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 한번도 독립국가를 이뤄본 적이 없는 쿠르드족. 터키, 이란, 이라크 등 5개국에 흩어져 살면서 온갖 핍박을 받아온 이들의 독립, 저항운동사는 처절하기만 하다. 이라크전쟁 후 이라크 과도통치위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저항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쿠르드족은 산악민족답게 성격이 거칠고 자존심이 강하여 타민족의 통치를 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폐쇄적인 산악환경으로 인해 봉건주의적인 명령계통, 즉 지주나 부족장의 명령에는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편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쿠르드족은 좁은 의미에서의 자치를 누리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강대국에 완전히 복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쿠르드족의 영토는 쿠르디스탄(Kurdistan)으로 알려진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다.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의 중앙에 위치한 자그로스 산맥지대가 쿠르드족의 영토다. 쿠르디스탄 지역은 32만㎢로 프랑스 또는 미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를 합친 정도의 크기다. 동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터키, 남쪽으로는 이라크와 접하고 있다. 과거에 쿠르드족은 북쪽으로는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인, 북동쪽으로는 아제르인, 남동쪽으로는 루르인, 남서쪽으로는 투르크멘인들과 맞대고 있었다.
터키에서 쿠르드족의 땅은 수도인 앙카라 남쪽인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지역에 위치한 산악지대이며 마르딘 등 8개주가 이 지역에 속한다. 그 외 우르파 등 7개 주에도 쿠르드인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했던 땅을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인간의 갈등 원인이 되고 있다.
쿠르드족의 언어, 문화, 역사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만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언어 하나만 봐도 쿠르디스탄 지역의 북부는 쿠르만지(Kurmanji)어를 사용하며 남부지역은 소라니(Sorani)어를 사용한다. 북서부는 자자(Zaza) 언어권이다. 남부 몇몇 지역은 구라니(Gurani)어를 사용한다.
쿠르드족은 다시 150개 이상의 작은 부족으로 나뉘며, 그들끼리도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방언을 가지고 있다. 지역마다 각기 문화도 다르다. 그러니 쿠르드족의 정체성을 찾기란 힘든 일이다. 쿠르드인 자신조차도 혼란스러운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5개국 접경이 된 쿠르드 지역
그러나 종교적으로 보면 쿠르드족의 99% 이상은 수니 무슬림이다. 극히 일부인 3만여 명이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 10만명 이상의 아시리아 기독교인, 4만∼5만명의 예지드파(쿠르드 전통 종교)가 있을 뿐이다.
아랍인과 같이 쿠르드인들도 전통적인 쿠란학교와 모스크에서 아랍어와 종교교육을 받는다. 쿠르드 종교지도자인 물라는 종교교육을 통해 쿠르드인들에게 전통문화교육을 시키고 있다. 각국 정부는 이들 물라로 하여금 쿠르드족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터키에서 시작한 쿠르드 땅은 이라크와 이란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인 모술과 키르쿠크 등은 쿠르드족의 땅이다. 이란 북서부에 걸쳐 있는 쿠르디스탄과 마하바드도 쿠르드 땅이다.
쿠르드족은 터키에 43%, 이란에 31%, 이라크에 18%, 시리아에 6%, 구소련에 2%가 거주하고 있다. 1990년 통계를 기준으로 2000년의 쿠르드족 분포를 추산한다면 터키 국민의 24%인 1500만명, 이란 국민의 12.4%인 800만명, 이라크 국민의 23.5%인 600만명, 시리아 국민의 9.2%인 150만명, 구소련의 0.34%인 50만명 정도다. 이처럼 쿠르드 지역은 5개국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쿠르드족에게 있어 국경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그저 거주 국가에서 반정부 저항운동을 하다 도망갈 때 정부군이 추격할 수 없는 경계선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다. 이로 인해 종종 국가간 주권침해라는 정치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터키는 1991년 걸프전 이후쿠르드 반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이라크 영내에 깊숙이 들어가서 군사작전을 했다. 당시 후세인 정권은 미국과 유엔의 제재조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항의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한편으로 후세인 정권도 미국의 지원 하에 쿠르드족이 봉기를 일으키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터키가 자국 영토에 들어와 쿠르드족 소탕작전을 벌여도 묵인한 것이다.
쿠르드 주변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쿠르드족을 이용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란, 이라크의 갈등관계에서 양국은 상대국 내의 쿠르드족을 지원하며 반정부운동을 격화시켰다.
