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초상화가였던 이상원 화백
영화 간판, 미군 초상화 그리며 연명
안중근기념관 준비하던 이은상이 발굴
무명 화가의 안중근 영정에 대통령도 감탄
이상원 화백이 그린 안중근 의사의 영정. [안중근의사기념관]
거대한 원판을 세워놓은 듯 원형의 건물이 참신하고 매력적이며 산과 계곡과도 잘 어우러진다. 이상원 화백은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인간 삶의 본질을 대면케 하는 그림을 창작해 왔다. 개관 10주년 기념전은 4월 27일부터 ‘이상원, 50년 예술의 여정-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독학으로 자신의 미술 세계를 일궈온 이상원 화백의 50년 화력(畵歷)을 만나볼 수 있는 자리다.
전시 동선(動線)의 첫머리에서 예상치 못한 그림을 한 점 만났다. ‘안중근 의사 영정’(1970년 작 유화)이다. 자주 본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진을 통해 종종 보았던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초상화. 이 영정 그림이 이상원 화백의 그림이었다니. 그림은 익숙한 듯하면서 어딘가 다소 낯선 느낌도 든다. 춘천의 산속 미술관에서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만난다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영정 그림의 소장처는 서울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부터 11월 초까지 대여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장면들
이 영정은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 개관에 맞춰 이상원 화백이 제작했다. 1970년이라면 이상원 화백의 나이가 겨우 35세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상원은 대학도 나오지 않은,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온 화가 아니던가. 김은호도 아니고 장우성, 김기창도 아닌 ‘30대 중반의 무명 화가’가 위대한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그것도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걸릴 공식 영정을 그렸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안중근 의사의 사진.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일제가 찍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현재 전해 오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은 10여 장이다. 모두 하얼빈 의거 무렵부터 순국일(1910년 3월 26일) 사이에 촬영된 것이다. 거사를 결행한 1909년에 안 의사의 나이가 30세였으니, 29세 이전에 찍은 안 의사의 사진은 없는 셈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거사 사흘 전에 찍은 것이다. 1909년 10월 23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 의사는 중국인 사진관에서 우덕순, 유동하 독립운동 동지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헤어스타일과 복장이 매우 단정한 것으로 미루어 이발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결연하면서도 성(聖)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약간의 긴장감도 묻어난다.
나머지 사진들은 모두 거사 이후에 촬영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거사 직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될 때의 사진, 체포 직후의 사진, 하얼빈 일본 영사관 구금소에서의 사진, 뤼순 감옥 수감 중일 때 사진, 두 동생(안정근, 안공근)과 빌헬름 홍 신부와의 면회 사진, 뤼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공판 모습 사진, 1910년 3월 26일 순국 직전의 사진 등등. 이렇게 안 의사의 사진은 그의 31년 삶 가운데 최후의 5개월에 집중됐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수형복 단지 사진’은 뤼순 감옥에서 일제가 촬영한 것이다. 일종의 머그 숏(mug shot·체포된 범인을 촬영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이 사진을 자신들 입맛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수형복 차림에 이름표(일종의 수형표)를 달고 있는 모습을 통해 안 의사를 범죄자로 인식시키려 했다. 안 의사의 단지 손가락을 극명하게 노출한 것도 일제의 의도였다. ‘조선인들은 예로부터 암살의 맹약(盟約)으로 무명지를 절단하는 구관(舊慣)이 있다’는 식으로, 조선인을 폄훼하고 안 의사의 단지동맹을 범죄 집단의 밀약처럼 몰고 가려 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자 일본인 사진업자들은 안 의사의 사진을 상업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대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조선인 안중근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하는 세간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활용하고자 했다. 사진업자들은 발 빠르게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넣어 엽서를 대량 제작해 유통했다. 엽서에 넣은 사진은 안 의사가 쇠사슬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 의사를 범죄자, 패배자로 비하하고 동시에 그 사진을 활용해 돈을 벌고자 한 것이다. 사진은 그들의 예상보다 많이 팔렸다. 특히 조선인들이 사진을 많이 구입했고, 그 사진을 통해 안 의사를 추모하고 구국 정신을 기렸다. 결국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사진엽서 판매를 금지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은 1913~1914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엽서를 제작해 유포하기도 했다. 이 엽서에는 안 의사가 단지하고 혈서로 대한독립이라 써놓은 태극기 사진, 안 의사가 이토 저격에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 사진, 안 의사의 얼굴 사진 4종 등이 그려져 있다.
