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북한이탈주민이 어쩌다…
北 “월남하려면 해봐라. 南이 돌려보낸다”
文 강제 북송이 北 ‘급변사태’ 막아
누구를 위한 ‘재인山城’인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구속에 대해 “안보사안을 정쟁 대상으로 삼고 국가안보에 헌신해 온 공직자들의 자부심을 짓밟으며 안보 체계를 무력화하는 분별없는 처사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동아DB]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북한이탈주민 수가 2020년부터 급감했을까. 2019년 서해상으로 이탈해 귀순한 북한 주민 두 명을 문재인 정부가 강제로 북송한 사실이 결정적 이유다. 북한 내 폭정에 신음하며 자유민주주의 한국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에게 강제 북송은 거대한 ‘산성(山城)’이 됐다. 북한 외교관을 지내고 1991년 탈북한 고영환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탈북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에게 한국은 더는 ‘희망의 등대’가 아니게 됐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적 산성은 ‘명박산성’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산성이라는 낱말의 합성어다. 2008년 6월 10일 6·10 민주화 항쟁 21주년을 맞아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획되자,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난입과 전경과의 충돌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도심 곳곳에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당시 야권과 그 지지자들이 조롱의 의미를 담아 일컬은 것이다. 명박산성과 비교하면 강제 북송은 ‘재인산성’이라고 할 만하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오려는 북한 주민을 막는, 거대하고 까마득한 벽이다.
‘재앙’ 초래한 강제 북송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등 문재인 정부 안보 당국 인사들은 ‘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과 관련해 검찰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뉴스1]
윤석열 정부의 사법 조치 결과로 피해자, 즉 탈북 주민 2명이 얻을 법률적 이익은 본질적으론 없다. 그들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시 살릴 방법이 없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한변)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살인미수죄로 고발한 이유다. 수사하고 있는 사안에 대한 사법적 쟁점을 이 글에서 다룰 생각은 없다. 사법적 처리 결과에 관계없이 강제 북송은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정치에 ‘재앙’ 수준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내구력(Regime Persistency)을 획기적으로 강화했고 한국 정치 분열을 심화했으며 북한이탈주민을 매개로 한 통일 준비를 좌절시켰다.
北 “탈북자 북송하기로 南과 협의했다”
1994년 북한이탈주민이 된 정성산 씨는 북한 내 소식통을 통해 북한 내부 강연 자료를 획득해 공개했다. 김정은 체제가 북한 체제 결속에 강제 북송을 활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자료다. 이 자료는 국정원이 추가로 검증해 볼 가치가 있다. 필자가 소개하는 내용에 대해 국정원 등 관련 기관의 엄밀한 검증을 기대한다. 이미 정성산 씨에 의해 언론에 공개됐지만 통일부 등 한국 정부 측에서 내용의 진위를 언급한 바 없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2022년 2월 초 북한 당국이 평양에 있는 대학에서 학생을 상대로 한 강연이다. 강연 제목은 ‘남조선 비법월경도주자들의 비참한 말로’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김정은 동지와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으로 도주한 월남 탈북자를 체포해 공화국으로 압송하는 데 협의했다.
2. 현재 한국 국가정보원, 통일부는 한국으로 도망간 월남 탈북자들을 공화국으로 보내는 데 무조건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3. 2021년과 2022년 불법 월경해 한국으로 간 월남탈북자들은 북한에서 가장 악질적 죄를 지은 범죄자다.
4. 따라서 김정은 동지와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국가정보원과 북한 보위성의 협의에 따라 월남 탈북자들을 무조건 공화국으로 압송하기로 비준했다.
5. 그러니 한국으로 도망치려면 가라. 남조선에서 체포해 공화국으로 강제 북송시킨다.
2019년 문재인 정부가 강제로 북송시킨 청진시 어로공 2명 사례, 2020년 서해 지역으로 탈북하다 잡혀 강제로 북송된 사례가 위 내용에 해당한다.
북한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는 면밀한 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 정부가 북한과 강제 북송을 협의·비준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판문점에서 진행된 야만적 강제 북송 사례를 편집한 비디오를 보여주면서 교육한다면 북한 주민은 한국 정부가 강제 북송을 협의, 약속한 것으로 속을 수밖에 없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 처지를 배려하면서 체제 교육을 할 여지는 눈곱만큼도 없다. 세계북한연구학회 회장인 안찬일 박사는 북한이 강제북송 동영상을 자체적으로 편집해 해외에 체류하는 북한 주민을 반복 교육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탈주민 규모가 줄어드는 데 영향을 줬을 것이 분명하다.
北 체제 변화 가능성 없애버린 文정부
내구력이란 ‘한 체제가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북한 체제 내구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내구력을 평가하기 위해선 체제의 장애요인을 식별하고, 그 요인의 파괴력을 보면 내구력이 강화되는지 약화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체제 내구력이 한계에 이르는 상황을 이른바 ‘급변사태’라고 정의하고 대응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다.급변사태는 ①전쟁 이외의 다양한 위기사태(various crisis short of war) ②한반도 안정 위협 및 전쟁으로 발전 가능한 북한 불안정(instability in NK which threatens the ROK and peace on the penisula) ③북한 내 불안정 상황을 전반적으로 취급한 총괄개념(an overarching concept for dealing with instability)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크게 여섯 가지 범주를 상정하고 대비책을 논의했다.
