이 빠뜨리고 못한 것 있으면 환기시키고 찾아보는 역할이 제일 적합할 것같습니다.”
권여사는 후보 부인 시절 닮고 싶은 영부인상에 대해 서슴지 않고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를 꼽았다. 여당 속에서 혼자서라도 야당 역할을 한 육여사를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대답은 대통령후보 부인에게는 예상 시험문제의 모범답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권여사의 대답은 상당한 진전이 있어 보였다.
권여사는 행사 참석이 많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에 비해 조용히 지내는 편이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이여사와는 달리 권여사는 여성계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여성계와 청와대를 이을 통로가 없다는 여성계의 볼멘소리도 나온다. 그런 면에서 여성 언론인들과의 오찬은 앞으로 권여사가 여성계에서부터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권여사도 “앞으로는 보폭을 넓힐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권여사는 청와대 안팎에서 노대통령에게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있는 엄격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다. 노대통령에게 걸맞은 한국형 영부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권여사가 앞으로 어떤 영부인상을 보여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