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박준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아야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나온다

  • 이기진│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doyoce@donga.com│

    입력2010-04-05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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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자는 행정업무 부담에서 벗어나 연구에 몰두해야
    • 교육과학기술부는 과학 분야 예산을 과학자 판단에 맡겨야
    •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시스템도 객관적인 근거가 담보돼야
    • 청와대 교육문화과학수석 교육문화와 과학으로 이원화 필요
    박준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 1949년 경북 상주 출생<br>● 1972년 서울대 화학과<br>● 1983년 미국 일리노이대 무기화학 박사<br>● 1983년 미국 듀폰 중앙연구소 연구원<br>● 1984년 국방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br>● 1986년 KAIST 교수(~현재·BK21 분자과학사업단장, 탄소-금속 혼성 나노소재 국가지정연구실 단장, 학생처장, 교수협의회 회장)<br>● 2002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현재)<br>● 2008년 제8대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연구하지 않는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국책사업을 수행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의 연구원들에게는 예삿말로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몇 만 원 씀씀이도 보고해야 하는 상황에서 연구는 때로 뒷전으로 밀리고 성과부족 질책이 그들의 몫이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박준택(59)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은 이런 현실을 과학자다운 면모와 경영자이자 행정가적 발상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국내 과학 분야 인재 양성의 메카’인 KAIST에서 25년 동안 일해온 그는 2008년 5월 제8대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으로 임명된 뒤 최근 대규모 조직개편을 단행하면서 국내 과학기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가 단행한 조직개편은 정부 눈치 보기나 입맛에 맞추기 위한 조직의 슬림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런 박 원장을 3월8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 오랫동안 KAIST 교수 생활을 하다 출연연 기관장으로 1년 반을 보낸 뒤 최근 대규모 조직개편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로 연구하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대학 조직이나 교수 역할에 대해 이런 점을 고쳤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출연연 기관장에 부임한 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행정부담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었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출연연 연구자들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이런저런 행정부담이 만만치 않아요. 심각한 문제는 능력이 뛰어난 연구원들이 행정업무에 매달려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연구부는 몇 개의 팀으로 구성돼 있는데 팀 간 벽이 높아 현대의 연구추세인 공동연구와 융합연구도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정업무에 관심과 재능이 있는 사람은 부서장으로 임명하고 다른 과학자는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대학의 꽃이 보직교수가 아닌 정교수이듯, 출연연의 꽃도 부장이 아닌 책임연구원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박 원장은 연구부서의 팀제를 폐지했다. 본원의 경우 종전 7부 12팀에서 12팀을 폐지하고 7개 부서로 슬림화했다. 또 9개 지역센터의 6부8팀을 7부3팀으로 개편했다. 대전에 있는 본원 및 오창캠퍼스를 포함한 지역센터 팀장 17명을 없앤 것. 박 원장은 2개월 동안 연구부서 부장, 팀장, 연구원들과 일일이 개별면담과 설문조사를 거쳐 ‘행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다. 연구원 내 업무규정도 확 뜯어고쳐 결재단계를 크게 축소했다.

    “나도 과학자입니다.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행정부담 완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에 전념해야 할 부장과 팀장들이 회의 참석이니, 서류작성이니, 행정업무에 매달리는 폐단을 없애고 실험실로 돌아가게 하려는 겁니다.”

    기초연의 조직개편이 단행되자 타 출연연에서도 새로운 조직모델이라고 평가하며 벤치마킹에 나서고 있다.

    부장에서 연구원 ‘전락’ 너무 기쁘다

    ▼ 팀장 보직을 없앤 데 대한 불만은 없었나요.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고 기득권이라는 허상을 누렸던 연구원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자들에게 행정부담은 연구를 방해하는 짐일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대부분의 출연연이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능력이 뛰어난 연구자를 연구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박준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의 4대 장비 중 하나인 초고전압투과전자현미경.

