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당 ‘지역구도 타파’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
- 신당파 ‘코드 정치’는 ‘패거리 정치’
- 노대통령 구상은 ‘지역분열형 다당제’
- 千·辛·鄭 모두 기득권자
- 노무현 승리는 호남세력 덕분
- 노대통령에 협력과 비판 병행할 것
9월13일 저녁,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그러나 신당의 배후에는 사실상 노대통령이 있다는 것과 신당 추진의 본질은 정치개혁이나 지역주의 타파가 아니라 새로운 지역주의를 일으켜 권력을 유지, 확대하려는 것이라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애를 썼다. 그는 신당추진 세력의 목표에 대해 한마디로 “인적 청산과 주도권 확보를 통해 다음 정권까지 차지하겠다는 것”이라고 단정한 뒤 “성공한 대통령이 되는 데 진력하지 않고 본말이 전도된 정치놀음에 빠져 있는 모양이 안타깝다”며 노대통령과 친노(親盧) 신당파 의원들을 겨냥했다. 차분한 음성이지만 시종 ‘결기’가 묻어났다.
- 신당을 추진하는 의원들은 ‘지역주의 탈피’와 ‘3김식 정치행태 청산’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민주당이 지역주의와 3김 시대 유산을 청산하지 못했다고 하는 지적에는 동의합니까?
“동의할 수 없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1년 11월3일 민주당을 탈당했습니다. 지난해 대통령후보와 당대표 선출을 앞두고 제왕적 총재를 거부하는 새로운 당헌 당규를 만들어 새 지도체제를 출범시켰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개혁된 당이 민주당이에요. 금년초에도 당개혁안을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당 개혁을 빌미로 신당을 만든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지역구도 타파만 해도 그래요. 우리가 영남(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습니다. 그 이상 확실한 지역구도 타파가 어디 있습니까. 또 중부권을 기준으로 보면 민주당이야말로 제1당이요, 전국정당입니다. 그런데도 지역구도 타파를 내세우는 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구호에 불과한 겁니다.”
민주당은 역사상 가장 개혁적
- 정치행태 면에서는 민주당이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가령 권위주의 정치와 패거리 정치, 돈 정치 등 구태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민주당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단 민주당만의 문제는 아닐지라도 지구당 체제가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당 대표가 뭘 좌지우지 합니까. 제도에 따라 움직여가는 게 우리 당입니다. 우리는 이미 3김식 정치에서 탈피했습니다. 패거리 정치를 없애자면서 (신당파들이) 코드 맞는 사람끼리 패거리를 짓는 정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구태 아닙니까?”
이 대목에서 목소리의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그는 지구당 기득권 포기 문제에 대해서도 “지구당을 없애자는 것은 은행 지점을 없애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선을 치를 때는 필요하니까 지구당 위원장을 이용하고 이제 필요없다고 물러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터무니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진정한 기득권 포기는 자기들부터 지구당을 폐지하고 ‘우리는 다음 선거에서 국회의원을 안하겠다’고 선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며 “자기네는 신당을 만들어서 다음에 더 많이 당선되겠다고 욕심을 부리면서 남더러 ‘기득권 포기하라’고 외치는 것은 위선”이라고 강조했다.
- 신당의 지역적 기반과 신당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신당은 ‘권력을 잡았으니 노대통령의 힘으로 당선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 같아요.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기득권을 확보하고 안 맞는 사람은 청산하자는 것이죠.
지역적으로는 호남을 탈피하겠다고 얘기하면서도 호남지역 의원들을 끌어들여 당을 만들려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호남표를 밑천으로 당선된 수도권 의원들을 끌어들이려 애쓰면서도 영남에 가서는 ‘(호남에서) 다 안 돼도 좋다. 뜻맞는 사람 10명이 돼도 좋다’며 신(新)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 비주류가 호남을 근거지 삼아 변화를 거부한다면 그것 또한 기득권 지키기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어느 정당이든 나름의 기반을 살려 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궁극적으로 정당이나 정치인은 일정한 지역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회사도 일정한 고객 기반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 지난 대선에서 노대통령이 승리한 요인에 대해서부터 신당파와 당 사수파는 시각을 달리하는 것 같습니다. 노대통령의 당선요인을 무엇이라고 봅니까?