쿠르드족의 저항, 독립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지원하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자치공화국을 건설한 후부터다. 이에 자극을 받은 쿠르드인들이 터키, 이라크, 이란에서 각각 저항운동을 계속해왔다. 저항 과정에서 쿠르드인의 정체성 역시 견고하게 형성됐다. 각국의 도시에서는 쿠르드 지식인들이 쿠르드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당활동을 하고 있다. 1993년 오슬로협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행정부가 가자지구와 웨스트 뱅크에 세워지자 쿠르드족 역시 이에 자극을 받았다.
이라크전쟁 후 쿠르드족 대표 5명이 이라크 과도통치위에 참여해 앞으로 터키와 이란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터키와 이란은 터키 제일주의, 이란 제일주의를 소수민족통치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양국은 쿠르드족을 ‘산악지역 터키인’과 ‘산악지역 이란인’이라고 부를 뿐 쿠르드족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호메이니도 쿠르드족이 무슬림 형제임을 강조하여 이슬람의 정체성으로 동화시켰다. 이라크는 쿠르드족의 자치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주변 국가는 모두 쿠르드족이 국경분쟁의 완충 역할을 하는 자국내 산악인 부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다.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는 터키, 이란, 이라크 순으로 쿠르드족 저항운동의 역사와 실태를 살펴본다.
강력한 동화정책 펼친 터키
터키 내 쿠르드인들의 봉기는 19세기 초 아랍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시작됐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쿠르드족의 반란이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880년 터키 내 쿠르드 족장이었던 셰이크 우베이둘라(Sheikh Ubaidullah)가 이란 지역 내에 쿠르드 민족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당시 우베이둘라는 8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란을 침공했으나 반격이 거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쿠르드인들에게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오스만 터키를 분할하기 위해 1920년 세브르조약에서 터키 동남부지역에 쿠르드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그러나 케말 파샤의 터키독립전쟁(1919∼23년)이 진행되면서 쿠르드족 자치문제는 국제정치협상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케말 파샤는 1919년 쿠르디스탄의 에르주룸에서 국민회의를 열어 종교적 형제애를 강조하고 터키-쿠르드 연합전선을 형성해 당시 아나톨리아를 강점하고 있던 서구 강대국들에 대항했다. 그는 이슬람을 믿는다는 것을 내세워 당시 기독교 아르메니아인과 대립하고 있던 쿠르드족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 1923년 케말 파샤는 터키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터키 제일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같은 해 로잔조약에서 강대국들은 터키의 항의로 쿠르드족 자치문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터키 정부는 쿠르드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이후 크고 작은 쿠르드족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25년 2월 시작된 낙쉬반디(Naqshibandi) 수피 종파 셰이크 사이드의 봉기이다. 사이드의 반란은 1만5000명의 쿠르드족을 동원한 거대한 봉기였다. 하지만 쿠르드 자치보다는 터키에 이슬람 정통국가를 건설한다는 종교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이에 터키군은 5만2000명의 정규군과 12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전사자만 총 8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민족봉기였다. 터키군은 52명의 쿠르드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1만5200여 명의 쿠르드인을 학살했다. 1932년 터키는 쿠르드족 이민법을 제정하여 강제이주정책으로 쿠르드족을 분산시켰다. 1937년부터 터키 정부는 쿠르드인 거주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쿠르드인들을 감시했다.
한편 1차 세계대전 말 영국은 쿠르드족의 반란을 이용해 모술과 키르쿠크 등 쿠르드 땅을 차지했다. 이 두 지역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이라크로 편입되면서 현재 이라크의 영토가 됐다. 하지만 터키는 지금도 이 지역들을 자국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테러조직 성향 강한 쿠르드 노동자당
현재 터키의 대표적인 쿠르드 반군지도자는 압둘라 오잘린이다. 오잘린이 이끄는 쿠르드 노동자당(PKK)은 정부군, 경찰, 학교, 휴양지 등에 무차별 테러를 저질렀다. 1984년부터 1994년까지 PKK는 217명의 교사를 납치했고 700개 이상의 학교가 쿠르드의 테러로 폐교했다. 터키 정부는 PKK를 범죄, 테러조직으로 보고 쿠르드족의 대표단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1949년 터키에서 출생한 오잘린은 앙카라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23세에 쿠르드 민족운동을 하다가 7개월간 투옥된 경험이 있고 1974년 PKK를 조직하여 반정부운동을 계속했다. 1980년 시리아로 망명한 그는 시리아와 레바논 고원지대에 쿠르드족 반군 훈련 캠프를 만들어 운영했고, 1984년 쿠르드 무장 저항군을 조직해 터키 정부와 테러 전쟁을 벌였다. 터키군과 PKK 반군과의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끊임없는 내전이었다.