    이 같은 박 원장의 조직개편에 대해 기자가 평소 알고 지내던 부장급 연구원인 물성과학연구부의 김해진(46) 박사에게 불만이 없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부장에서 일반 연구원으로 ‘전락’해 너무도 기쁘고 홀가분하다”고 밝혔다. 미래 동력으로 각광받는 나노(10억분의 1 단위) 분야에서 핵심적 존재인 그는 “부장업무로 빼앗겼던 하루 4~5시간을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미래 청정에너지와 친환경을 추구하는 ‘수소 경제’ 연구에 밤새워 몰두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 타 출연연도 조직개편을 하면 좋은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인가요.

    “ 다른 출연연도 더 발전하기 위해서 항상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부 문제가 해결되고 외부 지원이 잇따른다면 우수한 연구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만약 이러한 조건이 갖춰졌음에도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연구자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고, 당연히 출연연은 비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운동선수가 여건이 부족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이해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운동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 외부 지원이라면 정부의 예산 확대를 말하는 것인가요.

    “물론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지원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연구영역이 갈수록 분화되고 한정된 예산을 나누다보니 수백억원 규모의 대형 연구 프로젝트는 갈수록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선진국에 대한 ‘추격형 연구개발’에서 선진국과 대등하거나 앞서나가는 ‘선도형 연구개발’이 절실하지만,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대형 연구 프로젝트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외부 지원이란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지원에 추가적으로 민간 차원의 기부를 말합니다. 지난해까지 민간 기부를 보면 대학에 집중돼 2008년 전국 사립대학의 기부금 총액이 4850억원에 달합니다. 또 KAIST는 지난해까지 2년간 약 910억원의 민간 기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대학에 집중된 기부자 대부분은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국가 경쟁력 향상에 일조하는 것을 가장 큰 기부 이유로 제시했습니다. 단순히 대학에 대한 기부가 아니라 국내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기부인 셈이지요. 현재까지 국내 과학기술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곳이 출연연이었다는 점을 누구나 인정하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민간 기부는 출연연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출연연도 정부예산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대학처럼 적극적으로 민간 기부 유치에 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저 개인도 이제는 기업체도 찾아 다니고 신문기고 등을 통해 여론을 확산시켜나갈 계획입니다.”

    ▼ 연구개발 예산이 부족해 민간 기부를 기대한다는 의미인가요.

    “단순히 적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으로의 연구개발 방향 등을 고려했을 때 적다는 의미입니다. 올해 국내 연구개발(R·D) 예산은 13조6000억원으로 작은 규모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추격형 연구개발에서 선도형 연구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이 예산이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원장은 “기초연의 벤치마킹 대상 해외 선진연구기관 중 하나인 일본의 대표적 연구소 RIKEN(일본이화학연구소)의 1년 예산은 1조3000억원”이라며 “이는 우리나라 전체 R·D 예산의 10%”라고 지적했다.

    연구원의 사기 대책 절실

    ▼ 출연연에 대한 거버넌스 개편 논의와 관련한 출연연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거버넌스 개편 논의 이전 지난 40여 년간 출연연에 약 35조원의 연구개발자금을 투자했는데, 출연연이 해놓은 일이 무엇이냐는 지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비판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 비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35조원이라는 돈이 40년 동안 26개 출연연에 나눠 지원됐다고 생각해보세요. 각 출연연 단위로는 그리 큰 액수가 아닙니다. 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출연연에 대한 구조조정이나 감원 등으로 이미 연구자들의 사기가 상당부분 떨어졌습니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관장들이 연구자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정부 입장을 대변하다 보니 기관장에 대한 연구자들의 신뢰도 떨어질 대로 떨어졌습니다. 연구자로서의 사기도 떨어지고 기관장에 대한 신뢰도 낮아진 상황에서 우수한 연구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연연이 더 좋은 업적을 낼 수 있도록 안정적인 연구 환경, 예산 확보, 처우 개선, 정년 회복, 개선된 연금 혜택 등도 거버넌스 문제와 함께 고려돼야 합니다.”

    박준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박준택 원장이 집무실에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현재 국내 과학기술 정책에 대해 평가하신다면….

    “현재 국내 과학기술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과학자의 의견이 효과적으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산인데 이 예산 배분이 공무원들의 머릿속에서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집중과 선택의 결정을 내리는 의사결정 구조 속에 과학자의 참여가 크지 않습니다. 차라리 과학자들에게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고 정부부처나 담당 공무원은 예산이 낭비되지는 않는지, 더 투자하거나 중단할 것인지 등을 판단하는 견제 역할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대원칙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돼야 합니다.”