“노대통령이 과거와 다른 스타일로 선거운동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네티즌과 노사모, 희망돼지 저금통 등 새로운 방식들이 국민에게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주된 요인은 무엇보다 민주당을 걱정하는 호남세였습니다. 젊은층 표란 것도 선관위의 발표를 보면 다른 선거에 비해 별로 많이 얻은 게 아닙니다. 민주당이 승리해서 정권을 재창출하기를 바라는 지지자들, 특히 호남 사람들의 지지로 당선된 것입니다. 노대통령도 이 때문에 당선 일성으로 ‘국민통합’과 ‘지역통합’을 표방했었는데 실제 행보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승리는 나의 것’이라는 식으로 나선 데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 깨면 정치적 심판 받을 것
그는 이 대목에서 노대통령의 ‘코드 정치’에 대해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그런 인식이 각종 현안이 생길 때마다 권력과 국민이 사사건건 부딪히는 원인이 됐다. 권력은 베풀어야 하는데 반대자를 외면하고 ‘코드’만 찾다 보니 어느 한 분야도 부딪히지 않는 게 없다”며 “무엇보다 노대통령 자신에 의해 이런 불안이 야기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 비주류 의원들은 신당파 의원들과 노 대통령이 민주당과 지지세력을 ‘배신’했다고 하는데 무엇을 배신했다는 거죠?
“나는 배신자란 말은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뻐꾸기도 남의 둥지에 가서 자라지만 절대 둥지를 부수고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부수고 가겠다는 겁니다. 신당을 하겠다는 어떤 사람은 ‘민주당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 신당파의 핵심 인물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천을 받고 그 조직과 정치자금을 지원받아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입니다. 정권 재창출도 그 바탕 위에서 이룬 것 아녜요? 그럼에도 당을 부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치적 심판이 뒤따를 것입니다.”
- 새천년민주당도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깃발을 내리고 ‘신당’을 창당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국민회의와 지금 신당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거죠?
“그 때는 전부가 동의해서 한꺼번에 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이가 있어 갈라진 겁니다. 저 사람들은 공멸이라면서 갈라지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공적(公的)으로 행사하기보다는 ‘우리가 잡았으니 우리가 행사한다’는 착각 속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 신당의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자기 모태를 부수고 나간 부도덕한 행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노대통령 지지도가 올라간다면 모를까, 지금 노대통령의 지지도가 올라간다는 보장이 없질 않습니까.”
- 민주당이 대선 이후 집권당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표류해온 데는 대선 때부터 계속된 비주류의 냉소와 비협조, 발목잡기에 원인이 있지 않느냐는 비판도 적지 않은데….
“대선 때 얘길 하는 것은 지도자답지 못한 일입니다. 인적 청산이나 보복을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후보단일화가 성사되고 나서 탈당했던 의원을 모두 다 입당시켰지 않습니까? 당시 내가 당 대표로서 중립에 서고 탈당하려는 의원들을 설득한 것도, 내가 중립에 안 서면 그 사람들이 다 탈당하고 가버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대의원들의 58% 지지를 얻어 당선된 대표더러 그만두라고 발목을 잡은 게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됐으면 총리 인준을 어떻게 받아내고 어떻게 개혁입법을 통과시킬 것인지, 어떻게 생산적 정치를 이뤄낼 것인지를 연구했어야 하는데 ‘너 나가라’면서 코드만 가리다보니 일이 안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싹둑’ 잘라 부정하려면 사회질서에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너 나가라’는 곤란
- 김대중 정부 때도 ‘제2 건국위’등을 통해 정권기반을 강화하려는 데 대해 야당과 학계에서는 ‘단절적 역사관’이라고 비판한 사람이 많았는데요.