쿠르드족의 주요 거주 지역
터키 정부가 쿠르드와의 테러 전쟁을 선언하면서 쫓기는 몸이 된 오잘린은 시리아의 도움마저 받을 수 없게 되자 케냐 주재 그리스 대사관으로 임시 피신했다. 터키와 그리스는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놓여 였다. 오잘린은 주 케냐 그리스 대사관에서 12일간 은신하다가 다른 은신처로 이동하는 중 터키 특수부대에 체포됐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사드 정부기관과 미국이 오잘린 체포에 도움을 주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유럽에 있는 전 쿠르드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이후 이스라엘 공관, 케냐 공관, 유럽연합본부, 터키 공관, 미국 공관 등은 쿠르드족의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PKK를 비롯한 쿠르드족 테러조직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과 연계될 수 있어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고 있다. 결국 이스라엘과 케냐는 잠정적으로 해외공관을 폐쇄했다. 특히 주베를린 총영사관에서 이스라엘 경비병들이 격렬히 항의하는 쿠르드인들에게 발포해 20명의 사상자(3명 사망, 17명 부상)가 발생하면서 이스라엘과 쿠르드족 사이는 급격히 냉랭해졌다.
오잘린의 체포는 일시적으로는 쿠르드 반군의 공격을 약화시켰지만 결과적으로 오잘린을 쿠르드족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만들었고 이들을 결집하도록 했다.
오잘린 체포 후에도 PKK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PKK는 이라크의 쿠르드 애국동맹(PUK)과도 가까운 사이다.
종교적 우호관계보다는 국익 우선
역사적으로 이란의 쿠르드족은 오스만투르크를 지지해왔다. 수니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연대감으로 시아 무슬림인 이란 정권에 대항했던 것. 1514년 우르미예의 찰디란(Chaldiran) 전투에서 오스만의 셀림 술탄군대는 쿠르드족의 도움으로 이란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로써 쿠르드족은 이란 내에서 오스만 술탄의 통치하에 자치를 인정받기도 하였다. 당시 아르달란(Ardalan)과 무크리얀(Mukriyan) 공국이 이란 내 쿠르드 자치지역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 내에도 쿠르드 족장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는 16개의 크고 작은 쿠르드 공국이 있었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 앞에 과거의 우호관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쿠르드 국가를 건설하려던 셰이크 우베이둘라의 반란은 오스만-이란 연합군에 패배했다. 이처럼 쿠르드족의 봉기는 주변 당사국들에 의해 철저히 차단당했다. 이들이 단지 국경분쟁의 완충 역할을 하는 자국내 산악인 부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란 내 쿠르드 지도자는 우르미예 호수 서남부 전지역을 장악했던 부족장 심코(Ismail Agha Simko)였다. 1918~22년까지 심코 족장이 세력을 확장하자 이란 정부는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이에 심코 족장은 터키로 후퇴했지만 터키군에 체포됐다. 하지만 곧바로 석방되어 다시 이란으로 돌아왔고 1930년 전사할 때까지 쿠르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심코 족장의 반란은 이란 내 쿠르드족이 자치지역을 건설하려는 첫 시도로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란 내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은 심코에게서 그 정체성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쿠르드족은 소련의 비호를 받아 마하바드 공화국을 수립했다. 당시 이라크 쿠르드족의 전설적인 지도자 무스타파 바르자니도 반군을 이끌고 이란으로 와서 쿠르드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 대통령으로 이란 쿠르드 민주당 지도자 카지 무하마드(Qazi Muhamad)가 선출됐다.
하지만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은 상징적인 국가였을 뿐이었다. 1년 후 1946년 5월 소련군이 마하바드 지역에서 철수하자 그 해 12월17일 쿠르드 공화국도 끝났다.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존속했을 뿐이지만 이란의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은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이는 쿠르드족 민족주의의 성공사례이며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민족사였다.
공화국이 붕괴되자 바르자니는 소련으로 망명했다. 소련에서 군사 게릴라 교육을 받은 그는 이라크의 공산주의자인 알 카셈이 혁명에 성공하자 이라크로 귀국했다. 이때부터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는 쿠르드족의 강력한 지도자가 됐다. 바르자니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자세히 하기로 한다.