    ▼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다수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사례를 들고 싶습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산하에 80여 개 연구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중복연구에 따른 예산낭비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중복연구가 우리의 경쟁력이다’라는 겁니다. 중복연구를 통해서 도출된 가장 우수한 연구 성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이를 세계적인 연구 성과로 이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과제명이 비슷하기만 해도 중복연구니, 예산낭비니 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적용하는 셈이죠. 한 사람의 연구자나 하나의 연구조직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연구자, 여러 연구조직의 연구 결과물 중 가장 우수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산술적으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닌가요.”

    박 원장은 여기서 “독일에서의 원칙은 ‘정부는 연구 자금을 지원하지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미국과 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는 원칙”이라며 “간섭을 하지 않는 대신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기관을 통해 각 연구자, 연구조직, 연구기관에 대한 평가를 하고 문제가 있다면 해당 기관장을 해임하면 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현재 출연연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국내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 형태로 본격적인 연구개발이 이뤄진 것이 40~50여 년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기간에 많은 성과물을 이뤄냈습니다. 문제는 기초과학과 연구개발 분야에서는 이러한 성장이 적용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응용기술이나 산업기술 등에서는 국내에서 개발하지 못한 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으로 우회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기초과학은 첫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연연들은 다른 공기업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구조조정이며 예산삭감 등과 같은 부침(浮沈)에 시달려왔습니다. 물론 출연연이 각종 정부시책의 무풍지대가 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자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과 투자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학기술계 컨트롤 타워 부재

    ▼ 과학기술정책에 과학자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반영하는 대안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교육부와 과기부의 통합으로 독자적인 소관부처가 없는 상황에서 부처나 기관 차원에서의 대안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의 이공계 진학 기피현상에서 보듯이 현재 우리의 현실은 과학자가 존경받는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과학자가 존경받고 과학자의 의견이 과학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부차원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과학기술계의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지적을 많이 합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활성화, 청와대 교육문화과학수석을 교육문화 및 과학수석으로 이원화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게 대부분 과학자의 의견입니다.”

    ▼ 기초과학은 무엇이라 정의하십니까.

    “말 그대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 가장 기초적인 학문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이라는 개념을 세우기 위해서는 물리학에 토대를 둬야 하고, 우주로켓이나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기초과학은 한 나라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력, 향후 발전 가능성 등을 예측할 수 있는 잣대입니다. 또 기초과학이 토대가 돼야 응용과학이나 응용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도체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통신기기 의약품 선박 항공기 군사무기 등도 화학 물리학 지질학 천문학 등의 기초과학을 통해 개발된 기술들입니다.”

    ▼ 우리나라의 기초과학 수준을 평가한다면?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수는 한 나라 기초과학 수준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입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후반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기초과학 연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의 기초과학 연구 토대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것과 비교하면 미천합니다. 그러함에도 세계 최고수준의 반도체 생산국이고 IT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선박을 짓는 조선산업도, 석유나 석탄 에너지를 이용하는 석유화학, 화력발전 심지어 원자력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습니다. 서구 선진국과 비교하면 얄팍할 수밖에 없는 기초과학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국이 이룩한 기초과학 연구 결과물을 우리가 재빨리 빌려와 응용기술로 개발해냈기 때문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내세우는 기술의 뿌리는 모두 서구 선진국이 이룩한 기초과학 연구 결과물에 의탁하고 있는 셈입니다.”

    박 원장은 “우리의 위치는 중국이나 인도 등 후발경제대국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으며 ‘학문의 확산’이라는 이름으로 연구결과물을 순순히 내줬던 서구 선진국으로부터도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우리 힘으로 기초과학 발전을 진흥시키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 대학과 출연연을 모두 경험하셨는데 두 곳의 차이점은….

    “선진국에선 연구자가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평생을 바쳐 연구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대학이나 출연연 구분 없이 연구비에 따라 전혀 다른 영역의 연구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연구의 깊이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벨상 수상자 배출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 분야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대부분 처음 시작했던 연구주제를 수십 년간 이어오며 축적된 결과에 대한 평가를 받아 수상했습니다.”