“그 때는 있는 사람을 뚝 잘라내고 ‘우리끼리 나라 (운용을) 하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지금은 기성조직 자체를 들어내버리려는 것입니다. (노대통령의) 386 측근이 여당의 사무총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게 지금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제2 건국을 하자며 ‘누구 나가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또 세대교체를 하자고 한 적이 있습니까?”
- 시대적 요구에 맞춰 일정한 정치적 변화와 세대교체도 필요한 것 아닙니까?
“변화는 사회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오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면 세대교체란 인위적인 것입니다. 5·16 때도 세대교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1년 뒤엔 모두 그전 사람과 손잡고 가더라’는 말을 하시더군요. 세대교체는 선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화제를 이해찬 의원에게로 돌렸다. 그는 “이의원이 김대중 정부 당시 교육부 장관으로 ‘교육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교원 정년 단축을 단행해 2000년 총선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느냐”며 “그런데 또 그런 사람이 개혁을 한다고 선봉에 서 있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확실한 기득권자입니다. 정권마다 주류로 살아온 그들이야말로 기득권세력 아닙니까? (우리 같은)비주류한테 기득권을 내놓으라는 게 말이 되느냐구요. 이의원뿐만 아니라 천용택 강봉균 이강래 의원과 임채정 이상수 의원 등 국민의 정부에서 당정의 요직을 지낸 사람들이 신당을 한다고 가 있어요. 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정동채 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전 대표는 또 최근 신당 합류를 선언한 김근태 고문 얘기도 꺼냈다. 김 고문은 ‘분열없는 통합신당’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신당 창당을 비판해오다 9월7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당 주비위원회 참여를 선언, 한 전 대표를 비롯한 당 사수파 의원들과 확실히 분리의 선을 그은 바 있다.
한 전 대표는 “(김 고문은) 상당히 아끼고 신뢰하는 분인데 실망했다”며 “당무회의 폭력사태에 대해 민주당을 대신해 사과한다고 단식농성하더니 신당으로 간다는 것은 무슨 논리냐”며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같이 가기를 원했던 분인데, 잘되길 바란다. 또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김고문에 대한 비난을 자제했다.
- 만일 노대통령이 대선 직후 한 전 대표와 회동해 ‘진심으로 도와달라’ ‘함께 새로운 당을 만들어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개혁을 주도해보자’고 호소했다면 명예롭게 물러나 주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하는 신당파 의원들도 있습니다.
“노대통령은 당초 표방했던 바와는 달리 처음부터 (우리를) 적대시했습니다. 국민통합을 하려면 당내통합부터 해야 하는데, 당내통합을 거부하고 어떻게 국민통합을 한다는 말입니까. 대통령후보가 정통성을 갖고 있다면 대의원들이 뽑아준 대표도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을 해체하고 대표더러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당원과 대의원들의 뜻을 거스른 반민주적 행위입니다. 내년 총선에서 우리는 할 말이 너무 많아 주체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재보선 참패는 노대통령의 실패
- 노대통령은 당정분리를 내세우며 불개입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노대통령은 대선 직후인 지난해 12월24일 나와 조찬을 함께하면서 지도체제를 바꾸자고 하며 이미 (당무에) 개입했습니다. 그래서 당 개혁위원회를 구성했던 것 아닙니까? 대선이 끝나자마자 신주류측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얘기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4·24 재보선 참패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은 ‘민주당이 사망선고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노대통령이 사실상 공천했던 작품입니다.(4·24 재보선에) 우리가 공천한 후보가 어디 있어요? 범여권 후보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노대통령을 팔아서 출마했다가 떨어진 겁니다.”
- 신당 추진 움직임이 본격화하던 무렵 노대통령에게 면담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면담이 성사됐다면 실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까?