이란에서 쿠르드족 저항운동은 쿠르드 민주당(KDP) 무장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1966년까지만 해도 이란의 KDP와 이라크의 KDP는 서로 협력하는 우호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이란, 이라크 양국이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이들은 이질적인 세력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란의 팔레비는 이라크 내 쿠르드 세력을 이용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을 공격했다. 반면 후세인은 이란 내 쿠르드족을 지원하여 팔레비 정권에 대항하게 했다.
1988년 사담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이용해 쿠르드족을 학살한 사건도 양국이 쿠르드족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와 이란은 쿠르드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란은 쿠르드 정치지도자들을 해외에서 암살하는 것으로 이들의 정치운동을 차단했다. 1989년 이란 KDP의 지도자 가셈로우가 비엔나에서 이란대표단과 회담 도중 암살됐으며 1992년 KDP의 사무총장 샤라프칸디도 베를린에서 암살됐다.
한편 1969년 테헤란 중심의 쿠르드 대학생들이 사회주의이념으로 무장한 지하혁명조직 코말라(Komal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KDP와 함께 현재 이란의 대표적인 쿠르드 저항세력이다.
이라크의 쿠르드족도 터키나 이란과 같이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저항운동이 성공한 편이다. 걸프전쟁 후 유엔의 경제봉쇄정책과 비행금지구역설정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이라크 쿠르드족의 지도자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다. 미국에서 3년간 암 투병생활을 하다 1979년 운명할 때까지 그는 쿠르드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알 바르자니 가문 역시 쿠르드족의 반란을 이끌어왔다.
쿠르드족 승리 이끈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
1919년 아랍인인 마흐무드가 쿠르드 지역인 술라이마니야(현 이라크의 주) 주지사로 임명됐을 때 알 바르자니 가문을 중심으로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1932년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 지역에 경찰력을 배치하고 조세정책을 발표하자 쿠르드족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 바르자니의 형인 셰이크 아흐마드는 쿠르드족의 봉기를 주도했지만 이라크군에 쫓겨 6개월 만에 터키국경수비대에 투항했다.
셰이크 아흐마드의 봉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라크 왕이 알 바르자니 쿠르드 부족에게 사면을 발표하고 생필품을 제공하면서 셰이크 아흐마드 3형제는 모두 이라크 정부에 투항했고 이라크는 이들을 술라이마니야의 한 지역에 연금해 쿠르드족과 격리시켰다. 하지만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는 연금지역을 탈출한 후 쿠르드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는 1946년 이란에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에도 소련의 비호하에 중심역할을 했고 그 후에는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46년 8월 이란에 있으면서도 이라크에 무장세력인 쿠르드 민주당(KDP)을 조직해 쿠르드족을 동원하는 리더십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1958년 공산주의자 카셈의 혁명정부가 성공하자 이라크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터키, 이란, 이라크 등 쿠르드 전지역의 전설적인 지도자가 됐다.
1970년대 들어 이라크 북부지역은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남부지역은 시아 무슬림의 저항에 시달렸다. 쿠르드 저항운동의 결과로 이라크 바아스 정권은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평화협정의 내용은 ▲쿠르드어 사용 허용 ▲모술과 키르쿠크 지역을 쿠르드 지역으로 인정하며 이 지역 석유자원으로 쿠르드의 경제개발을 보장할 것 ▲독립된 군대와 경찰병력, 중앙행정부의 차석을 쿠르드인으로 임명할 것 등 획기적인 것이었다.
평화협정의 체결은 쿠르드족의 승리를 의미한다. 1960년대에 쿠르드족은 6만명 이상이 희생됐으며 3000개 이상의 쿠르드 마을이 파괴됐다. 하지만 평화협정 후 1만3000개 이상의 쿠르드족 일가가 정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았다.
1975년 5월 이라크 정부의 쿠르드 대사면령으로 14만명의 이라크 쿠르드족이 이란에서 귀환했다. 하지만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의 두 아들인 마스드와 이드리스는 사면령에서 제외했다.
KDP 이외 쿠르드 저항세력으로는 잘랄 탈리바니가 이끄는 쿠르드 애국동맹(PUK) 세력이 있다.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가 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1년 전인 1975년 잘랄 탈리바니는 도시지식층을 중심으로 PUK를 조직했다. PUK의 탈리바니는 무스타파 알 바르자니가 없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저항운동을 이끌어갔다.