이은상과 이상원 그리고 안중근
1970년 무명의 30대 화가 이상원은 어떻게 안중근 의사의 초상을 그리게 됐을까. 그 계기는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이었다. 1963년 설립된 안중근의사숭모회는 1960년대 말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역사와 위인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낸 숭모회는 국비 1000만 원, 국민성금 6000만 원의 건립 비용을 확보해 공사를 진행했다.
그때 안중근의사숭모회의 회장은 그 유명한 노산 이은상이었다. 이은상은 기념관에 안 의사의 영정 그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안 의사의 사진이 여러 점 있지만 아무래도 영정 그림이 적절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무렵 이상원 화백은 서울에서 주문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고 있었다. 춘천 출신의 이상원은 10대 후반이던 1950년대 초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엔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일하면서 틈틈이 주변 사람에게 초상을 그려줬고, 그 그림이 극장 관계자에게 흘러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우연히 영화 간판 그림을 그리게 됐다.
원래 그림 재주가 많아 어려서부터 마을 사람들의 초상을 도맡아 그려주던 이상원이었다. 정식으로 미술 수업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림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인물 묘사력이 특히 빼어나 영화 간판 그림에 제격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닥터 지바고’ 등 그가 그린 영화 간판은 영화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는 금세 잘나가는 영화 간판쟁이가 됐다. 서울의 대표 극장인 단성사,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등이 그의 주무대였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며 1960년대 들어선 미군 초상화를 그리게 됐다. 치밀한 인물 묘사력 덕분에 그가 그린 초상화는 미군 사이에서 최고 인기를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은상은 우연히 이 화백이 그린 미8군 사령관 초상화를 보게 됐다. 이은상은 곧바로 ‘안중근 의사 영정은 이 사람에게 맡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은호가 그린 안 의사 영정을 물리치고 이상원으로 낙점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 영정 그림의 탄생
안중근 의사 의거 61주년이 되던 1970년 10월 26일 서울 남산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이상원 화백이 그린 안중근 의사 영정도 기념관 실내의 태극기 바로 아래에 걸렸다. 개관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당시 개관식 행사 사진을 보니, 안 의사 영정 그림 앞에서 이은상이 박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있고, 그 뒤에 이상원 화백이 서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이주화 학예부장은 이상원 화백의 회고를 대신 전해 주었다. “이은상 선생이 영정에 대해 설명하자 박 대통령이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불끈 쥐더군요. 그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안 의사 영정에 크게 만족한 박 대통령은 이 화백에게 금일봉을 전달했다고 한다.
1970년 10월 안중근의사기념관 개관은 장안의 화제였다. 그해 연말까지 수많은 인파가 기념관을 찾았다. 안 의사 영정 그림도 주목을 받았다. 특히 영정을 그린 사람이 불과 35세의 무명 화가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후로 미술계 사람들은 이 화백에게 국전(國展)에 출품해 보라고 권했다. 영화 간판이나 주문 초상화와 같은 상업미술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순수미술을 해보라는 권유였다. 이 화백은 1975년부터 국전에 출품하기 시작했고, 1978년엔 동아미술제(동아일보 주최)에서 동아미술상을 수상했다.