“지도자는 솔직해야 합니다. ‘노대통령 생각이 뭐요, 내가 협조할 것은 하겠소, 만일 신당 하겠다면 무엇 때문에 서로 치고받고 추태를 보이고 싸워야 하느냐,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웃으며 헤어져야 한다’ 이렇게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그 전에 전해들은 게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부산의 어떤 부부를 초청했는데 내년 총선은 다당(多黨)체제로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름을 대라면 댈 수도 있어요. 지금 그런 (노대통령의)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말을 듣고, 지역분열형 다당제 구상 아래 분당이 추진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노대통령의 솔직한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 신당 창당에도 노대통령의 정치적 구상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최근에도 신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노대통령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당정분리라지만 우리 당이 여당인데 어떻게 노대통령이 무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대통령을 차지했으니 여당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고 어떻게 정치를 해나가겠습니까? 좀더 당당하고 국민앞에 떳떳해야 합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대다수가 노대통령이 신당에 간여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김원기 고문도 ‘(노대통령이) 내년에 자기한테 조각권을 준다고 했다, 당은 자기한테 맡기겠다고 했다’는 식으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당에 장관 자리 얻으러 간 사람도 많은 것 아닙니까?”
- 그렇다면 신당이 창당되면 노대통령은 민주당을 탈당해야 한다고 보시는 건가요?
“그야 노대통령이 판단할 문제죠. 하지만 지금은 이미 여당이 제구실을 못하는 상황입니다. 여당은 국회에서 야당의 협상 상대인데, 지금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야당과 만나서 모든 교섭을 다 끝내고 있습니다. 야당 대표가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현안을 협의할 뿐이고, 오히려 여당이 청와대와 협의해서 처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미 여당이 여당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이런 상태로 가면 앞으로 ‘야당독재’ 시대가 온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노대통령이 여당 소속으로 있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인터뷰 중인 한화갑 전 대표. 그는 비호남권 인사가 민주당을 리드해 나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우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사력을 다한 사람으로서 도리부터 다할 것입니다. 노대통령을 만났을 때 내가 그랬습니다. 그 추운데 내 안사람까지 절에 가서 선거운동을 했다고. 결국 모두 우리가 여당 되고 싶어서 한 것이라고. 그러니 노대통령을 당선시킨 사람으로서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겠습니다.”
한 전 대표의 ‘합의이혼론’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합의이혼론은 신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노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여당이니까 각개약진한 뒤 선거연합이나 정책연합을 통해 총선 직전 연대할 수 있다는 게 요지다. 다시 합쳐질 그 날을 위해 웃으면서 헤어지자는 식이다. 그러나 일단 헤어진 부부는 남보다 더 원수같이 되는 게 인간사 아닌가. 한 전 대표는 정말 그런 ‘소박한’ 이별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것일까?
“나는 합의이혼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어요. 결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혼을 하겠습니까. 다만 7월31일, 부산의 대표적 친노 인사인 조성래 변호사가 한 스님의 주선으로 상경했을 때 내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은 있습니다. ‘신당은 성공하기 어렵다, 신당은 또다른 지역주의의 시작이고 그런 식으로는 지역구도 타파도 안된다, 그러니 신당과 민주당이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각자 성공해서 만나자, 과거 민주당이 자민련과 연합공천을 한 적도 있다, 헤어지더라도 싸우지 말고 웃으며 헤어져야 한다’고요. 분당을 기정사실화한 게 아니라 민주당과 조 변호사가 주도하는 부산정치개혁추진위가 모두 노대통령의 승리를 위한 당이니까 싸우지 말자는 취지였습니다.”
신당과도 통합은 가능
한 전 대표는 비슷한 맥락에서 분당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통합민주당’ 구상을 제기한 바 있다. 신당파가 ‘통합신당’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의 해체없이 민주당내 모든 세력을 다함께 안고 신당에 간다’는 아이디어를 낸 데 대해, ‘신당을 한다면서 민주당을 해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라며 민주당을 중심으로 외부세력을 통합하는 형태로 민주당을 새롭게 만들자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신당파는 그의 제안에 대해 “민주당을 리모델링해 기존 틀을 유지하려는 비주류, 당 사수파들의 발상과 다를 게 없다”며 거부했다. 한 전 대표는 아직도 ‘통합민주당’을 통해 신당파와 당 사수파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과거에도 야당끼리 분열했다가 통합한 적도 있고 심지어 여야간에 통합을 이룬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적 흐름이란 언제든 변화무쌍한 것이죠.”
