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제값을 치르고 책을 사는 것이 서평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것을 엄정한 서평의 전제 조건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다.
완전무결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평자들이 서평, 리뷰, 독후감 등을 쓰면서 책의 단점에 대해 애써 눈감는 가장 큰 이유는 뭘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낯짝 사회’이기 때문이다. 책을 쓰고, 우리말로 옮기고, 만든 이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서평자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학계와 출판 동네의 범위는 의외로 좁아서 전혀 낯선 사람도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잠재적인 ‘인터뷰이’와의 친밀한 만남을 꺼린다는 어느 방송인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 아무튼 나는 이 지면에서만큼은 안면을 몰수하려 한다.
그들은 왜 내부고발자가 됐을까
자넷 빌·피터 스타우든마이어 공저 ‘에코파시즘’(김상영 옮김, 책으로만나는세상)은 유행에 편승한 책이다. 즉 이 책은 최근 한국 출판계에 화제를 몰고온 비외른 롬보르의 ‘회의적 환경주의자’(에코리브르)에 이어 환경·생태운동 흠집내기에 나선 것이다. 두 권을 갖고 유행이라 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회의적 환경주의자’와 ‘에코파시즘’은 기존 환경·생태운동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가 선명하게 부각될 뿐 아니라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기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또한 두 책이 모두 ‘내부자 고발’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롬보르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좌익 성향의 그린피스 회원으로 활동했고 또 환경문제에도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에코파시즘’의 공저자들 역시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론을 따르는 좌파 생태운동가다.
그런데 두 책이 환경·생태운동을 비판하는 방식은 다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가 환경비관론의 근거가 되는 방대한 분량의 각종 통계 자료를 반박하는 형식을 취한다면, ‘에코파시즘’은 생태학의 역사 자체를 비판한다. 어떤 사회운동에도 잘못이 없을 수 없으므로 환경·생태운동을 향한 비판은 당연하다. 다만, 그러한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꼼꼼하게 따져볼 일이다(‘회의적 환경주의자’의 문제점은 ‘녹색평론’(제73호, 2003년 11~12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 참조 바람). 아울러 그런 책들을 번역·출간한 의도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를 펴낸 출판사의 대표는 공개된 자리에서 환경·생태운동의 대세에 맞서는 반론을 제출해 담론의 활성화를 꾀한다는 출간 의도를 밝힌 바 있다. 담론의 활성화는 어떨는지 몰라도 ‘언론 플레이’에 힘입어 초판 1쇄는 무난히 팔렸기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런데 ‘에코파시즘’의 출간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환경·생태운동에서 나타나는 파시즘적 요소를 경계하는 것은 우리 현실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생태적 요소와 파시즘이 뒤섞인 사례를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된다. 나치처럼 생태철학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지만, 박정희 정권도 ‘자연보호헌장’을 반포하고 ‘그린벨트’를 설정하지 않았던가. 이 책의 판매가 그리 신통치 않으리라는 것은 출판사 도 예상하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숨은 의도라도 있는 것일까?
독일 파시즘과 생태론
생태론의 기원과 전개 양상을 독일 파시즘의 과거와 현재에 비춰보는 ‘에코파시즘’은, 크게 두 편의 글- 피터 스타우든마이어의 ‘파시스트 생태론 나치당의 녹색 분파와 그 역사적 전례’, 자넷 빌의 ‘생태론과 독일 극우파 안에서의 파시즘의 현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스타우든마이어는 에코파시즘을 오늘의 정치문화에서 간과하기 쉬운 치명적인 파시즘적 경향의 하나로 간주한다. 에코파시즘은 “환경주의적 관심을 수반한 진정한 파시스트 운동에의 몰두 현상”을 말하는데 스타우든마이어는 환경주의와 파시즘이 이질적으로 결합한 실제 사례를 독일민족사회주의의 ‘녹색 분파’에서 찾는다.