이라크전쟁 당시 북부 산악지대로 대피하고 있는 이라크 내 쿠르드족.
1983년 발생한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이란군 15만명이 쿠르드족의 PUK 민병대를 공격했다. 1984년까지 이란은 쿠르드 지역에 25만명의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다. 후세인은 쿠르드 사막 주민에게 대사면령을 내려 이란과의 전쟁에 동원했다. 후세인은 사막지역에 쿠르드족을 거주시키며 이란과의 국경지역을 지키도록 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쿠르드족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쿠르드족을 용병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1985년 전쟁이 확대되자 이라크 북부지역은 거의 치안공백기나 다름없었다. 쿠르드족의 저항, 독립운동은 정점을 이루었다. 이때 탈리바니의 PUK는 키르쿠크와 술라이마니야 지역을 장악했으며 마스드 알 바르자니의 쿠르드 민주당(KDP)은 바르자니 지역과 시리아 국경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1987년 전쟁 막바지에 PUK, KDP 두 세력은 다른 쿠르드 세력들을 규합해 쿠르드 연합전선(IKF)을 만들었고 후세인 정권에 조직적으로 대항했다. 쿠르드 연합전선은 이란의 지원하에 술라이마니야에서 동쪽으로 25㎞ 떨어진 전략 요충지역을 장악했다. 이라크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라크는 쿠르드족이 이란을 지원하는 적대행위에 격분하여 쿠르드에 대한 소탕작전을 감행했다. 이라크는 약 50만명의 쿠르드 난민을 이란의 사막지역으로 추방했다. 북부 키르쿠크 지역에서도 수천명의 쿠르드인과 소수인종인 투르크멘인을 추방했다.
1987년 4월 이라크 정부는 술라이마니야 지역의 일부 PUK 세력에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유엔 조사에 의하면 이라크군은 4월에서 11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조직적으로 이란군과 쿠르드족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했다. 특히 30개 이상의 쿠르드 마을이 화학무기의 공격을 받아 희생됐다고 알려졌다.
1988년 할라브자(Halabja) 쿠르드 마을에 대한 이라크 공군기의 화학무기 살포로 5000명 이상의 쿠르드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화학무기사용을 금지하는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것으로 아직까지도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1991년 이라크 내 쿠르드족과 시아 무슬림의 봉기가 잇따랐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똑같이 억압받았다는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했다. 쿠르드족과 아랍인 간의 의식 차이 때문인데, 쿠르드족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고 시아 무슬림은 이라크 내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결국 쿠르드족과 시아 무슬림의 봉기는 후세인 군대에 의하여 진압됐다.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패배한 지 일주일 만에 이란으로 망명했던 알 바르자니 쿠르드인들이 이라크에 귀환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3주 만에 쿠르드 전지역으로 확산됐다. 이는 이라크 영토의 5분의 1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마치 쿠르드 국가를 건설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달 만에 이라크 군대에 항복했다. 후세인은 한편으론 화학무기로 쿠르드족을 위협했고 한편으론 평화휴전안을 내세우며 이들을 설득했다. 유엔의 대이라크 봉쇄조치도 쿠르드인들의 국가 건설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엔을 이루고 있는 국가들 역시 쿠르드 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걸프 지역의 국가간 세력균형과 석유안보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유엔의 경제봉쇄정책과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후세인 정권이 약화됐기 때문에 쿠르드족은 북부지역에서 자치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이라크전쟁 후 이라크엔 현재 7000명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애당초 미군과 쿠르드족은 우호적이었으나 지금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상태다. 이는 미군이 이슬람 문화와 쿠르드 관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쿠르드인들이 전통결혼식을 하면서 축하의식으로 하늘을 향하여 총을 쏘는 것을 미군이 무력 발포로 오인해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최근 미군과 쿠르드족은 점령군과 피지배자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한편 쿠르드족은 이라크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해 이라크 재건에 앞장서고 있다.
쿠르드족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버금가는 중요한 정치적, 국제적 이슈다. 쿠르드족은 소수민족이지만 그 수가 많기 때문에 어느 국가에서도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만 해도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터키, 이란, 이라크 등 3개국 중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나라에서 쿠르드족 저항운동이 활발했다.
현재 쿠르드족은 이라크 과도통치위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는 이라크가 쿠르드 저항운동의 정치중심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쿠르드족 저항운동은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세계의 갈등지도’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