盧 당선 이후 난 혼자
-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데, 김대중 정부에서 ‘실세’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그 역할을 넘겨주고 2선에서 국정을 뒷받침하는 게 순리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여당이 형성됐다가 대통령이 끝나면 그 계보는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동교동 계보는 아직 남아 있고 지금도 뭉쳐 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함께 투쟁했고, 유권자들의 지지를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 하지만 동교동계 인사들 중 적잖은 수가 비리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가 있지 않습니까?
“김 전 대통령 주변의 몇 사람이 지금 감옥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잘못된 데 대해서는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얼마전 내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을 면회하러 가서도 그랬어요. ‘바깥에서는 세칭 동교동계가 전부 부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반성하고 앞으로 잘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대북관계에서 민족의 활로를 열어보겠다고 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겁니다. 권 전 고문도 총선에서 당의 승리를 위해 움직이다가 잘못된 것입니다. 국민앞에 사과해야 할 대목이 있지만 개인적 치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 대선 직후 당 대표직을 스스로 조기에 물러나 주류세력이 책임지고 당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했으면 분당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 전 대표도 분당에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던데요….
“무슨 소리예요? 자기들이 나가라고 해서 난 나갔어요. 58%의 지지를 받은 대표가 쫓겨난 겁니다. 단 하루라도 더 머물러 있는 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후보 시절부터 대표실은 유배지였어요. 노대통령 당선 이후 더욱이 난 혼자였습니다. 당초 당 개혁안을 완성해놓고 물러나겠다고 했지만 그 전에 물러났습니다. 오히려 내가 물러나는 바람에 당이 깨졌다고 나한테 항의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 신당이 창당되고 나면 민주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할 생각입니까?
“우선 당을 정상적 궤도에 올려놓고 강도 높은 당 개혁과 외연 확대를 통해 국민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당 개혁 프로그램은 이미 뼈대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중앙당 슬림화와 원내중심 정당화, 국민참여형 상향식 공천제, 지방당으로의 권한 이양 등이 그 골자입니다. 또 국민에게 민생 경제 남북문제 등 국정 어젠더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입니다.”
수도권 중심 정당 지향
-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신당의 득표율을 각각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수도권이 중심이 된 전국정당이 될 것입니다. 승리할 자신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민주당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단결해 있습니다. 그 분들이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앞장서 뛸 것으로 확신합니다.”
- 직접 당 대표로 전면에 나서 그런 지지를 모아나갈 생각입니까?
“내년 총선에서는 비호남권 인사가 당을 리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 전 대표를 두고 주변에서는 흔히 ‘100m 미인’이라고 평가한다. 권력에서 멀리 있을 때는 정치적 역할이 빛나는데 막상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면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그는 2월23일 당 대표직을 내놓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당파의 창당 움직임이 본격화되던 5월 중순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노대통령과 신당파에 대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더불어 파죽지세로 상승하던 신당 추진 흐름에 급제동을 걸고 당 사수파를 세력화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반면 ‘잘나가던’ 김대중 정부 5년 내내 ‘실세’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 당무와 국정 현안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본 적이 별로 없다. 그저 ‘리틀 DJ’라는 별명처럼 김 전 대통령의 ‘아류’로 묻혀 있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지난 대선에 나섰다가 일찌감치 뜻을 접어야 했던 데는 그처럼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국민앞에 각인시키지 못한 한계가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평가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의외로 평범했다.
“무엇을 지키려면 안보이는데 그것을 던지고 비우니까 길이 보이더군요. 아직도 한참 공부하고 다듬어야 할 사람이지만, 과거엔 백면서생(白面書生)처럼 앞의 것만 보이다가 이제는 조금 내려다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내가 마음을 비우고 정당하게 가면 반응도 정당한 것이 돌아오고, 욕심을 앞세우고 가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