여섯 가지 범주 가운데 한미 안보전문가들은 북한 주민이 대규모로 탈출하는 상황을 우선 고려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2년까지 꾸준히 증가한 북한이탈주민 규모는 북한 내구력의 한계를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내구력의 한계라는 학문적 표현을 직역하면 ‘북한 체제의 위기요인’이다. 탈북자 규모 증가는 북한 체제의 위기 징후로 인식됐던 것이다. 당연히 2011년 권력을 승계한 김정은에겐 북한이탈주민 규모를 줄이고, 종국적으론 제로로 만드는 것이 체제 유지를 위한 대과업이 됐다.
2019년 강제 북송이라는 산성을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줬고, 김정은은 산성 위에 탈북 통제 망루와 지휘소를 지어 ‘탈북 제로’ 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대규모 탈북을 매개로 한 북한 급변사태 논의가 더는 북한 체제의 미래를 설명하거나, 예측하는 데 학문적 도구가 될 수 없게 됐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 체제 내부에서 진행될 수 있었던 변화와 이에 대한 기대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강제 북송은 한국의 이념적 분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의 안보정책 주요 결정자들이 사법적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2022년 12월 2일 월드컵 16강이 확정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문재인 정부의 안보 사령탑,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이 구속됐다.
北, 南 분열 즐기고 부채질할 것
서훈 전 실장이 구속되자 12월 3일 국민의힘은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가”라며 문 전 대통령을 겨냥한 직접 수사를 촉구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정권의 입맛에 맞춰 결론이 정해진 정치보복 수사”라고 비판하면서 “판단을 바꿀 근거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야당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고 반발했다. 문 전 대통령은 서 전 실장 구속에 대해 “안보 사안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고 오랜 세월 국가안보에 헌신해 온 공직자들의 자부심을 짓밟으며 안보 체계를 무력화하는 분별없는 처사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는 의견을 발표했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강제 북송 사건에 대한 사법적 조사와 최종 판단 과정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헌법정신, 헌법 조항(3조), 대법원 판례 등에 따르면 동해에서 귀순한 북한 주민은 한국 국민이다. 국민이 된다는 것은 국민이 누리는 모든 사법적·정치적 권리를 얻게 됨을 의미한다. 법리에 따라 순리대로 나온 결과엔 정쟁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이미 문 전 대통령은 정쟁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낸 입장문은 정쟁에서 이기기 위한, ‘세력의 결집’을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정치권의 진영·이념 대결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 상당수도 법리적 판단을 차분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정치보복, 정치공세 프레임에 의거해 사안을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치 균열이 심화될 함정이 이 대목에 있다. 북한은 한국의 분열을 즐길 것이다. 사이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분열을 부채질할 것이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노력을 반(反)통일 세력의 준동으로 낙인찍는 정치 프레임이 짜일 것이다. 이미 북한은 선전 매체 ‘조선의 오늘’ 등을 통해 윤석열 정부에 ‘가장 위험한 시대의 위험한 정부’라는 슬로건을 씌우며 조직적으로 퇴진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강제 북송에 대한 사법절차 진행은 일시적으로 남북관계를 얼어붙게 할 것이다. 이미 북한은 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함께 ‘북한 체제의 종말’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한 윤석열 정부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 앞에 정녕 두렵지 않은가
2022년 11월 27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성공에 기여한 공로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보도했다. 김 총비서는 이 행사에 둘째 딸 김주애를 동행시켰다. [동아DB]
‘빅스텝 후퇴’는 잘못된 주장이다. ‘빅스텝 정상화’가 옳다. 남북관계의 일시적 교착은 빅스텝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고통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하에서 한국의 일부 기업인과 사회단체인사가 북한 고위 정책결정자들을 만나 정치자금과 선물을 건넨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 도대체 당시 국정원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도대체 국정원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냐는 생각까지 든다. 그 시간에 안보 당국은 ‘월경 국민’을 ‘월북 국민’으로 만들고, 강제 북송을 결정했다. 이러한 남북관계는 분명 비정상이다.
서해 피격 공무원 월북 조작과 강제 북송을 대가로 얻은 ‘가짜 평화 프로세스’는 북한의 기만에 따른 산물이다. 헌법이 밝힌 통일 준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동안 북한은 핵 강대국이 됐고, 탈북자 제로 시대로 향하는 교두보를 만들었다. 누구를 위한 재인산성이냐고 질문한다면 답은 뻔하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과 강제 북송 사건에 대한 사법 절차 진행은 한국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들 것이다. 한국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에게 한국이 다시 희망의 등대가 되는 길이다. 이러한 길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길이고, ‘빅스텝’이다.
2022년 11월 18일 김정은은 둘째 자식 김주애와 부인 이설주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현장에 동행시켰다. 그들을 동행시킨 데에는 김정은 체제가 내외에 밝히고 싶은 고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Strategic Communication·SC)이 내포돼 있다. 김정은 체제는 어떠한 외부 위협에도 핵무기로 안전을 확보해 온전하게 대를 이어갈 자신감을 과시한 것이다. 또 김정은 체제가 영원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김씨 일가가 쌓아놓은 ‘권력산성’ 또는 ‘체제산성’을 넘보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것이다.
“범죄 용의자인 북한이탈주민을 강제송환하지 않으면 한국 국민 안전이 위험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추방한다”는 문재인 정부 안보 당국자의 과거 발언은 탈북자 제로 시대가 초래된 까닭을 생각하게 한다. 강조하건대 북한 당국은 학생에게 “월남하면 강제 송환하기로 남측 지도자와 협의돼 있다”고 교육하고 있다. 이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역사 앞에 정녕 두렵지 않은가”라고 묻고 싶다. 한국 국민이 되려다가 강제송환돼 형장에서 사라진 두 청년의 명복을 대한민국의,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의 이름으로 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왜 이 두 명에게선 비켜 갔는가.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신동아 1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