이상원 화백의 1978년 동아미술제 수상작 ‘시간과 공간’. [이상원미술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한 몸이었던 영정
이상원 화백의 안중근 의사 영정은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 개관 직후부터 2000년까지 줄곧 한자리에 걸려 있었다. 기념관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태극기와 함께 걸려 있었다. 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안 의사 영정 앞에서 예를 갖춘다. 그렇게 30년. 안 의사 영정이 없는 기념관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안 의사 영정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2010년 새로 지어진 안중근기념관의 입구. 안중근 의사 영정 대신 동상이 서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의 영정 그림은 이렇게 그 용도가 바뀌었다. 이주화 학예부장은 이를 두고 참배의 대상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바뀐 것으로 설명한다.
“옛 기념관 시절에 안중근 의사 영정은 참배의 대상이었다. 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은 빠짐없이 태극기 아래 걸려 있는 안 의사 초상화를 올려보고 예를 갖췄다. 그것이 기념관의 기본 동선이었으니까. 그런데 새 기념관에서는 수장고로 들어갔고, 그건 하나의 미술품 혹은 독립된 초상화로 그 존재가 바뀐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안 의사의 초상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안 의사 영정이 2024년 춘천의 이상원미술관으로 나들이할 수 있었던 것도 상황이 바뀌었기에 가능했다.
두 장의 사진 보고 그린 영정
이상원 화백이 그린 영정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얼굴과 몸체의 각도가 약간 어긋나 있는 것 같다. 그림 속에서 안 의사는 얼굴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다. 얼굴의 왼쪽이 좀 더 많이 드러나는데 이를 두고 흔히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몸체는 정면향이다. 왼쪽 어깨가 살짝 앞으로 나와야 좌안7분면과 어울릴 텐데, 몸체는 정면을 반듯하게 향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이는 이상원 화백이 두 번에 걸쳐 영정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화백이 처음 보고 그린 사진은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코트를 입고 의자에 앉아 얼굴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려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사형 언도 직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순국 직전의 사진(깨끗한 한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과 그 포즈가 흡사하다. 이 화백은 널리 알려진 ‘수형복 단지 사진’을 모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의 사진을 모본으로 삼았다. 안 의사의 영정을 그리면서 굳이 수형복의 모습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을 모본으로 삼아 영정을 그렸다.
그런데 작품을 본 이은상은 다른 의견을 냈다.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그리는 데 가장 상징적인 ‘단지’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은상은 안 의사의 단지 모습을 넣어달라고 주문했고, 이 화백은 이은상의 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화백은 ‘수형복 단지 사진’을 보고 안 의사의 목 아래쪽을 다시 그렸다. 다만 이름표는 넣지 않았고 코트의 단추에 변화를 줬다. 따라서 최종 완성된 안 의사 영정은 두 장의 사진이 합쳐진 셈이다. 그렇다 보니 얼굴과 몸체의 각도가 다소 어긋나는 느낌을 주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이주화 학예부장은 “당시 이은상은 우리 문화계의 거목이었다. 하늘 같은 존재였던 이은상의 의견을 35세의 무명화가 이상원은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얼굴과 몸이 다소 어긋나 있다. 이상원 화백도 이를 아쉬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연함과 평화로움 공존하는 영정
영정 그림 속 안중근 의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멀고 높은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눈빛은 평화롭다. 안 의사의 대표적 이미지인 ‘수형복 단지 사진’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수형복 단지 사진 속의 결연함과 절절함을 넘어 좀 더 여유 있는 평화로움이라고 할까. 안 의사가 권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지만 그것은 한 개인에 대한 복수 차원이 아니라 동양권의 평화를 추구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연함, 강렬함과 평화주의가 영정에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 영정 그림은 두 장의 사진이 합쳐진 셈이다. 아울러 54년 전 이상원 화백의 생각과 이은상의 생각이 만난 것이기도 하다. 얼굴의 각도와 몸체의 각도가 다소 어색한 듯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장의 사진이 절묘하게 만나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