    ‘놀고먹어도’ 잘 드러나지 않아

    박준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실험장비를 조작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모습.

    ▼ 해외 선진국 연구시스템과 국내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미국의 경우 대학이나 연구기관 구분 없이 연구자나 연구조직 하나하나가 독립된 형태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지만, 평가시스템이 철저하고 일관된 예산이 배분됩니다. 이를 통해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연구자가 평생 동안 일관된 주제를 연구할 수 있는 지원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교실제 형태의 연구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교수 밑에 조교수, 부교수, 그리고 대학원생들까지 계층적으로 구조화돼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형태입니다. 일본은 정교수가 되기 전까지는 연구를 태만히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평가를 통해 검증되지 않는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공동연구를 통한 시너지 효과는 연구결과물에서 보다 증폭되기도 합니다. 일관된 주제로 장기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구조죠.

    반면 우리나라는 미국식에 가까운 연구시스템을 채용해 비교적 독립적인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식과 같은 철저한 평가시스템이 연계돼야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체제하에서는 극단적으로는 연구자가 ‘놀고먹어도’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관된 주제로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연구비에 따라 다른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깊이 있는 연구가 불가능하지요. 이것이 국내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노벨상을 언급하셨는데 우리나라에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2009 과학기술통계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은 2008년 기준으로 두 자릿수 순위이지만, 과학경쟁력은 세계 5위, 기술경쟁력은 14위입니다. 과학기술 경쟁력이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이웃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만 13명을 배출했습니다. 경제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이 각 3명, 헝가리 2명, 이집트, 체코, 인도 파키스탄도 각 1명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초과학연구에 대한 투자가 적고 연구자가 평생 동안 일관주제로 연구를 수행할 수 없는 구조가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박 원장은 “과학자가 존경받고, 과학정책이나 연구개발 투자 방향 결정과정에서 과학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될 수 있을 것”이라며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 때 어린 청소년들이 스포츠에 관심을 갖듯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때 노벨상을 타겠다는 꿈을 갖는 아이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 연구개발의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1901년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이후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를 분석한 결과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상 등 3개 과학 분야 수상자는 그동안 304회, 539명이었습니다. 이 중 20%인 61차례는 새로운 분석 장비 및 분석기술 개발을 통해 수상이 이뤄졌습니다. 또 일본이 2000년부터 3년 연속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모두 분석과학 분야였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분석과학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노벨상 수상자 배출의 지름길이라 생각합니다. 분석과학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등 노벨상 수상 영역의 학문분야뿐만 아니라 BT NT IT ET 등 기초과학 전 분야에 걸쳐 연구개발의 토대가 되는 학문입니다. 분석장비와 분석기술을 모두 포괄하는 분석과학의 강국이 된다는 의미는 노벨상 수상자 배출뿐만 아니라 국내 기초과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밑거름이 되는 연구영역이지요.”

    장시간의 인터뷰를 끝내면서 박 원장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부 차원에서 특히 기초과학 분야만이라도 앞에서 말한 변화가 이뤄진다면 우리나라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배출이 그만큼 빨라질 겁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은?

    박준택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하 기초연)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반이 되는 기초과학 진흥을 위해 1988년 설립된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현재는 대덕본원과 오창캠퍼스 및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전주, 춘천, 순천, 강릉, 제주의 9개 지역에 걸친 전국적 네트워크 조직을 갖추고 있다.

    기초연은 세계적 수준의 첨단 연구시설·장비를 활용한 전문분석지원 및 공동 활용을 통해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역량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첨단 분석기술 및 세계적인 분석장비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국내외 우수한 연구진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연구 성과 창출도 도모하고 있다.

    첨단장비와 분석지원 공동연구 분야에서 20여 년간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충남대와 공동으로 ‘분석과학기술대학원’을 설립하여 분석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에 도전하는 핵심인재를 배출하고 있으며, 국가 연구시설·장비의 전략적 확충과 공동 활용 촉진을 위해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를 설치해 연구시설·장비의 총괄 운영관리 및 체계적 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 과학 활동 지원사업을 통해 청소년에게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과학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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