스타우든마이어는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를 뒤섞어 현대의 환경운동과 연계된 관념·태도·실천 따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그가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를 구별하지 않는 것은 “단지 오늘날의 관심사들과의 연계성을 부각시키려는 해석적 의도”라지만, 웬일인지 스타우든마이어는 ‘생태주의’ 쪽에 비판의 화살을 겨눈 듯하다. 영국의 정치학자 앤드루 돕슨이 ‘녹색정치사상’(민음사)에서 지적한 대로 “생태주의는 환경주의와 달리 정치, 경제, 사회적 관행의 전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데도 말이다.
그래도 환경테마를 수용한 것이 나치운동의 대중화와 나치 집권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는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나치의 ‘녹색 분파’가 힘을 잃은 나치정권의 마지막 3년간, 오히려 ‘녹색 분파’의 활동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논리는 좀 허술하다.
한편 자넷 빌은 ‘생태론과 독일 극우파 안에서의 파시즘의 현대화’에서 현재 독일 정치 지형도에서 낮은 언덕쯤으로 짐작되는 에코파시스트 정당들을 일별한 다음, ‘녹색 아돌프’의 필요성을 역설한 루돌프 바로의 비판에 집중한다. 바로를 편들 생각은 없지만 자넷 빌의 바로 비판은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스타우든마이어와 자넷 빌은 “우리는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다. 우리는 앞쪽일 뿐이다”라고 하는 생태주의자들의 탈이념적 태도를 거세게 비판한다. 스타우든마이어는 단독으로는 어떤 정치적 규정도 하지 않는 생태론이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려면 사회에 대한 어떤 이론을 통해 해석되고 매개돼야 한다”고 한다. 자넷 빌은 “생태의 정치화는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라며 생태정치는 “사회적 억압에 대한 합리적이고 인간주의적이며, 진정으로 평등주의적인 비판인 좌파의 국제주의에 굳게 뿌리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우파의 생태위기 책임공방
또 스타우든마이어와 자넷 빌은 마르크스의 후예답게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을 ‘경제적 시장관계’에 돌린다. 그러면서 유물론을 생태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시각에는 발끈한다. 그러나 생태위기의 책임을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어느 한쪽에만 묻는 것은 온당치 않다. 결국 양쪽이 절반씩 책임을 져야 한다.
두 저자는 사회생태주의자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념적 지향점은 ‘생태’보다 ‘사회’ 쪽으로 기운 듯하다. 나는 환경·생태운동이 사회적 불평등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환경·생태운동의 섣부른 정치세력화와 ‘녹적연대’ 혹은 ‘적록연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생태주의와 사회주의가 힘을 모으자는 목소리는 주로 전·현직 사회주의자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두 목소리는 미심쩍다.
조절이론가에서 생태주의자로 변신한 알랭 리피에츠의 이념적 전향 사유에는 공감하나 그가 펼치는 ‘녹색 희망’(이후)은 분홍빛(덜 빠진 붉은색)이다. ‘녹색은 적색이다’(북막스)라고 외치는 폴 먹가의 색맹적 슬로건은 비료의 사용과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용인하는 그의 기이한 아량만큼이나 터무니없다. 생태운동과 생태 사회의 창출에서 이성,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스타우든마이어와 자넷 빌의 견해는 폴 먹가와 비슷하다.
생태운동에서 이론의 우위, 그것도 사회주의로 짐작되는 진보 이념의 주도권 행사를 당연시하는 것은 이 책의 번역자도 공유하는 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공백을 싫어한다. 이론이 결여된 장소에 이데올로기는 충만하다”는 번역자의 진술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괴테의 말마따나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뿐인 것을.”
어쨌든 ‘에코파시즘’ 번역 출간의 숨은 의도를 이제야 알 듯하다. 그것은 철 지난 이념과 이론의 지배력을 되찾기 위한 부질없는 시도라고 하겠다. 이 책이 “단지 하나의 입장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번역자의 소망을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환경·생태운동이 다른 분야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여러 사회운동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